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카풀앱 체험하기 2018-04-06
카풀앱 체험하기우리 함께 타요! 카풀앱은 체계적인 드라이버 검증과 사용자 인증을 거친다. 덕분에 탑승자와 드라이버 모두 일반 택시보다 더 안전하게 이용이 가능하다. 70년대 일어난 오일쇼크 당시에는 카풀이 자동차 광고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카풀을 권장하여 에너지소비를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목적에서다. 그러나 낯선 이와 함께 차를 이용한다는 점 때문에 범죄 발생의 우려와 이용자 간의 불편함이 따랐고, 이 때문에 카풀 문화가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IT 기술을 활용하면서 사용자가 점차 늘고 있다. 이미 기자 주변에도 여러 명의 지인들이 카풀앱을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주변 사용자들의 호의적인 평가에 따라 직접 카풀앱 체험에 나섰다. 드라이버(운전자) 등록 과정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카풀앱은 풀러스와 럭시다. 자신의 차로 승객을 태우는 ‘드라이버’가 되기 위해선 각 회사의 드라이버 전용 앱을 핸드폰에 깔아야 한다. 모든 등록 과정은 스마트폰 앱에서 이루어진다. 안전한 카풀 이용을 위해 드라이버 검증절차는 필수. 드라이버가 되기 위한 첫 단계는 운전면허 정보입력과 면허증 사진 촬영이다. 또한 운행하는 차의 보험가입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보험증서와 자동차 신분증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등록증을 추가로 요구한다. 자동차는 본인 또는 가족 명의로 된 자동차만 가능하며 가족 명의일 경우 가족관계증명서를 추가로 제출해야 한다. 승합차, 영업용 자동차는 등록할 수 없고 탑승자의 안전을 고려해 15년 이상의 오래된 자동차도 등록이 어렵다. 카풀앱 업체는 자사와 연계된 자동차 정비소에서 자동차 점검을 무료로 실시하고 통과된 차에 한해서만 드라이버 등록을 허가하고 있다. 이 역시 이용자의 안전을 위한 조치다. 카풀은 우버(Uber)나 리프트(lyft)와 달리 유상운송행위의 성격이 약하다. 정해진 출퇴근 동선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드라이버와 탑승자 간의 상호관계도 그만큼 중요하다. 카풀앱은 이러한 성격을 고려해 드라이버와 탑승자의 프로필을 설정하고 자신에 맞는 사람들과 매칭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프로필은 집과 회사의 대략적인 위치를 띄우며 비슷한 관심사의 사람들이 뭉칠 수 있도록 맛집, 드라이브, 음악, 반려동물 등 다양한 관심사 아이콘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또한 뒷자리 선호, 비흡연, 조용한 성격(대화하고 싶지 않음) 등 운전자와 탑승자 간의 불편할 부분들을 미리 알려 비슷한 성격의 사용자가 만날 수 있게 돕는다.  카풀앱 사용방법모든 등록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기자는 퇴근을 함께 할 탑승자를 검색해 보았다. 앱에 뜨는 탑승자 목록은 현재 위치에서 가까운 탑승자일수록, 이동거리가 짧고 긴 순서에 따라 먼저 띄운다. 그리고 옆에는 이동거리와 그에 따른 요금이 표시된다. 카풀앱은 이용시간과 쿠폰에 따라 드라이버에게 추가적인 인센티브 금액을 지불하며 탑승자에게도 할인쿠폰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활용하면 같은 구간에서도 평소 1.5배 이상의 요금을 더 받을 수 있다. 탑승자를 선택하면 탑승자의 프로필 정보를 확인해 뒷좌석을 선호하는지, 조용하게 목적지를 가기 원하는지, 혹은 꺼려하는 성별이나 나이는 아닌지 확인할 수 있다. 탑승자나 드라이버가 서로 불편할 이유가 있다면 배차 취소도 가능하다. 다만 취소율이 높을수록 다음 이용이 어렵다. 취소율을 보고서 드라이버나 탑승자가 매칭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탑승자가 있는 곳까지는 T맵과 카카오 내비게이션 앱을 통해 길안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또한 탑승 전에도 드라이버와 탑승자 간의 채팅기능과 통화연결기능도 갖추고 있어 세부적인 위치확인과 시간변동 등 중요한 내용을 서로 전달할 수 있다. 기자가 만난 첫 번째 탑승자는 월간 <자동차생활> 사무실 근처의 전자회사 전장사업부에 서 일하는 30대 남자 직장인이었다. 기자의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준 그는 일주일에 평균 8회 정도 이용하는 헤비유저. 카풀앱을 이용한 지는 대략 1~2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기자는 그에게서 카풀앱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드라이버와 자동차 서류, 정비소에서 점검을 받아야만 드라이버 활동 자격이 주어진다프로필은 드라이버의 관심사를 띄워 성격이 비슷한 탑승자의 매치를 돕는다출발지와 목적지를 띄워 자신의 이동 동선에 맞는 탑승자를 선택할 수 있다드라이버 역시 탑승자의 대략적인 프로필을 확인할 수 있다탑승자가 위치한 장소까지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제공한다여정 내역에서는 운행에 따른 수입을 보여준다  탑승자 인터뷰(L 전자회사 전장사업부/30대 남자 직장인) 집은 홍은동이고 회사는 강서구거든요. 평소 택시를 이용해 출퇴근을 하면 편도 1만6,000원 정도 나오지만 카풀앱은 60% 수준이면 됩니다. 한마디로 요금이 저렴하기 때문에 이용하는 거지요. 또한 50% 할인 등 다양한 쿠폰을 사용하면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회사에 택시를 타고 출퇴근하는 동료들에게 카풀앱을 알려준 뒤로 절대로 택시를 타지 않더군요. 자동차는 주로 국산 세단과 SUV 등 다양한 모델을 타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비싼 차는 아우디 A6였구요. 그렇지만 역시 수입차는 드뭅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주로 차를 산 지 얼마 안 된 운전자들이 운전에 재미를 붙이며 카풀앱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에게 왜 카풀을 하는지 물어보면 주로 용돈벌이와 게임기 구입 같은 비자금 마련이 가장 많았습니다. 자녀의 과자 값을 벌기 위한 소소한 목적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탑승자 입장에서 좋은 차, 나쁜 차를 가리지는 않지만, 오래된 차는 아무래도 꺼리게 됩니다. 차령이 오래되면 불안한 게 사실이니까요.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도 있었어요. 언젠가 신형 아반떼 AD를 탄 적이 있는데, 그 드라이버는 탑승자들에게 승차거부를(탑승자가 드라이버의 차의 매칭을 취소하는) 많이 당한다며 저에게 하소연을 하더군요. 그는 아마도 자신의 차가 아반떼라서 그런 거 아니겠냐며 푸념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드라이버 프로필을 살펴보니 자동차 사진을 올리지 않았더군요. 저는 사용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깨끗하게 세차한 차 사진을 올리면 취소가 적을 거라며 조언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그의 차를 타게 되었는데 저의 말대로 차 사진을 올린 뒤로는 취소가 확 줄었다며 고마워했습니다.   글 이인주 기자 사진 이병주  
구름 위의 도시 쿤밍(昆明) 2018-03-15
구름 위의 도시 쿤밍(昆明)   리장, 샹글리라, 옥룡설산 같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품고 있는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와 인접해 차를 실어 나르던 차마고도가 오래전부터 발달했다. 이곳은 외모만큼이나 독특한 생활양식을 지닌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터전이기도 하다. 성도인 쿤밍은 해발 1,900m에 위치해 ‘구름 위의 도시’라고도 불리는데, 지난해 고속철도가 연결되어 상하이에서 12시간 만에 닿을 수 있다.  중국 중남부에 위치한 윈난성(云南省: 운남성)은 중국에서 가장 특별한 고장이다. 치차이(七彩:무지개)의 고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자랑하는 이곳은 다양한 민족·문화·음식이 어우러져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특히 세계적인 관광지인 리장(?江), 상글리라, 옥룡설산(玉?雪山) 등 웅장한 자태를 지닌 지형이 많은데, 이 중 수억 년 전 인도와 유라시아 대륙의 충돌로 생긴 지각변동 때 태어난 해발 5,396m의 옥룡설산은 만년설을 끼고 길이 16km에 깊이가 2,000m에 이르는 거대한 협곡이 만들어져 있다. 호랑이가 건너 다녔다는 호도협(虎跳?)이다. 협곡위로 만들어진 길은 사천과 티벳을 거쳐 인도로까지 이어진다. 과거 운남의 차(茶)를 운반했던, 세계에서 가장 험한 길의 하나인 차마고도(茶?古道)다. 아름다운 풍광과 숱한 전설을 간직한 운남성에는 26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까닭에 중국보다는 태국이나 미얀마와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실제로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그 길이만도 3,207km이른다. 동남아시아로의 통로가 가장 발달한 곳이다. 이런 입지적인 조건 때문에 탈북자들의 중국내 종착점으로 쿤밍을 이용해왔다. 이곳에서 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탈출을 하는 루트가 그동안 가장 안전한 것으로 여겨왔다.       쿤밍의 운남성 민족촌, 각 민족들의 생활상과 주택을 만나볼 수 있다 환경오염에 신음하는 천혜의 관광도시다양한 모습을 지닌 운남성은 인구 4,300만 명에 성도는 쿤밍(昆明:곤명)이다. 작년에 상하이에서 쿤밍까지 2,600km나 되는 거리가 고속철로 연결되어 이제는 두 도시를 왕래하는 데 고속철로 12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일반 열차로 가면 꼬박 44시간을 가야 한다. 당연히 필자는 이우에서 고속철을 타고 쿤밍으로 가기로 했다. 중국 남서부는 산악지역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쿤밍으로 가는 길은 험한 산을 수없이 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산을 뚫기도 하고 높은 산 위로 다리를 놓아 건설한 철길을 보니 중국의 힘이 느껴진다. 10시간 넘게 고속철로 가는 길이 조금 지루하기는 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인지라 색다르게 느껴졌다. 저장성과 장시성에도 산이 있지만 운남성 인근 산세는 완전히 다르다. 고도가 높은 산들이 연이어 펼쳐져 깊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은 사천성과 티벳으로 연결되면서 5,000m가 넘는 산맥과 이어진다. 쿤밍 역에서 만난 라오스 청년들. 쿤밍은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다    쿤밍은 해발 1,900m에 위치한 구름 위의 도시다. 지대가 높으면 기압은 낮아진다. 그래서 공을 차면 훨씬 많이 나간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야구를 하면 홈런이 많이 나오는 것도 같은 원리다. 공기가 맑고 겨울에도 온화한 날씨로 인해 쿤밍은 1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천혜의 관광 도시다. 그렇지만 쿤밍도 급격한 도시화 및 경제개발의 여파로 환경오염에 몸살을 앓고 있다.  해발 2,500m인 서산에 오르면 쿤밍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사진으로 보아왔던 쿤밍은 눈부신 파란 하늘 아래 바다처럼 푸른 덴츠(?池) 호수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하늘 위 호수인 덴츠는 녹조로 인해 진한 녹색이었다. 덴츠는 중국의 6대 담수호로 면적이 311㎢나 되어 마치 바다처럼 보인다. 산 위에 이렇게 큰 호수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스럽다. 1980년 초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가장 깨끗한 호수였으나 급격한 공업화로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그동안 각종 공장에서 정화되지 않은 오염수가 유입되어 황폐화되고 있는 것. 멀리서 보면 큰 호수가 녹조로 인해 마치 넓은 초원처럼 보인다. 또한 서산에서 본 쿤밍은 스모그로 인해 선명한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천혜의 환경을 지녔다는 쿤밍마저 공업화의 폐해를 비켜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쿤밍 서산은 해발 2,500미터다. 케이블카를 타고 서산에 오르면 쿤밍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발 1,900미터에 형성된 쿤밍은 구름 위의 도시다  해발 1,900미터에 형성된 텐츠호수도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녹조현상으로 호수가 녹색을 띄고 있다  운남성은 인근에 귀저우성, 광시, 쓰촨성(사천), 시장(西藏:티벳)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은 대부분 소수민족들의 터전이다.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좡족을 비롯해서 이족, 백족, 묘족, 와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존재한다. 북방의 위구르족(新疆:신장)과 만주족, 몽골족, 회족, 조선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곳에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내가 생활해왔던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소수민족의 화려한 복장을 한 이들을 길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소수민족 학교도 많아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인구가 줄어 민족 학교가 폐교하는 동북의 조선족과는 대조적이다. 조선족들은 한국과의 수교 이래 대부분 도시로 진출해서 지역 사회가 붕괴되는 현상을 빚었다.      일대일로에서 중요한 역할 담당시내는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새롭게 건설되는 높은 건물과 고층 아파트들이 변화하고 있는 쿤밍의 오늘을 말해준다. 시진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서부 대개발을 내세우며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지역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쿤밍 역시 그 중 하나다. 또한 중국 정부가 야심차게 진행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에서 쿤밍시의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다. 중국에서 육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쿤밍시 전경. 인구 430만 명의 도시다  쿤밍의 유적지는 많지 않다. 중국 역사에서 뒷전에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쿤밍시에도 지하철이 있다. 계획된 6개 구간 중 4개 노선이 개통되었고 두 개 노선은 아직 건설 중이다. 이에 따라 최근 들어 쿤밍의 인구도 부쩍 늘었다. 인구 증가와 함께 자동차도 급격히 증가해 출퇴근 시간에는 시내 중심부에 교통 체증이 엄청나다. 사실 시내에는 자동차보다 전기 오토바이가 훨씬 많다. 전기 오토바이들이 도로를 줄지어 달리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다. 출근 시간에는 통제원들이 줄을 이용해서 신호등이 바뀔 때까지 오토바이들의 출발을 제한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대중교통 수단인 시내버스는 2층 버스가 많았다. 요금은 1위엔(우리 돈으로 170원)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서산에 오르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택시 기사는 바이주(백족:白族)라고 한다. 바이주의 근거지는 따리(大理:대리)이다. 택시 기사 말로는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쿤밍 말을 알아듣기 어렵다고들 한다고. 소수민족들의 특별한 억양 때문이다. 전동 오토바이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쿤밍의 지하철 1,2호선이 개통되었다    회족은 중국 서북부의 회족 자치구에 살고 있다 시간을 내서 쿤밍 인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석림(石林)을 방문하기로 했다. 시내 여행사에 알아보니 식사까지 포함해서 280위엔이라고 한다. 아침 7시에 데리러 오기로 했다. 한참 꿈속에서 헤매던 새벽 5시에 전화가 왔다. 6시까지 올 테니 내려와 기다리라는 전갈이다. 7인승 빵차가 와서 나를 태우더니 시내를 돌면서 5명을 더 태웠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아침 8시다. 2시간 넘게 시내를 돌아다닌 셈이다. 내가 불평을 했더니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절대 모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여행비용이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120위엔, 어떤 사람은 130위엔인데 나만 280위엔이다. 내가 바가지를 쓴 것이 분명하다. 버스 터미널에는 관광을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오고 있었고 그들을 태울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다. 마치 출정을 앞둔 군대의 진영과 같은 모습이다. 이곳에는 베트남과 라오스, 태국으로 가는 국제선 버스도 있다. 쿤밍에서 라오스 비엔티엔으로 가는 버스는 험한 산길을 38시간이나 가야 한다고. 그런데 버스 안에 화장실이 없다. 그래서 우산을 필히 준비해야 한단다. 급하면 아무 곳에서나 용변을 봐야 하는데 우산을 칸막이로 사용한다나……. 남자들은 그나마 안면몰수하고 버티겠지만 여자들은 참으로 난감할 것 같다. 특히나 험한 장시간 코스라 차멀미를 하는 승객이 있을 경우에는 모든 승객들이 고생을 한다. 나도 18시간을 가는 장거리 버스를 타본 경험이 있지만 38시간은 여행이라기보다 고난의 행군에 다름 아니다. 중국인들과 함께 한 석림 관광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하루 일정 중에서 석림 구경은 2시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쇼핑이었다. 중국 관광객 중에 한국전에 참전한 노병이 있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사드’문제를 걸고 나온다. 한국이 사드를 배치하는 바람에 중국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고 침을 튀겨가며 나를 힐난했다.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일행 중 한 명이 ‘왜 여기에서 사드문제를 거론하느냐’며 그를 말렸다. 다른 사람들도 오늘은 즐겁게 여행이나 하자며 거들었다. 사드 때문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그동안 숨죽여 살아왔다. 중국인들은 북한의 핵개발은 비난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사드만 문제를 삼는다. 본질은 외면한 채 자신들의 이익만 챙긴다. 노 병사와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나라와 세계정세에 대해 설명을 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리고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나중에 헤어질 때에는 나이와 관계없이 친구를 하자며 즐거워했다. 1950년 한국전에 참전했으니 당시 국군이었던 필자의 아버지와는 목숨을 걸고 싸웠을 터. 예전에 목숨 걸고 싸웠던 적군의 아들과 이제는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다. 장관을 이루는 쿤밍의 석림.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대여 자전거, 쿤밍도 예외가 아니다 쿤밍에도 전기 오토바이가 대세다. 가는 곳마다 전기 오토바이 주차 장이 마련되어 있다   석림에서 만난 소수민족석림은 2억7,000만 년 전 지각 변동에 의해 해저에 있던 기암괴석들이 돌출하면서 생겨난 지형이다. 총 면적 350㎢에 형성된 돌무더기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장관이다. 석림은 대석림과 소석림, 내고석림, 신석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석림과 대석림만 개방되어 있다. 석림은 이족들의 터전이다. 이족들은 진한 빨간 색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색이 조합된 화려한 복장을 입고 있다. 주위 배경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이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다. 석림을 돌아보는 일정은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민족촌의 안내원들이 소수민족 복장을 입고 안내를 한다.  관광객들은 화려한 이족의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다.    묘족의 주택, 한족들의 주택 구조와는 다르다. 석림 관광을 끝내고부터는 쇼핑이 계속됐다. 각종 차와 기념품이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하기 전 그림을 판매하는 매장에서 일장 연설을 들어야 했다. 그리곤 다시 운남 차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식사를 끝내고 30여 분 이동해 항산화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방문했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항산화 물질을 이용해 만든 건강식품과 화장품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대부분 강사의 설명을 관심 있게 들었지만 졸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쿤밍시를 바로 앞에 두고 옥을 파는 상점으로 들어서길래 마음속으로 이것이 마지막이길 빌었다. 규모가 어마 어마하게 컸는데, 사진은 못 찍게 했다. 매장을 둘러보기 전, 진짜 옥과 가짜 옥을 구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일행 중에 허름한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 차고 있는 옥팔찌가 우리 돈으로 수천만원이나 하는 것들이다. 중국에서는 옷차림이나 얼굴만 보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쿤밍시로 돌아오니 저녁 7시. 밤공기가 차다. 쿤밍의 겨울은 온화하다는데 실제로는 상당히 추웠다. 해발 2,000m에 가까운 고지대이니 따뜻할 리가 없다. 쿤밍에는 민족촌(民族村)이 있다. 우리의 민속촌과 비슷한 민족촌에서는 각 민족들의 주택구조와 생활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야 하나의 민족이라 언어나 생김새가 동일하지만 중국은 55개 소수민족이 있는 만큼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 중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몽고족은 현재 몽골과 중국 내몽골로 나뉘어져 있다. 태국의 소수민족인 타이족(?族)도 이곳에 산다. 이들은 태국을 표기할 때 쓰는 태(泰)자가 아닌 태(?)자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소수민족은 한족과 유사해 보이지만 일부 소수민족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특히 신장의 위구르족은 중국인이라기보다 중앙아시아나 터키인에 가까운 얼굴이다. 게다가 언어는 러시아어와 비슷하니 중국인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회족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와족(?族)은 동남아시아인들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곳에 사는 대부분의 한족들은 소수민족에 관심이 없고, 얼마나 많은 소수민족이 생활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민족촌의 이슬람사원, 중국의 서부는 이슬람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운남성에는 29개 소수민족이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계승해오고 있다  마오저뚱과의 인연으로 우대정책 받아민족촌을 뒤로 하고 쿤밍의 중심지인 난핑제(南平街:남평가)를 방문했다. 200여 년 전에 지어진 전통 건축물과 현대식 건물이 복잡하게 얽혀 조화를 이룬 곳이다. 이곳에서 화려한 소수민족 복장의 여행 안내원을 만났다. 자신을 이족(?族)이라고 소개한 여인은 소수민족에 대한 자랑을 한참동안 늘어놓았다. 어제 들렀던 석림이 본거지인 소수민족이다. 오래전에는 이족(夷族)이라고 불렀는데 마오저뚱의 중화 인민공화국이 건설된 이후에는 한자 표기를 ‘?族’(이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족(夷族)은 오랑캐라는 뜻이다. 소수민족은 마오저뚱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대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중국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다. 마오저뚱이 소수민족에 대해 우대정책을 펼 정도로 호의적으로 대한 것은 대장정 당시 소수민족으로부터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 국민당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국민당에 쫓겨 장시성 뤼진에서 시작된 대장정은 출발 당시 8만 명이었던 인원이 대부분 죽고 8,000명 정도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소수민족들이 살던 산악 지역으로 숨어들어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고. 만약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장정이 성공할 수 없었을 터이니 어쩌면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쿤밍에서 100년째 성업 중이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곳도 인근의 귀조우나 광시성과 같이 쌀국수가 보편화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쌉쌀하고 매콤한 맛이 전에 먹었던 계림의 쌀국수와 비슷하다. 남부 소수민족들은 한족과 달리 매콤한 맛을 즐긴다. 주변 상점에는 화려한 색을 입은 소수민족들의 전통 공예품이 많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장사를 하는 사람마다 민족이 다르다. 워낙 다양한 소수민족이 있다 보니 전부 기억하기도 쉽지가 않다. 확실히 이곳은 소수민족들의 터전이다. 소수민족은 복장뿐만 아니라 각종 장신구도 화려하다  운남성에는 소수민족 학교가 많다. 소수민족 학교 학생들의 모습  중국에는 55개의 소수민족이 있으며, 운남성에는 거의 절반에 이르는 26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난핑제 인근에 오래된 성당이 하나 있다. 그런데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엄청나게 큰 성당이 하나 더 있다. 중국 정부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이렇듯 엄청나게 큰 성당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중국 성당의 신부는 교황청의 지시를 받지 않고 중국 정부에서 자체적으로 임명한다. 중국과 교황청은 아직까지도 외교관계가 없다. 중국에선 선교가 금지되어 있다. 외국인이 선교를 하다가 걸리면 구금기간을 거치고 나서 바로 추방된다. 종교행사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만 해야 한다. 중국인들은 종교의 자유는 허용되지만 선교가 금지된 구조적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난핑제 인근에 세워진 성당. 종교의 자유는 있지만 선교활동은 금지되어 있다  차의 고장에 들어선 스타벅스 매장들요즘 쿤밍시에는 스타벅스가 성업 중이다. 차의 고장인 운남성 성도 쿤밍에 스타벅스가 많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운남성은 앞서 설명한 대로 중국을 대표하는 차 생산지다. 특히 푸얼시(普?市)에서 생산되는 푸얼차(普?茶)는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예전에는 많은 이들이 차를 인도까지 운반하기 위해 험난한 차마고도를 넘었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에는 2,000개가 넘는 스타벅스 매장이 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일 뿐 아니라 2021년까지 중국에 5,000개가 넘는 매장을 열 계획이라 하니, 차의 나라라는 말이 무색하기만 하다. 요즘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전통차 대신 커피를 즐겨 마신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다루는 것이 문화인의 척도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중국 젊은이들의 세태다. 이들은 스타벅스를 이용하며 자신들이 선진 문명의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느낀다. 스타벅스는 중국에서 단순히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미국 문화를 팔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요사이 운남성에서는 차밭을 갈아 업고 커피나무를 심는 곳이 많아졌다고 한다. 머지않아 중국이 커피의 나라로 변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운남성은 차의 고장이다. 운남성 보이차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운남성은 차의 고장이다. 운남성 보이차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글 사진 양인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들다, 남원 2018-02-20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들다남원 남원은 성춘향과 이몽룡의 절절한 사랑의 무대인 광한루를 배경으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소화되고 살을 불렸다. 더해서 지리산이 내어주는 풍요로움 또한 남원을 무대의 전면에 내세우는 든든한 역할을 했을 터. 지금 이 순간에도 남원은 남녀의 사랑과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영글어가고 있다.    전통 예술이 활짝 꽃을 피운 남원시 옻칠공예관이름난 산에는 일찍부터 가람이 들어섰으니 남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도자들이 만들어서 사용하던 목기(木器)의 제조 공법이 민가로 이전됐고, 남원은 그래서 이름을 더 얻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실상사에는 한때 3,000여 명의 수도승들이 머물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목기의 운명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산사는 기울어갔고 목기 대체품들이 들어서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제기(祭器)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을 뿐 실제 생활로 녹아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3호 옻칠 장인 박강용 선생 등 장인들의 노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4년 문을 연 남원 옻칠공예관은 옻칠 공예의 정수를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1,980㎡의 부지 위 660㎡의 공간에 전시관과 옻칠작업장, 정제실, 건조실, 디자인실 등을 갖추고 있다. 우선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옻칠 공예의 그 화려함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스님들이 사용하는 발우와 수저세트, 다기, 반상기를 비롯해 제기 및 제사상 세트 등이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멋을 뽐낸다.  옻칠공예란 내부 아름다운 광택을 내는 반상기 세트   천연도료인 옻칠을 하면 외부의 습기를 흡수하거나 방출해 일정한 수분을 유지하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나무로 만든 생활용구나 공예품에 옻칠을 하면 표면에 견고한 막을 형성할 뿐 아니라 광택이 나고 오랫동안 사용해도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토피 개선 효과를 비롯해 방충, 항균, 원적외선 방출, 방부 및 탈취 효과까지 있어 가장 완벽한 도료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이곳에서는 초급과 중급, 그리고 전문가반 등의 교육 프로그램을 주 1~2회 운영하고 있다. 관람료는 없고 평일 09:00~18:00까지 문을 열고 월요일에는 닫는다(자세한 사항은 전화063-631-5725로 문의).  성춘향과 이몽룡의 이야기 품은 광한루원, 예촌 이야기를 엮어내고 많은 이들이 덧칠을 하며 끌어가는 데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바로 불세출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사랑’이 남원에서는 365일 단 하루도 지지 않고 활짝 꽃을 피운다. 광한루원은 바로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그네를 타는 춘향을 지켜보며 애틋한 정을 키워가는 이몽룡. 둘이 나눈 사랑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가다 보면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이별, 그 후에 닥친 춘향의 고난, 과거에 급제한 몽룡이 어사가 되어 변 사또의 폭정을 단죄하는 장면, 두 사람의 아름다운 해후라는 줄거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렇기에 춘향전은 이미 1935년부터 ‘성춘향’이라는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이후로도 ‘춘향전’, ‘탈선춘향전’, ‘춘향뎐’ 등으로 꾸준하게 리메이크되어 사랑을 받고 있다. 임권택을 비롯한 당대의 유명 감독들이 메가폰을 잡은 것은 물론  허장강, 박노식, 신성일, 장미희, 이덕화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출연했다. 김희선과 이민우가 열연한 TV 드라마는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18세기의 소녀 21세기를 살다’라는 테마로 구성된 광한루원의 춘향관은 저마다 이몽룡이 되어 춘향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오작교를 건너면 부부의 금슬이 좋아진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선조 15년(1582)에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길이 57m, 폭 2.4m에 4개의 홍예경간(무지개 모양의 다리나 기둥 사이의 공간)으로 새로 놓은 다리다. 광한루는 정유재란 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 그대로의 모습이다.  광한루원의 춘향관 잎을 잃은 감나무가 꽃을 피웠다월매의 집도 재현해 놓았다 남원으로 유배를 온 황희 정승이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광통루는 그 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라고 한 후 광한루로 고쳐 부르고 있다.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에 연꽃을 심고, 오작교를 놓고,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이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었다. 봉래섬은 백일홍, 방장섬은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은 영주각을 세웠는데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고 말았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중건된 것으로 1794년에 영주각이, 1964년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광한루원 바로 곁에는 전통 한옥으로 지은 호텔 ‘예촌’이 있다. 최기영 대목장을 비롯한 이근복 번와장, 유종 토수 등 대한민국 최고의 한옥 명장들이 직접 시공에 참여해 전통의 멋이 그대로 흐른다. 황토, 대나무, 해초 등 오롯이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사용해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구들장과 함께 옻칠 기법으로 마무리한 이곳은 2017년 한국관광의 별 숙박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굳이 숙박을 하지 않아도 호텔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호남제일루라 쓰여진 광한루   광한루원 바로 옆에 자리잡은 한옥 호텔 예촌 고풍스러운 예촌의 객실 내부 온돌방으로 만들어진 객실 내부이도령과 춘향의 동상   천년고찰 실상사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마주하며 찾은 실상사는 한때 3,000여 명의 승려가 수도생활을 했을 정도로 융성하던 곳이었다. 너른 들 한가운데 버티고 선 가람은 심산유곡에 자리를 잡아 신비한 기운을 더하는 산사에 비해 세속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불러 마을을 이루고, 민초들의 삶을 어르며 풍족하게 해주어 ‘극락정토’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일까?    실상사는 한 때 3천여 명의 승려가 생활했던 사찰이다 동서 삼층 석탑을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    실상사의 철불 부처상증각대사의 탑비 증각대사 사리탑실상사의 석장승 뭔 절이 동네 앞에, 너른 들판 논 가운데 멋없이 있을까? 많은 이들이 갖는 의문에 기자 역시 공감한다. 이에 대해 주지스님은 홈페이지를 통해 이렇게 밝혀 놓았다. 대략 요약하면 이렇다.“실상사는 남녘에서 가장 크고 깊은 지리산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수만 평의 논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 너른 들판이 여름이면 새록새록 자라는 벼로 초록바다가 되고, 실상사는 그 속에 마치 섬처럼 떠 있다. 가을날 벼가 익어 황금물결을 이룰 때면 마치 보물선이 흔들리는 듯하고, 겨울이면 벼를 베고 난 휑한 들판에 무상(無常)의 모습으로 있다. 그리고 다시 봄이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 마치 신기루처럼 자리한다. 마음을 열고 보면 너른 들판 가운데 멋 하나 없이 밋밋하게 있는 그런 절이 아니다. 실상사가 처음 이곳에 자리할 때는 그야말로 심산유곡이었다. 그러던 곳이 부처님의 품을 찾아든 사람들로 마을이 생기고 논밭이 만들어지다 보니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선계와 속계를 구분하는 만수천을 대하면 다리 입구의 석장승이 “어서와! 이곳은 처음이지?”라고 마중을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다른 석장승이 실상사로 안내를 한다. 그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이 시야에 아련하게 들어온다. 이곳은 국보와 보물의 보고여서 그 보물들을 꺼내어 보다보면 천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남원 허브관 허브관 안에는 각종 허브들이 꽃을 피운다 허브 관련 제품 생태 교육장에서 상영중인 작품  잘보면 나비의 날개로 만들었다지리산 ‘생 햄’과 ‘흑돈’을 아십니까? 열정과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그 길을 만들어갔던 이의 고단한 일정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스페인어로 하몬(Jamon)으로 불리는 생 햄이 남원의 운봉읍 화수리에서 제대로 숙성되어가고 있다. 돼지고기를 훈현시키지 않고 소금에 절여 만드는 생 햄은 본토인 스페인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식재료다.산간지방의 깨끗한 공기와 수분이 적절하고 바람이 찬 지형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버크셔 흑돈을 원료로 지리산 고랭지 기후의 청정성과 희소성이 결합해 탄생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화춘 씨는 농업진흥청 등에서 활동한 종자개량 전문가였다. 그런 박 박사가 퇴직 후 고향인 남원에 버크셔 품종 흑돼지를 들여와 우리 풍토에 맞도록 품종을 개량한 것이다. 박 박사에 따르면 스페인의 하몽은 사육하는 방식(완전 방목, 반 방목, 축사 등)에 따라 가격 차이가 크다면서 “지리산 생 햄도 각종 환경 등을 고려해 가치 산업으로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자신했다. 아울러 그는 철저하고 엄격한 기준을 통해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해야 하는 등 농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리산 생 햄은 자연환경과 천일염만을 이용해 장기간(겨울에 원료를 선택해 정형과 염지를 한 후 초기 건조과정을 거쳐 봄에 건조, 여름에 저장을 해 다시 겨울에 출시한다) 숙성시킨 식품으로 신선육 상태에서 바로 제조를 하기 때문에 단백질 및 지방조성이 우수한 것이 특징이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했다는 쉐프의 요리는 잘 숙성된 생 햄이 은근하게 짭짤한 기운이 퍼지다가 이내 고소한 감칠맛이 되어 침샘을 자극한다.    그렇다면 재료가 되는 흑돈의 맛은 과연 어떨까? 사실 음식이란 개인의 취향에 따라 평가가 천양지차여서 객관성을 부여하기 어렵다. 따라서 오로지 주관적으로 판단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명문화한다는 것은 독자들의 권리를 일정부분 침해할 수 있어 꺼려진다. 그럼에도 이를 소개하는 것은 우선 독특한 조리방식 때문이다.    대한민국 1.2%만 드실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건 지리산 고원 흑돈은 허영만 화백의 ‘식객’ 등에 소개되기도 했다. 삼겹살과 목전지, 그리고 항정살 등으로 구성된 ‘흑돈 명품 한 마리’는 우선 상차림이 정갈한데다 고기의 상태가 좋아 과연 허 화백이 내세울 만했구나 싶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기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원료와 불 조절에 있다. 일단 고기의 품질을 확인했으니 그 다음은 불판에서 구워내는 순서. 여기에서도 차별화된다. 돼지고기는 기름기가 거의 빠질 만큼 바삭하게 익혀야 제맛이라는 기존의 암묵적 룰을 여지없이 깬다. 살짝만 익히는 것을 권하는데, 한 점 깨물면 쫄깃한 식감에 입안에 툭 터지는 육즙이 일품이다.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짓던 것과 비슷한 묘한 표정이 절로 지어진다. 느끼함도 거의 없어 젓가락은 연신 불판으로 향하고, 여기에 술 한 잔 곁들이니 행복 그 자체다. 그러는 사이사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아, 맛있다!”지리산 고원식당 063-625-3663     지리산 흑돼지를 맛볼수 있는 고원 흑돈 식당 버크셔를 개량했다는 흑돈은 쫄깃한 식감과 터지는 육즙이 일품이다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동남아의 용으로 승천을 꿈꾸는 베트남의 중심, 호치민 2018-01-12
 동남아의 용으로 승천을 꿈꾸는 베트남의 중심 호치민세계 최강 미군을 몰아내고, 중국과 1,000년 동안 싸워왔다고 주장하는 베트남. 중국의 대체지로 부상하면서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베트남의 수도 호치민을 찾았다. ​​​​거래처의 초청으로 방문한 베트남 호치민의 첫인상은 대단히 역동적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맞닥뜨린 것은 수많은 오토바이의 행렬. 넓은 도로를 꽉 채운 오토바이들의 질주와 굉음은 베트남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그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중국에만 오토바이가 많다고 여겼었는데, 호치민에서 이렇게 많은 오토바이를 볼 줄이야! 오토바이는 호치민 시민들의 절대적인 교통수단이다. 하지만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거리에 울려퍼지는 배기음을 듣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처음엔 마냥 신기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토바이의 행렬이 소음 공해를 넘어 공포로 다가올 정도.베트남은 자동차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까닭에 자동차 가격이 엄청 비싸다. 기아 경차 모닝이 베트남에서는 2,000만원이 넘는 가격에 판매되니, 일반 시민들에게 자동차는 그림의 떡. 이를 대신해 한결 저렴한 값에 구입할 수 있는 2륜차가 대중화되었으며, 베트남의 오토바이 등록대수는 대략 4,000만 대가 넘는다고 한다.​​거리를 꽉 메운 오토바이 행렬, 호치민은 하루종일 오토바이들의 질주로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거리에 넘쳐나는 오토바이의 행렬오토바이가 일상생활과 밀접하다 보니 이를 위한 카페와 식당이 많다. 큰 식당에 승용차 주차장은 없어도 오토바이 주차장은 필수. 고급 아파트에도 오토바이를 위한 주차장이 별도로 있고, 대형 수퍼마켓 역시 마찬가지다. 우연찮게 들른 이마트에도 주차장 대부분을 오토바이가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나 오토바이 주차를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필수적으로 헬멧을 쓰고 다닌다. 함께 탑승한 동승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많은 오토바이에 여럿이 함께 타고 다니니 위험한 광경도 흔히 볼 수 있다. 오토바이를 자가용으로 사용하는 경우 동승한 어린 아이가 떨어지지 않게 운전자와 끈으로 연결하거나, 발판에 의자를 놓아 아이가 앉아서 갈 수 있도록 하는 등 나름대로의 지혜를 발휘한 흔적도 엿보인다. 운전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호치민의 교통체증은 어딜가나 비슷하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뒤엉켜 항상 복잡하다​예전에는 자전거가 대세였으나 이젠 오토바이에 밀려 보기가 어렵다베트남에서는 오토바이 영업이 합법이다. 우버와 그랩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거리에는 일본차와 함께 한국의 현대·기아차가 많이 보인다. 한국차의 경우 현대 i20과 기아 모닝이 대표적이다. 베트남 소비자들의 소득수준이 낮다 보니 중대형차보다는 소형차가 더 많이 팔린다고. 베트남의 1인당 GDP는 2,200달러(2016년 기준). 자동차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일본 기업들의 진출이 대단히 활발하다. 그동안 중국 일부 지역에서 조용히 장사를 하던 이온(AEON) 마트는 베트남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의욕적으로 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많은 일본 기업들이 2011년 센카쿠(다오위다오) 사태 이후 중국에서 철수했다. 반일 감정이 상존하는 중국에서 계속 영업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던 차에, 센카쿠 사태가 기폭제가 되었다. 한국 기업 역시 지난해 사드 문제로 홍역을 앓은 후 중국을 벗어나 베트남으로 옮겨오는 상황이다. 어쩌면 일본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한국차가 무척 많다. 기아모닝과 현대 i20가 택시로 쓰인다​베트남은 한때 일본의 지배를 받았지만 반일감정이 없다. 일본업체가 건설 중인 호치민 지하철 공사장이다​베트남은 어느 나라보다 처절한 투쟁의 역사를 지녔다. B.C 111년부터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아 지금도 중국 문화의 잔재가 뿌리 깊이 남아 있다. 이후 1886년부터 1940년까지 50년 넘게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이 쳐들어왔으며, 종전 후에는 다시 프랑스와 다툼을 벌인다. 격전 끝에 1954년 독립을 쟁취하지만 이번에는 국토가 남북으로 갈렸다. 그 와중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과 다시 한번 처절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었다.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에 지배당했다고 하지 않고 ‘우리는 천 년 동안 싸워서 중국을 물리쳤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프랑스와의 전쟁은 물론 세계 제일의 군사력을 지닌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호치민 인근에 있는 구찌 터널(Cuchi tunnel)을 둘러보면 베트남 사람들의 끈질긴 정신력과 투쟁 정신을 자연스레 배우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월남전 당시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B-52 폭격기를 동원한 융단 폭격은 지금 보아도 경이로울 정도. 당시 B-52가 뜨면 그 지역은 완전히 초토될 정도의 가공할 화력이어서 한 번 훑고 지나가면 한동안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그런 미국의 공격을 버텨내고 베트남을 통일한 월맹(북베트남)의 힘은 주민들과의 밀착협력이었다. 미군은 베트콩(북베트남 군)과 주민들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밀림 속에 만들어진 터널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신출귀몰 전략의 일환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고 사라지는 베트콩을 미군들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게릴라 전술에는 터널이 큰 역할을 했다. 엄청난 전력의 열세를 이러한 기상천외한 전술로 이겨낸 것이다. 터널의 총 길이가 자그마치 250km에 이르고 미군 사령부 밑까지 뚫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터널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아 기어서 다녀야 한다​​투쟁의 역사가 숨쉬는 구찌 터널터널의 지하 1층은 지휘부가 있고 지하 2층은 거주시설, 지하 3층은 강으로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로 연결되는 구조다. 취사를 위해 몇 단계에 거쳐 연기를 배출할 수 있도록 하고 수술이 가능한 야전병원까지 갖추었다니 완벽한 군사 기지가 아닐 수 없다. 기가 막힌 것은 250km에 이르는 터널 전부를 호미 같은 손도구로 파서 만들었다는 점이다. 터널의 입구는 몸이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비좁았다. 터널 안 역시 몸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규모다. 덩치 큰 미군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온다. 이런 곳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높이 때문에 대단히 불편한 자세로 기어다닐 수밖에 없는데, 터널 체험 삼아 그렇게 100 미터 가까이 이동했더니 통증 때문에 3일 동안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터널은 몸 하나 겨울 들어갈 수 있는 크기다​몸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터널 입구가 작다 ​구찌 터널 주변에는 부비트랩과 바닥에 죽창이 설치된 함정 등이 보인다. 많은 미군들이 이런 단순한 무기들에 말려들어 처참하게 죽어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죽음보다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대한민국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대한민국 군대가 최초로 해외에 참전한 전쟁이었다.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1965년부터 비둘기 부대를 필두로 청룡(해병대)과 맹호, 백마부대가 1973년까지 투입되었다. 총 32만 명이 참가해 5,099명이 전사했고 11,23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번영과 군 장비의 현대화를 이루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당시 전투 지원부분에 참여했던 한국의 건설 및 운송 업체들은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는 일본이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물자 수송과 정비 등을 통해 패전의 아픔을 딛고 경제를 재건하게 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요즘 일본이 북한을 부추겨 한반도에서 전쟁을 다시 일으키려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맹위를 떨치던 맹호부대와 귀신 잡는 해병으로 유명한 청룡부대는 베트콩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국군은 전투도 잘하지만 베트콩들에게 무척 잔인했던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렇지만 베트남에는 반한 감정도, 반미 감정도 없다. 아마도 미국과도 싸워 이겼다는 자부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지구상에서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한 나라 중에서 베트남만이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었다.베트남 사람들의 한국사랑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특별하다. 한국 드라마와 K팝에 푹 빠져 있고, 한국 상품에 대한 인기가 대단히 높다. 중국에서 큰 시련을 겪고 있는 롯데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발랄하고 활기찬 베트남의 학생들, 이들은 전쟁의 참화를 모르는 신세대다베트남의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의 미인들 호치민에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중국과 프랑스의 많은 영향 받아호치민 시의 명칭은 원래 사이공이었다. 동나이 강 삼각주에 형성된 사이공의 역사는 1698년부터 시작되었으니, 300살이 넘는다.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이공은 남베트남의 수도였다. 호치민이 이끌던 북베트남은 30년이 넘는 치열한 내전 끝에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한다. 북 베트남이 통일을 이룬 것은 국민들의 강인한 정신력과 호치민이라는 영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호치민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몸을 바친 인물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호 아저씨’란 애칭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호치민은 청렴한 삶에 있어서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는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다. 자신이 죽으면 화장을 한 후 북부, 중부, 남부의 세 지역에 골고루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 호치민은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 생을 마쳤다. 베트남 정부는 1976년 통일을 이룩한 후 사이공 시를 현재의 호치민 시로 바꾸어 베트남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록하기로 했다.​​​호치민은 베트남인들의 영웅이다. 사이공 시를 호치민 시로 변경한 것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호치민시 전경, 베트남의 영웅인 호치민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사이공을 호치민시로 개명했다​호치민 시민들은 만약 월맹이 아니고 베트남으로 통일을 이루었으면 지금쯤 대한민국보다 잘 사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베트남 전쟁 직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그들보다 훨씬 낮았다. 베트남이 통일 후 사회주의의 길을 걸으며 퇴보하는 동안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며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거듭났다.호치민에 오토바이가 많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카페였다. 특히 노상카페는 베트남만의 독특한 문화 중 하나다. 프랑스 식민지배의 영향 탓도 있지만 베트남인들의 커피 사랑은 유난하다. 한국으로 수입되는 커피의 원산지를 보면 베트남인 경우가 의외로 많은데, 실제 베트남의 커피 생산량은 브라질과 쌍벽을 이룬다. 그래서인지 호치민 거리에는 유럽풍의 근사한 카페들이 많다. 재미있는 것은 카페마다 오토바이 주차장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노상 카페도 저마다 개성이 넘친다. 길에다 목욕의자를 쫙 깔아 놓고 커피와 음료를 준비하면 바로 노상 카페가 된다. 길을 걷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바로 이용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편하고 좋은 카페가 어디 있겠는가.​​​​호치민은 카페문화가 발달해 있다. 베트남의 커피 생산량이 브라질을 추월했다고 한다​호치민에서 제일 크다는 벤탐시장, 20여 년 전의 중국과 비슷한 모습이다​ 베트남에도 베트남 글자가 있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들이 그들의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영어에 조합해서 만들어준 것이다. 프랑스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은 유럽식 빵 문화다. 베트남인들은 조식으로 전통적인 반꿍과 함께 프랑스식 빵을 먹는다. 반꿍은 중국 광동의 창펀과 비슷한 음식이다. 창펀은 밀가루 반죽을, 반꿍은 쌀로 만든다는 점이 다르다. 베트남은 세계 최대의 쌀 생산국가다. 넓은 농토와 메콩 강의 풍부한 수량, 그리고 온화한 기후 덕분에 3모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쌀을 이용한 식품들이 많다. 우리도 즐겨먹는 쌀과자와 쌀국수가 대표이다. 또한 열대과일의 천국이기도 하다. 남북 해안의 길이가 3,444km에 이르는 긴 지형에서 다양한 과일이 생산된다.호치민 시내를 돌다 보면 많은 유럽풍의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이런 건물들은 대부분 100여 년 전 프랑스인들에 의해 지어졌다. 웅장한 건물들은 지금도 베트남 정부의 관공서로 쓰이고 있다. 호치민에 들르면 꼭 가봐야 한다는 유럽풍의 우체국 건물은 엄청난 크기에 놀라게 된다. 지금이야 우체국의 기능이 점차 줄어든다지만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는 베트남 전역으로 배달되는 우편물을 처리해야 했으니 이렇듯 큰 규모로 지어진 것이 짐작이 간다. 우체국 옆에 우뚝 서 있는 노트르담 성당은 대대적인 수리 중이었다. 베트남에는 가톨릭 신자가 9%나 된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은 독실한 불교신자로, 그 비율이 80%가 넘는다고 한다. 2015년 베트남을 방문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호치민의 절을 찾았었다.​​​우체국 앞에서 기념품을 파는 상인, 종이로 만든 단순한 제품들이다​​노트르담 성당은 대대적으로 보수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미국 오바바 대통령이 재임시절 방문했던 호치민의 절. 베트남은 불교 국가다​​베트남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부동산 가격도 급등하고 있다. 부자들을 위한 주택도 계속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오랜 기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던 흔적인지 베트남인들은 미신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춘절과 중추절을 중요한 명절로 여기며 중추절에는 중국인들처럼 월병을 먹는다. 그렇지만 중국과의 사이는 좋지 않다. 요즘 남중국해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중국의 야욕은 여러 나라와 영해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필리핀은 물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베트남까지도 중국과 영해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이런 영해 분쟁으로 요즘 베트남에서는 반중국 정서가 강하다. 2012년에는 중국회사 공장들이 폐허가 되고, 3명의 중국인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중국 공장들의 베트남 진출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인건비 상승으로 가격 경쟁력을 잃고 있는 중국의 공장들이 북부 하노이 주위로 생산기지를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인들도 미신에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무사고를 빌기위해 부적처럼 꽃을 차에 달고 다닌다높은 발전 가능성 품고 있는 베트남호치민을  방문한 것은 한국 거래처인 (주)올림피아 대표이사 김진웅 사장의 초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호치민에서 기념품을 제조해서 수출하는 올림피아는 이 분야 한국 기업 중 유일하게 남아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바이어들이 기념품 업계의 삼성이라고 부른다. 공장을 둘러보니 직공들이 모두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일사분란하게 일하는 모습이 역동적이다. 중국 공장에서는 이미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사출이나 수작업을 많이 해야 하는 3D 업종에서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만이 공장을 지키고 있을 정도다. ​​​올림피아 직원들, 한국인, 베트남인, 그리고 필리핀 연합이다 ​ 베트남은 저렴한 인건비와 근면한 젊은 노동자들로 인해 경제 발전 가능성이 어느나라보다 높다 ​베트남은 젊은 노동력이 넘쳐난다. 어느 공장에 가든 젊은이들이 가득하다​베트남은 오랜 내전을 겪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체 인구 중 가장 많은 연령대가 1958년생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정국이 안정되면 자연적으로 베이비 붐 세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베트남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현재 베트남의 인구는 9,500만 명. 1980년 이후에 출생한 인구가 반 이상을 차지한다. 노동력이 넘쳐 나는 이유다. 베트남의 국민성은 유교 사상이 몸에 배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족들 간의 우애를 중요시한다.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알고 교육열도 높다. 게다가 근면까지 하다. 동남아시아의 강자가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셈이다. 올림피아의 현지 공장에는 한국인의 후예가 있었다. 김 사장을 현지에서 도와주고 있는 단홍의 아버지는 한국인이다. 당시 사이공의 조선소에서 일을 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삼남매를 남겨 두고 훌쩍 한국으로 떠난 후 연락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 시절 많은 고생을 했다. 베트남에는 수천 명의 ‘라이 따이한’(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존재한다. 자신들의 피가 섞인 베트남인들을 모두 본국으로 데리고 간 미국과 달리, 우리 정부는 그들에게 무심했다. 그래서 단홍도 한동안 난 왜 한국인 아버지를 만나 이런 고생을 해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엿한 중년 사업가로 성장해서 남부럽지 않을 생활을 하고 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대한민국을 방문했지만 끝내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남부에 속한 호치민과 북부의 하노이는 경쟁 관계다. 하노이가 베트남의 수도이면서 중공업이 발달한 반면 호치민은 경공업이 발달했다. 그렇지만 개방 이후 많은 외국기업들이 경쟁적으로 호치민으로 몰려오고 있다. 호치민과 하노이의 거리는 2,300km나 된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고속도로가 없다는 것이 큰 취약점이다. 베트남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고속도로부터 뚫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은 베트남 최고의 투자 국가다. 그동안 중국에서 실패한 것을 베트남에서 회복하려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다. 일본도 비슷한 과정을 먼저 거쳤고, 타이완도 이에 가세했다. 그런 면에서 베트남은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호치민은 한창 발전 중이다. 아직도 포장이 안 된 도로가 많다호치민의 이마트, 베트남에서 성공신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APEC 정상회의가 11월 10일부터 다낭에서 열렸다. APEC을 알리는 입간판들이 곳곳에 설치 되어 있다​​동남아시아 최강자 자리 멀지 않아호치민에서 가장 높은 68층의 비텍스코(BITEXCO) 빌딩에 오르니 산 하나 보이지 않는 대평원이 펼쳐진다. 베트남 북부는 산악지역, 남부는 평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치민은 남부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호치민에서 가장 크다는 벤탐시장을 찾았으나, 생각보다 규모가 적다. 게다가 팔리는 상품의 대부분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아직까지 베트남의 제조업 구조가 임가공 형태이다 보니 제품다운 제품이 없는 탓이다. 그러나 지금의 발전 속도로 보면 베트남 제품들이 중국제품을 대체하게 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1억에 가까운 인구와 근면성을 무기로 동남아시아의 최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베트남. 그 중심에 호치민이 있다. ​글·사진 양인환​​​호치민에서 제일 높은 68층의 Bitexco 빌딩. 새로운 건물들이 계속 건설되고 있다​   
역사와 문화의 보고, 진도 2018-01-05
역사와 문화의 보고진도 햇살 가득한 날의 진도 여행은 진도개와의 만남으로 서막을 연다.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던 벽파진에는 군민의 성금을 모아 1956년 세워진 ‘이충무공 전첩비’가 세워져 이순신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 거센 조수가 만들어내는 울돌목의 아스라한 물살소리는 거대한 해전의 치열한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거침없이 내닫는 겨울의 발자국이 진도에는 채 닿지 않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햇빛을 받아 단풍잎은 그 아름다움을 더 간직하려는 듯 가지 끝에서 빛나기도 하고, 더러는 찬란했던 생을 마치고 땅에 떨어져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잎을 잃은 감나무가 홍시를 가득 달고 커다란 꽃나무처럼 서 있는 풍경이 정겹다. 햇살이 가득한 날의 여행은 진도의 이름을 더욱 더 빛나게 한 진도개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1962년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된 진도개(진도에 있는 모든 종류의 개를 뜻하는 것은 진돗개라고 한다)는 천성이 영리하고 용맹스러워 예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들이 진도에 서식하게 된 유래는 1270년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을 때 몽골에서 제주도 목장의 군용 말을 지키기 위해 들여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진돗개의 진도개 이른 아침부터 공연을 보려는 이들로 북적이는 진돗개 테마파크에서 도해(다도해의 이름을 차용했다고 함)와 민국, 다영이가 각기 다른 주제로 재주를 뽐낸다. 도해는 ‘환영합니다’라는 펼침막으로 관중들과 인사를 나눈 후 냉장고의 문을 열어 물을 꺼내고, 훈련사가 불러주는 숫자를 똑같이 짖어 영리함을 과시한다. 하지만 가끔 지시에 잘 따르지 않는 등 무언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에 대해 훈련사는 “사실 난처한 상황이다. 진도개는 호기심이 많고 예민해서 반응이 빠르게 나타난다”며 “평소보다 일찍 시작한데다 사람들이 지정된 자리에 앉지 않아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고 멋쩍어했다. ​​진도개 테마파크의 조형물​베테랑 민국이는 복종 훈련과 총에 맞은 연기를 능청스럽게 해내고, 애국가에 맞춰 국기 게양도 척척 해낸다. 다영이는 고난도 장애물을 매끄럽게 소화한다. 이처럼 진도개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과정까지는 3~6개월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평일에는 오전 10시와 오후 3시(평일 공연장), 그리고 주말에는 오후 1시에 주말 공연장에서 공연이 있고, 1시 30분에는 진도개의 경주를 볼 수도 있다. ​​진도개 공연장에서 훈련사와 민국이가 공연을 펼치고 있다​3층 건물의 홍보관 1층은 세계 각국의 대표적인 견종을 안내하는 세계지도가 펼쳐져 이해를 돕고, 국내의 진도개를 포함한 삽살개와 풍산개, 그리고 동경이의 모형으로 친근감을 준다. 2층은 진도개의 시각과 후각·청각·속력·충성심·사냥방법 등을, 3층은 역대 진도개 챔피언과 우수 진도개 선발대회 입상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보다 다양한 정보를 얻으려면www.jindo.go.kr 를 참고하도록.​​진돗개와 진도개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진돗개박물관​빠르게 과거로 돌아가는 시계바늘 끝으로 추수를 끝낸 들과 초록의 숨을 틔워 파릇한 대파밭, 출하를 준비하는 배추밭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명량해협의 길목이자 오랫동안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던 벽파진에는 ‘이충무공 전첩비’가 우뚝 서 있다. 진도군민의 성금을 모아 1956년 세워진 이 비는 독특한 구조 때문에 “어, 이게 뭐지?”라며 한참을 둘러보게 된다. 우선 거북기단은 자연 그대로 바위산을 깎고 모양을 만들어 언덕과 일체감을 주었고, 물을 살짝 고이게 만들었다. 바다를 그리워하는 거북은 매일 망망대해를 헤쳐 가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아니 휘영청 밝은 달밤에는 실컷 바다에서 노닐다가 동이 트기 전 돌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벽파진에 세워진 이충무공 전첩비​‘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이더니라’로 시작되는 비문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짓고, 소전 손재형 선생이 글씨를 썼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를 쓴 이 비문은 총 888자의 글자 형태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도 어디쯤 하나 같은 글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한참을 뚫어지게 보다 결국 그 정성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늘가의 햇발이 바다를 쏘아 비치고구름 가 저 멀리 섬들 푸르게 옹기종기 있구나서쪽 바람 부는 소리 밤들어 몰아치니 성난 물결 벽파정을 뒤집듯 때리네​​충무공 전첩비 아래에는 조선중기의 문장가 장유가 읊었던 벽파정이 있다. 오랜 세월 흔적 없었다가 지난해 5월에 다시 세워진 정자에 올라서면 편액의 시들이 때로는 웅혼한 기상으로, 한편으로는 안빈낙도의 허허로운 여유로움으로 마중을 나온다.​삼별초의 흔적이 있는 용장산성과 남도진성시계 바늘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용장산성에 이른다. 몽고군에 항복한 고려정부군에 반기를 든 삼별초의 기지가 있던 곳으로, 모두 불에 타고 행궁의 터와 석축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전할 뿐이다. 지금도 당시의 기와 등이 출토되고 있어 규모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아직도 복원계획이 잡히지 않았다. 용장사 극락전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이 당시를 회고하는 듯하고, 전시관은 삼별초와 용장산성에 관한 모형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삼별초가 항전을 벌였던 용장산성용장산성 터가 세월의 무상함을 알린다​ 붉은 꽃망울을 터트린 동백 곁에는 일손을 멈춘 아낙들이 삼삼오오 모여 각자 싸가지고 온 밥과 찬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있다. 배추 잎사귀에 밥 한 덩이를 듬뿍 얹고 된장으로 간을 한 후 투박하고 주름진 손으로 건네준, 정 가득한 쌈을 받으니 고소하고 달콤한 향내가 입안에서 진동한다. 바람은 간지러웠고 햇살은 어머니처럼 포근했다. 동백은 겨울을 지나 4월까지 피고 지고 또 다시 피고 질 것이다.​​동백은 4월까지 피고 지고 또 필 것이다​총길이 610m의 남도진성(南桃鎭城)은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기 직전까지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그 지휘관인 종4품 만호를 배치하고 현재와 같은 형태로 축성했다. 동문 앞의 노랗게 열매를 맺은 멀구슬 나무를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의 발길에서 벗어난 풀과 나무들이 제멋대로 하늘과 땅을 향해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노란색 열매로 가득한 멀구슬 나무​성의 이름에 들어 있는 ‘桃’는 복숭아를 뜻하는데, 이는 성 앞산에서 보았을 때 복숭아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때 성내에서는 65호 정도가 살기도 했지만 3년 전에 마지막 집이 떠난 뒤,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아름다운 옛 돌담길도 모두 허물어져 쓸쓸하고 휑한 모습이다. 남문 앞 자연석으로 만든 1.5m의 홍교(무지개다리)는 나무를 쌓은 후 중심이 되는 돌과 주변의 돌들을 황토로 채운 후 불을 질러 굳힌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조금 더 아래 쌍홍교 너머로 남문의 성루가 어른거린다.​​남도진성은 앞쪽 산에서 보았을 때 복숭아 모양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서망항은 출항하려는 배와 이제 고단한 몸을 누이기 위해 들어오는 어선들로 분주하다. 한창 꽃게가 나는 철이어서 출항을 준비하는 배는 연료를 가득 채우고 선원들이 바다에서 생활할 동안의 양식을 싣느라 생기가 넘친다. 진도군 소득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시사철 만선의 풍어가 보장되는 넉넉한 어장이다. 한 번 출항하면 돌아오기까지 대개 7~10일 정도 걸린다고.​ 서망항은 진도에서 가장 큰 항구다​​반면 바로 옆 팽목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의 무게로 짓누른다. 세월호 사고가 있기 전만해도 지극히 평범한 항구였지만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방파제를 캔버스삼아 배에 갇힌 이들이 무사하기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그림과 글귀들이 마냥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천개의 바람이 되어……”, “긴 여행 끝내고 이제는 돌아오렴” 등등. 하늘나라 우체통이 있는 방파제 끝 등대까지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마음속에 되새기게 되는 길이다. ​ 세월호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팽목항​​판옥선과 돛대에서 모티브를 얻은 녹진전망대 금치산 전망대에서 세방낙조 전망대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될 만큼 빼어난 곳이다. 해가 넘어가고 수평선의 바닷물이 너울지는 그곳에 하순영 시인의 세방낙조 시비가 있다. ​​나는 알았네셋방리에 와서섬과 섬이저문 하늘을 내려받아바다의 무릎에 눕히는 순간천지는 홀연히 풍경이 되고홍주빛 장엄한 침묵이 되고어디선가 울려오는 아라리가락일렁이며 잠가드는 섬의 그림자때로는 꿈도 꽃이 되는가저 불빛에 붉게 젖어한 생애 황홀한 발자국을 찍네​​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세방리의 낙조​​어떻게 이보다 더 세방리의 낙조를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기다림은 유한하고 만남은 찰나였다. 섬과 섬 사이로 점점 기울어가다 마침내 바다와 깊은 입맞춤을 하면 진도의 밤이 스르르 열린다. 이처럼 새방낙조가 아름다운 것은 계절에 따라서 해가 지는 위치가 달라지고, 소품처럼 늘어선 섬들이 그 아름다움에 덧칠을 하기 때문이다. 진도타워 전망대는 진도와 해남을 연결하는 진도대교와 울돌목, 그리고 주변의 섬들을 내려다보던 녹진 전망대가 있던 자리에 3년 전 들어섰다. 7층의 전망대는 진도군의 7개 읍면을 상징하는데 조선시대의 판옥선을 모티브로 돛대를 올렸고, 주변에는 명랑대첩 당시 13척의 배를 조형물로 구성했다.​​진도타워 전망대는 판옥선과 돛대를 모티브로 했다진도와 내륙을 잇는 진도대교진도를 안내해준 이평기 씨 ​2층에는 진도역사관과 옛날사진관, 명랑대첩 승전관 등 전시 시설들이 마련돼 있고, 3층부터 6층까지는 관광객을 위한 편이시설들이다. 꼭대기 층인 전망대는 날씨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데, 진도대교의 멋진 모습과 다도해의 경관, 그리고 다리 너머 해남의 산과 들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 거센 조수가 만들어내는 울돌목의 아스라한 물살소리는 이곳에서 치러진 거대한 해전의 치열한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운림산방, 조도, 관매도 등등이 발길을 잡는 진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진도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이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못내 두고 온 님처럼 아쉬움에 아쉬움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음이 그저 먹먹할 뿐이다.  ​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여행의 보석과도 같은, 고창 2017-12-01
​여행의 보석과도 같은고창 고창갯벌은 2010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어 국제 협약에 따라 보호를 받는 보석 같은 곳이다. 계단식 논농사를 지었던 운곡습지는 경작을 멈춘 후 저층산지의 원형으로 복원되고 있고, 천연기념물과 법정 보호종을 비롯해 549종의 동식물이 분포되어 있다. ​​​​한국여행작가협회에서 진행하는 고창 팸 투어 당일. 정확하게 새벽 다섯 시에 울린 알람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어나 순조로운 출발을 자신했다. 하지만 얼마 전 손에 넣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가 일으킨 혼란의 대가는 컸다. 제법 집에서 멀어졌을 즈음 두고 온 것을 알았고, 이를 다시 손에 쥐었을 때는 출발시간에 가까스로 닿을 만큼 촉박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걸음은 빨라져 어느새 턱밑까지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출발장소까지 실어다줄 전동열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아 ‘지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잠시 후 실낱 같은 희망이 보였다. 마침 급행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서 어쩌면 제시간에 닿을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제법 평온해지자 이제야 검은 새벽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는 자동차 브레이크등으로 불이 붙은 것 같았고, 강물에 비쳐서 너울대는 모습이 장관이다. 검은 커튼 자락이 서서히 올리어지듯 어둠이 물러나자 경부고속도로는 각자의 사연을 싣고 떠나는 차들로 빼곡하다. 이제 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라만차의 기사처럼 어둠을 향해 과감하게 속도를 높였다.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 예요”라는 노랫말이 가인 송창식의 목소리로 애잔하게 귓전을 맴돈다. 아마도 꽤나 가까워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서울 광화문을 떠난 버스는 3시간을 넘게 달려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IC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초겨울의 날씨를 한껏 들이키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았던 선운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선다. 단풍이 절정을 지났다고는 해도 햇빛을 받아 빨갛고 노랗게 늙어 가고, 구경을 나온 이들은 시간과 빛이 만들어내는 그 단아한 아름다움에 취한다. 걸음은 더딜 수밖에. 그리고 은행나무가 내어주는 여유를 받아들인 상점들이 손님을 맞을 채비를 서두르는 것을 느긋하게 바라본다.​​선운사의 단풍은 절정이 지났음에도 아름다웠다​​사실 선운사만큼 잘 알려진 곳도 드물다. 봄철의 동백에 이어 가을 선운사의 꽃무릇도 영광의 불갑사와 함평의 용천사 일대가 3대 군락으로 이름을 올린 지 오래다. 이 때문에서 선운사는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 등 사계절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사하촌은 꾸준하게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경내까지는 지척이지만 걸음은 더뎌진다. 빛과 교감해 수시로 색을 바꾸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허투루 지나치는 건 고욕이다. 도솔천의 검은 물에 비치는 단풍 또한 일품이다. 물이 검게 보이는 것은 참나무와 동백나무 잎이 썩어서 우러난 탄닌 성분이 함유됐기 때문이다.천왕문을 지나 맞는 대웅전 안뜰은 배롱나무가 꽃과 잎을 잃어버린 스산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백일 동안 꽃이 핀다고 해서 ‘백일홍’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꽃말이 ‘부귀’라니 저렇게 다 비워야 채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이 한 번 더 간다. 대웅전 뒤편의 동백숲은 진한 초록으로 빼곡한데 꽃 봉우리가 터트릴 채비를 하고 있다.선운사의 동백은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를 통해 유명하다. 입구에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시를 쓴 배경은 주막집 주모와의 관계 등 여러 얘기들이 돌고 있지만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은 ‘미당이 선운사 동구에 있던 막걸리집을 옛날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찾았지만 그 흔적을 알 수 없어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고 건조하게 적고 있을 뿐이다. 미당이 이렇게 선운사의 동백을 노래하자 시인 김용택과 최영미도 각각 ‘선운사 동백꽃’과 ‘선운사’를 통해 사랑 때문에 울지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도 울고, 사랑을 못 잊어 하는 내용으로 거들고 있다.​​​선운사 동구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디다​​ 선운사 경내의 감나무 ​​람사르 고창갯벌은 보석과도 같은 곳이다. 부안면·심원면 일원의 이 갯벌은 2007년 고창갯벌 습지보호 지역으로 지정된 후 2010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따라서 습지보호를 위해 제정된 국제 협약인 ‘람사르 협약’에 따라 보호를 받는다. 지난해 람사르 갯벌센터가 들어서고 올해부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방문하는 이들과 고창주민들의 해양보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다양하면서도 체계적인 교육과 관찰활동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는 곳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프로그램은 무료지만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고창 람사르 갯벌센터​​1층 전시실은 갯벌의 상태, 서식 생물과 갯벌의 정화작용 등을 전시하고 있고, 갯벌에서 취득한 다양한 형태의 생물로 교구를 마련해 이해를 높인다. 2층에서는 월별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움직이는 갯벌’, ‘바지락이 꿈틀꿈틀’, ‘바다쓰레기를 부탁해’ 등등 갯벌교육이 이뤄진다. 마을 주민들이 교육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데 피드백을 통해 수준을 업그레이드한다는 것. ‘갯벌인형극’과 ‘갯벌댄스’ 등을 보고 참여하면 흥이 저절로 일어난다.​​ 갯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갯벌인형극이나 갯벌댄스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인형극을 진행한 갯벌상태 안내인 최선하 씨는 센터가 문을 열 때 지원해 교육을 받은 후 활동하게 됐다면서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동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니 다를 재미있어 한다”고 기뻐했다. 이어 그는 “프로그램에 참가한 아이들이 갯벌의 소중함을 표현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만돌갯벌체험학습장은 트랙터를 활용해 갯벌의 끝까지 들어갈 수 있다. 지주식 김 양식장과 썰물이 빠져나가는 길목에 설치해두는 정치망 그물에서는 각종 어류들을 만날 수 있다. 조개류를 캐서 가져가거나 만돌 마을 비닐하우스에서 바로 맛볼 수도 있다. 김 양식장은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일손을 바쁘게 움직이면 최상의 품질을 얻는다고 한다. 어느덧 석양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이 마음을 곱게 어루만지며, 황혼이 내려앉자 시간의 흐름이 걸음을 늦춘 듯 고요함으로 다가선다.​​ 갯벌에 들어가 지주식 김양식장, 정치망 그물도 만나볼 수 있다​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다​​갯벌 체험용 트렉터​ 한적한 시골마을의 ‘선운도원’에서는 고추장을 만들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내놨다. 여행작가로 활동하던 김수남 씨가 귀촌해서 운영하는 곳으로 조청과 고추가루, 메주가루, 소금물로 간단하게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참가한 이들은 “고추장을 직접 만드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막연함이 있었는데 쉽고 재밌었다”며 “집으로 돌아가 혼자서도 충분히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했다.​​​풍천장어가 익어가고 있다 ​의외로 어렵지 않았던 고추장 만들기 체험​이튿날 찾은 고창국화축제장은 기대보다는 실망이 컸다. 알찬 구성과 화려함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전남 영암의 국화축제를 벤치마킹이라도 해야 할 듯 보여주는 것도 없고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한 주제도 없다. 하지만 꽃은 피었으니 그 향기에 벌들이 찾아들어 얼마 가지 않아 실망은 곧 감탄으로 바뀐다. 사람의 손길을 최대한 절제한 국화밭은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고창국화축제는 기대에 못미쳤다 ​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면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유적지와 닿아 있고 길은 운곡람사르습지로 이어진다. 안내를 맡은 운곡습지생태관광협의회 김동식 회장은 고창의 유래와 역사는 물론 고인돌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설명을 곁들인다. 김 회장에 따르면 고인돌은 고창읍과 아산면에 분포되어 있는데 4자리 숫자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즉 2로 시작하면 고창읍에 있고 그 다음 숫자는 구역을, 그리고 뒤의 두 숫자는 개수를 의미한다는 것. 그러다보니 고인돌이 단순한 돌덩어리가 아닌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가선다. 그리고 우리의 DNA에 먼지처럼 그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유적지​고인돌 박물관의 선사유적지​ 동양 최대 고인돌. 무게가 300톤이나 된다​ 산등성이로 올라서면 2011년 람사르 운곡습지의 초입이다. 람사르 협약은 희귀하고 독특한 습지 유형을 보이고 있거나 생물다양성이 풍부해 보존가치가 높은, 국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지정하고 있다. 계단식 논농사를 지었던 이곳은 경작을 멈춘 후 저층산지의 원형으로 복원되고 있어 활용가치가 높다고 한다. 수달과 삵, 말동가리, 붉은배새매, 황조롱이 등 천연기념물과 법정 보호종을 비롯해 549종의 동식물이 분포되어 있다. ​​운곡 습지 탐방로​청량산 문수사 ​​아름다운 문수사의 단풍​탐방로는 습지보호를 위해 딱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만 만들었다. 초겨울 낙엽들의 군무를 만끽하다 어느 순간 쏟아지기 시작되니 비가 내리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루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이라는 소프트한 포장지에 쌓여 의식의 서랍 속 향주머니와 함께 고이 담겨 있는 듯 낙엽 밟는 소리다. 풍경도 입체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결국은 대단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한낱 추억으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원래 여행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네 인생이 그러한 것처럼……. 돌아서는 길, 고창읍성, 무장읍성 등 고창에 남겨 둔 보물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고창 여행의 TIP고창읍성 팜팜스테이션 ‘들하담’고창은 하루 이틀에 결코 속살을 내어주지 않는다. 산과 바다와 농촌, 여기에 다양한 눈부심으로 다가오는 문화유산까지. 그렇다면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팜팜스테이션은 여행객들의 이런 고민을 말끔하게 씻어준다. 고창군의 농촌관광 우수 사업농가 브랜드 ‘팜팜’이 운영하는 방문자센터다.농촌관광의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데다 자전거 대여나 짐 보관 서비스는 물론 팜팜 농가들의 믿을 수 있는 로컬푸드를 만날 수도 있다. 팜팜스테이션 들하담(들과 하늘을 담고 있다)은 고창 유일의 게스트 하우스다.문의 063-563-8808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만돌마을의 아름다운 낙조 ​​
중국 속의 타이완, 금문도(金门岛) 2017-11-10
중국이야기중국 속의 타이완, 금문도(金门岛)복건성의 항구도시 샤먼에서 빤히 보이는 곳에 위치한 금문도는 중국이 아니라 타이완의 영토다. 1958년만 해도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이곳은 이제 중국과의 왕래가 수월해졌고, 나아가 중국 관광객이 없으면 생활하기 힘든 곳이 되었다.​​  샤먼(厦门:하문)은 중국 복건성(福建省:푸젠성) 남부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다. 아편 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1842년 영국과 맺은 난징조약에 의해 개항된 5개의 항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샤먼에는 1920년대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지은 아름다운 근대식 건물들이 산재해 있어 마치 유럽의 한복판에 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타이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전략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도시다. 진먼다도(金门岛:금문도)는 바로 샤먼의 코앞에 마주하고 있는 섬이다.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금문도가 타이완 땅이란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지금은 중국과 대만의 화해정책으로 평화로움을 유지하고 있지만 1958년만 해도 이곳은 치열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우연찮게 방문하게 된 금문도내가 샤먼을 거쳐 금문도를 방문하기로 한 것은 얼마 전에 우연히 광저우에서 만났던 이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이다. 5년 동안 생사를 모르고 지내다가 오랜만에 만난 이 사장과 나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동안 지낸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그동안 왜 보이지 않았느냐?”는 나의 질문에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털어놓은 그의 이야기는 그동안 뉴스 속에서나 듣던 경악할 일이었다. 이 사장은 이우에서 5년 넘게 환전을 하며 짭짤하게 돈을 모아온 알부자였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상대방에게 돈을 보내려고 할 때 환치기라는 환전상을 통한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환전사기에 걸려들어 곤욕을 치렀다. 동북에 사는 한국인 A씨로부터 한국으로 2억원을 보내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는 아무런 의심 없이 돈을 받아 한국으로 보냈는데 덜컥 배달사고가 난 것이다. A씨가 지정한 B씨에게 건넨 그 돈은 최종적으로 남대문시장에 있는 조선족 여자에게 전해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전달된 돈이 겉에는 진짜 지폐였지만 안쪽은 모두 흰 종이로 만들어진 위조지폐였다고. 알고 보니 한국에서 돈을 받아 조선족에게 전달한 한국인 B씨는 처음 거래를 요청한 A씨와 한 패거리였다. 나중에 돈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조선족이 A씨를 찾아 나섰지만 계획적으로 일을 벌였으니 가만히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끝내 A씨를 찾지 못한 조선족은 이 사장의 거처를 수소문해 이우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중국에서도 이런 추적은 사실상 불법이다. 어쨌든 이우로 온 그는 이 사장이 사기를 쳤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우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중국 경찰은 혐의를 입증할 수 없다며 이 사장을 석방했다. 조선족들의 보복이 두려워 파출소에 계속 있겠다고 요구했지만 경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파출소에서 나온 이 사장은 그들에게 다시 납치되어 아파트에 감금된 채 매일 2억원을 물어내라는 협박에 시달렸다. 이 사장은 전화를 통해 진행한 일이라 B씨의 존재도 모를 뿐더러, 어쨌건 돈은 제대로 전달되었으니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버텼다. 그렇게 보름이 지난 어느 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맨발로 아파트를 뛰쳐나와 택시를 타고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그 길로 친구와 함께 상해 공항으로 갔지만 이미 조선족의 조직원들이 쫙 깔려 있었다. 궁리 끝에 멀리 복건성까지 가기로 작정하고 밤새도록 차를 몰아 샤먼에 도착한 후 금문도로 갔다. 타이완에 속한 금문도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치안이 철저한 만큼 조선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 사장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남대문 경찰서에 이런 사실을 알리고 응당한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5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들어왔으니 감회가 새로웠을 터. 고초를 겪었던 당시 상황이 눈앞에 어른거렸는지,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 사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사장의 아픔을 떠올리며, 오늘 그가 갔던 길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불과 1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타이완 땅샤먼에서 금문도로 가는 배는 30분 간격으로 있다. 금문도로 가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홍콩 가는 것과 비슷한 정도였다. 중국과의 양안 관계는 복잡하지만 타이완으로 가는 뱃길은 평화롭기만 하다. 샤먼의 마토(码头:선착장)에서 금문도의 마토까지는 배로 35분이 걸린다. 선착장이 샤먼 시 안쪽에 있어서 그렇지 가장 근접한 곳에서 간다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금문도에서 중국 샤먼까지는 10km 내외의 거리이지만 타이완의 수도인 타이페이까지는 100km나 된다. 타이완에 속한 섬이지만 타이완 본토보다 중국이 훨씬 가깝다. ​​ 샤먼과 금문도를 운행하는 배 ​​샤먼에서 금문도까지 배로 35분이 걸린다​금문도에 내리니 중국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샤먼의 출국장에서는 약간 긴장감이 돌았지만 금문도의 입국장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중국과 워낙 가까운 곳이라 중국의 휴대폰을 그냥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바로 로밍이라는 표시가 뜬다. 타이완은 비자가 필요 없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지도 않고, 이민국에서 90일간 체류할 수 있는 스탬프를 찍어준다.배에서 내리니 건너편으로 샤먼의 빌딩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저 건너편이 중국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여행안내소에서 지도를 한 장 얻었다. 배에서 볼 때에는 그리 큰 것 같지 않았는데 실제로 돌아보니 꽤 큰 섬이다. 남북의 길이는 5km이지만 동서로는 20km나 된다. 깨끗하고 잘 정돈된 모습이 제주도와 비슷한 인상이랄까. 무더운 날씨에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았다. ​​​​금문도 샤먼에서도 육안으로 볼 수 있다 ​​​​도로는 잘 닦여져 있다. 열대지방 분위기가 난다​선착장의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 기사와 흥정을 했다. 4시간 정도면 금문도의 주요 볼거리는 다 돌아볼 수 있다는 말에 택시를 타고 섬을 누비기로 했다. 요금은 1시간당 100위엔(1만7,000원).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스쿠터나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아보거나, 미리 국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렌트카를 이용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금문도 선착장. 택시는 모두 일본 도요타였다 ​금문도는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많은 관광객들이 스쿠터를 이용해서 섬 관광에 나서고 있다 ​금문도의 첫 인상은 깨끗하고 평화로웠다. 과거 수없이 많은 포탄이 떨어지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전투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다만 시내 곳곳에 설치된 방공호와 콘크리트 참호가 아직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장소라는 사실을 말해줄 뿐. ​​​평화스러워 보이는 금문도의 모습. 한때 중국과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교차로에는 광고판과 참호가 함께 있다​​어딜가나 콘크리트로 지언진 참호를 볼 수 있다  인구 15만 명의 금문도는 타이완의 계엄령이 해제된 1995년까지는 군인들만이 살던 삭막한 섬이었다.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항상 전투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하는 긴장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중국의 개방정책 이후 양국의 관계는 양안에서 협력 모드로 바뀌었다. 물론 타이완의 집권당인 민진당이 경제협력은 계속하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약을 내세우면서 긴장 관계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복잡미묘한 중곡과 타이완의 관계타이완과 중국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청의 지배를 받던 타이완은 1870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에 할양된다. 이후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60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에는 반일 감정이 아직 크게 남아 있지만 타이완에는 그런 면이 적다는 점은 이런 역사적 환경에서 비롯된다. 금문도에는 큰 빌딩이나 주택단지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그리 큰 혜택을 입지 못해서인지 오히려 중국에 친화적이다. 아시아에서 제일 큰 면세점이 있는 것도, 돈을 펑펑 쓰는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도다. 실제로 금문도의 주요 수익은 중국인 관광객들에게서 거두어들인 것이다. 최근 들어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는 바람에 중국인 관광객의 숫자가 엄청나게 줄다 보니 금문도 사람들은 중국보다는 오히려 타이완 정부에 대한 불만이 더 크다. ​ 마오쩌둥 차를 판다는 입간판. 중국과 대치하고 있다는 생각을 잊게 한다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면세점. 중국 관광객을 겨냥해서 지었다 ​​금문도의 부동산값도 엄청 올랐다. 중국 인들의 투자 덕분이다​​요즘 타이완 정부는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는 중국 정부에서 여행객들의 대만행을 억제하고 있다. 사드 사태로 인한 한중 갈등과 비슷한 양상이다. 주민들은 중국과 대만 사이의 불필요한 마찰로 중국 관광객이 오지 않는 데 대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곳 주민들에게 대만이든 중국이든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던 장제스 정권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한때 이곳이 중국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금문도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오랫동안 국공내전을 치렀다. 1949년 공산당에 패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도망을 친다. 공산당으로서는 중국을 차지하긴 했으나 타이완이 남았으니 진정한 통일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바로 타이완을 공격해서 통일의 숙원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에 100만 명이 넘는 인민해방군을 지원하는 바람에 기회를 잃고 말았다. 타이완으로 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금문도부터 넘어야 한다. 샤먼에서 타이완까지는 약 80km 가 넘지만 금문도는 바로 중국의 코앞에 진을 치고 있다. 따라서 통일을 향한 중국의 집념은 금문도에 대한 포격으로부터 시작된다. 1958년 8월 23일 중국 포병들이 일제히 포를 발사했다. 그날 이후 금문도에는 47만발이 넘는 포탄이 떨어졌다. 이로 인해 금문도에서 총 85명이 사망하고 136명이 부상을 당했다. 2,649채의 주택이 완전히 파손되었으며, 반파된 가옥도 2,397채에 이르렀다. 당시 금문도에는 4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섬 주민은 모두 군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금문도는 섬 전체가 요새화되어 있다 보니 군사시설은 중국의 포격에서 건재했다. 지질학적으로 섬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런 지반에 굴을 만들어 웬만한 포격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 진지를 구축해 놓았다. 어지간한 화력으로는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천혜의 방어진지였다. 현재 금문도의 지하 진지들은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지하 벙커 안으로 들어서니 내부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는 넓고 높은 통로와 함께 지휘소까지 갖추어 놓았다. 또한 고속단정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뱃길까지 만들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결국 44일간의 전투 끝에 중국은 대만 침공을 포기하고 만다. ​​요새화되어 있는 지하갱도 입구 ​암석 안에 만들어진 진지는 잠수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뱃길까지 만들어 놓았다​지하에 상당히 넓고 긴 터널을 뚫어 요새화했다 화강암 속에 지어진 진지는 폭탄으로도 절대 부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가는 곳마다 중국과 전투를 했던 무기들을 진열해 놓았다 ​​많은 지역에 전쟁 기념관이 설치되어 있다​​​단순하지 않은 사람들의 속내당시 중국의 전력은 병력 수만 많았지 종합 전투력은 그리 대단치 못했다. 지금이야 핵무기는 물론 항공모함까지 보유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금문도 하나 제압할 수 있는 군사력이 아니었다. 사실 장제스의 국민당이 중국 대륙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패한 것도 군사력보다는 고위간부들의 부정부패와 민심 이반 현상 때문이었다. 비록 타이완으로 퇴각은 했지만 장제스의 국민당이 보유한 화력은 막강했다. 미국의 즉각적인 지원이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당시만 해도 타이완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1971년 26차 유엔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상임이사국의 권한이 넘어가기 전까지는 당당히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였다. 미국은 타이완이 중국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치하지 않았다.이런 타이완과 미국과의 돈독한 관계도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게 된다. 1969년 미국은 긴장과 대결의 냉전체제를 종식시키자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당시 미국은 월남전에 참전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국 내에서는 연일 반전 데모가 열려 미군들의 사기가 꺾인 상태인 데다 중국은 소비에트연방공화국(당시 소련)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다. 특히 1969년에는 우수리 강을 사이에 둔 영토분쟁으로 전쟁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서로의 입장이 맞아 떨어진 미국과 중국은 급격히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1971년 알바니아의 발의로 타이완(당시 중화민국) 대신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교체하기에 이른다. 이때 헨리 키신저가 중국과의 협상을 위해 특수한 임무를 맡았고 미국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해 이른바 ‘핑퐁외교’를 펼친다. 그리고 1972년 2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한다. 중국이 그동안 대륙을 가렸던 죽의 장막을 거두어 내는 순간이었다. 나를 안내한 택시 기사는 타이완 사람이지만 중국으로 통일이 되어도 무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가 그동안 알고 지내던 타이완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사고라서 의외였다. 타이완 본토 사람들은 중국을 싫어하지만 국민당과도 거리를 두려고 한다. 자신들은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왔는데 어느 날 중국에서 쫓겨난 장제스 일행이 몰려와 주인 행세를 해왔다는 생각에서다. 이들은 타이완이 예전부터 중국과 다른 나라이므로 당연히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장제스의 동상, 금문도 주민들은 장제스의 동상이 이젠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타이완 내의 민심은 상당히 복잡하다. 운전기사는 중국 관광객을 상대로 사업을 하다 보니 중국인들이 오지 않으면 수입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는 중국과 대만 간의 정치적인 대립이 원만하게 해결되어서 중국 관광객이 꾸준하게 들어오길 바랄 뿐이다. 그런 그에게 국적은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닐 터. 대륙에서 건너온 대만 사람들은 아직도 대륙 통일의 꿈을 꾸지만 이제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타이완을 능가하는 GDP와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중국이 오히려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 중국과 사업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은 택시 기사처럼 중국이든 타이완이든 통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장사만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사상과 이념을 초월하는 돈의 위력 지금은 평화로운 섬이지만 가는 곳마다 예전에 사용하던 군 시설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동굴을 파서 조성한 군 병원과 바닷가를 끼고 건설된 휴양소, 군인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위문공연을 벌였던 영빈관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무척 좋아하는 덩리쥔(邓丽君)이 이곳에 와서 타이완 군인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고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기록들도 전시되어 있다. 타이완군의 군복을 입고 경례까지 하는 모습을 보는 중국인들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덩리쥔은 한때 타이완 최고의 가수로 “텐민민(甜蜜蜜), 웨랑따이표워떠신(月亮代表我的心)”등 유명한 노래를 남겼다. 아직도 중국에서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다. 아마도 중국인들이 이곳에 와서 자신들이 좋아하던 가수가 적군인 타이완의 군복을 입고 거수경례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 약간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 ​군인 휴양소, 전투에 참가하고 나면 이곳 휴양소에서 휴가를 보냈다고 한다  예전에 군병원으로 쓰였던 곳, 군사도시라는 것 을 실감할 수 있다​​​​지하에 지어진 야전병원 모든 길목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참호를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덩리쥔이 대만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가장 복잡하다는 구 거리도 그리 사람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상점마다 붉은색 장식이 치렁치렁 걸렸고 안쪽에 재물신이 모셔진 모습이 중국 복건성의 그것과 비슷하다. 불교와 미신에 심취해 있는 그들의 삶은 복건성 사람들의 문화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다만 중국 관광객이 많이 줄어 예전의 호경기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어느 거리나 한산한 것이, 중국 관광객이 다시 몰려오지 않으면 사람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것 같다. ​​​ 타이완에는 불교신자가 많고 절은 대단히 화려하다  금문도 사람들도 미신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다  ​ 조용하고 한적한 구 시가지, 바로 앞에 중국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빵집에서 대만식 전통빵을 한 박스 샀다. 인심 좋게 생긴 주인아주머니는 우리가 한국에서 보던 화교들의 모습과 판박이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대단히 반가워했다. 한때 대한민국과 타이완은 거의 혈맹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1992년 대한민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안타깝게도 타이완과는 단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만인들이 믿었던 대한민국마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원통해 했던 기억이 난다.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빵집 사장님. 한국에 있는 화교와 판박이다 타이완에서 유명하다는 금문도의 고량주 공장​​그래도 손님이 왔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정겹다. 그들 역시 중국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해결되어 관광객들이 많이 와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경제가 사상과 이념을 넘어선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한다. ​글 사진 양인환​
멋있고, 맛있고, 다시 찾고 싶은 곳, 1박 2일의 대.. 2017-11-03
​멋있고, 맛있고, 다시 찾고 싶은 곳1박 2일의 대구대구 여행의 1번지, 팔공산 자락의 동화사로 가는 길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에 좋은 공간이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과 성모당, 그리고 성 유스티노 신학대학으로 이어지는 카톨릭 타운은 과거를 따라 걷는 대구의 근대골목 중에서도 명소로 꼽힌다. 거기에다가 앞산전망대에서 만나는 낙동강 낙조의 아름다움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울을 떠나 KTX로 1시간 30여 분이면 닿는 지근거리의 대구는 그곳에 살았던,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또 앞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담아내는 것으로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둘레를 형용하기 어려울 공간이다. 그 광활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 결코 수고롭지 않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보다 더한 즐거움이 또 있을까? 열차가 동대구역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플랫폼을 빠져나오면서 설렘의 크기가 한 뼘 더 자란다. 나는 지금 대구에 있고, 조금 더 지나면 대구가 주는 매력에 흠뻑 취해 있을 것이다.​동화사의 마애여래좌상이 마중을 나오고대구 여행의 일 번지, 팔공산 자락의 동화사로 가는 길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에 좋은 공간이다. 지금까지의 여행지에서 만났던 사찰들의 풍경이 스치듯 지나치면서 건물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난다. 청명한 하늘을 이고 있는 고즈넉이 빛바랜 기와지붕과 사천왕상, 대웅전 등 가람의 배치와 정성을 다해 예불을 올리는 신도들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익숙한 풍경이다. ​​​​청명한 하늘을 이고 있는 동화사의 기와지붕​​독경소리가 장중한 울림으로 다가서면 바람과 구름이 장난을 치다가 하얀 솜 바닥에 흠을 내놓을 것 같은 그런 날, 편안함으로 마애여래좌상이 마중을 나왔다.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배꼽 앞에 놓은 항마촉지인 자세를 하고 있다. 옷은 어깨를 모두 덮었고, 머리와 몸 뒤의 광배는 두 줄의 선으로 표현했는데, 자세하게 보아야 형태가 드러난다. 불상이 앉아 있는 연꽃대좌가 구름 위에 떠 있어 사뿐하게 내려앉은 듯하다. 봉황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경내로 들어서는데 계곡을 타고 ‘돌돌돌’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소리와 매미, 여치, 그리고 산새들의 지저귐이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울창한 나무들이 그늘을 내어주지만 강렬한 햇빛 때문에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마침 통일대범종이라는 누각과 수령을 가늠할 수 없는 나무 한 그루가 신도들과 내방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동화사는 창건된 지 1,600여 년이 넘는 고찰이다. 493년 극달이 창건해 ‘유가사’라고 했지만 832년 왕사 심지가 중창할 때 겨울철임에도 주위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해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후 중창에 중창을 거듭하면서 대부분 조선시대 영조 때에 세워진 대웅전을 비롯해 연경전과 천태각, 영산전, 봉서루 등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대웅전의 삼존불상은 1728년에 왕준이 만들었고, 후불탱화는 1620년에 의현이 그린 것을 1688년에 다시 고친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삼장탱화와 제석탱화 등이 있고, 천장의 극락조는 일품으로 이름을 알린다.  ​​ 동화사는 역사가 1,600년에 이른다   한 시간여 후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찾은 인근의 식당 고려산장은 송이버섯전골을 전문으로 한다. 팔공산과 그 일대에서 한창 송이버섯이 나올 때여서 그 특유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다. 송이버섯국과 불고기를 따로 내놓고 그 밖의 밑반찬들로 상이 차려지는데, 가격에 따라 구성이 달라진다. 다만 버섯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식당앞 도로의 중앙분리대는 닭과 원숭이, 호랑이 등 12간지를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앙증맞게 자리를 잡아 운치를 더한다. 대구의 젖줄인 금호강의 하중도는 축구장 33개가 들어설 정도의 땅에 코스모스 군락지를 조성했다. 그곳에 들어서면 풀들이 누웠다가 일어서고, 코스모스가 살랑거리며 환한 미소를 보내올 때 비로소 바람이 지나간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가을날의 대구는 움켜쥐려 하면 어느새 줄행랑을 치는 바람처럼 자유로웠고, 싱그러웠으며, 맑았다. 연인들과 가족들은 꽃향기에 취하고, 어느새 코스모스와 하나가 되어갔다. ​​​하중도의 코스모스 군락​​카톨릭 타운은 과거를 따라 걷는 명소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과 성모당, 그리고 성 유스티노 신학대학으로 이어지는 ‘카톨릭 타운’은 과거를 따라 걷는 대구의 근대골목 중에서도 명소로 꼽힌다. 수녀원의 성당과 코미넷관, 그리고 일부 공간들은 일반인들에게도 공개하고 있다. 1898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온 드망주 신부는 1911년 대구교구를 창설한 뒤 신부를 보좌하면서 고아와 노인을 돌보고 의료사업을 담당할 수녀를 파견해줄 것을 프랑스 성바오로 수녀회에 요청했다. 1914년에 수녀 파견이 결정되자 착공에 들어가 1915년 완공되면서 대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건물의 1층은 예배실과 유아원, 2층은 침실, 그리고 지하는 식당과 창고 등으로 사용됐지만 지금은 수녀들의 숙소로 쓰인다. ​​수녀원의 전경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유스티노 성당  역사관으로도 사용되는 성당은 수녀원이 지나온 시간들을 나지막하게 들려준다. 내부는 아담하지만 경건함 그 자체로 다가와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특히​ 성녀 소화 데레사를 주보로 축성할 때 프랑스에서 소화 데레사 성상과 유해, 성모상, 요셉 성상 등을 모시고 왔다고 한다. ​​​​ 수녀원의 성모 마리아상​​십자가가 천장 중간에 걸려 있고, 수녀복과 당시의 휠체어, 한국 관구 초대 관구장인 멜 베아트릭 수녀의 신앙생활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시선을 끈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11시 30분, 오후 1시 30분~4시까지이고, 매주 월요일과 국경일에는 문을 닫는다. 수녀원 홈페이지(www.spcdaegu.or.kr)에 들어가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한국 카톨릭의 초기 역사를 볼 수 있는 전시물들​​오래전에 사용하던 휠체어​​​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과 성모당의 일부 공간은 역사관으로 개방되어 있다​​수녀원의 맞은편 대구교구청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넓게 펼쳐진 잔디밭이 나오면서 성모당과 마주하게 된다. 성모 발현 기적의 프랑스 루르드 동굴을 기념해 1918년 만들었다. 성모당 위의 ‘1911’과 ‘1918’은 각각 대구대교구 설립과 설립자인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해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뜻한다. 라틴어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이다. 소원과 기적이 자주 일어난다고 알려져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성모당 입구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의 라틴어가 쓰여있다​​양초에 불을 붙인 후 두 손을 모으고 눈을 지긋하게 감으며 고개를 살포시 숙인 이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과 헌신, 건강, 부귀와 공명 그리고……. 저마다의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이들의 뒷모습이 쉽게 다가서지 못할 울림으로 다가온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육체를 떠난 또 하나의 내가 나를 내려다보는 신비로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묻는다. 정말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발길을 옮기면 외래환자와 휴양 중인 성직자를 위한 건물 안익사(프랑스어로 부속건물 또는 별관이라는 뜻)를 만난다. 현재의 건물은 공산댐 공사로 수몰될 위기에 처한 정월생(아네스) 집안의 가옥을 기증받아 옮겨온 것이다. 또한 사제 묘역은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주면서도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게 만든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 캠퍼스의 성유스티노 100주년 기념관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에 가까운 우아한 건물로 벽돌을 정교하게 만들었다. 드망즈 주교가 신학교 설립을 위해 세계 각지에 원조를 요청했을 때 중국 상해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신자가 성 유스티노를 모시는 조건으로 거액의 헌금을 냈고, 대구의 천주교 신자 서상돈이 땅을 기증해 1914년 완공했다. 대구의 천주교 역사를 담고 있는 이곳은 성유스티노홀(건축관), 드망즈홀(설립자관), 앗숨홀(문서관), 옴니아홀(100주년관) 등 4개의 관으로 구성되어 대구 가톨릭 100년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쉬는 날 없이 오전 9시부터 문을 열고 5시에 닫는다. ​빡빡하던 강행군에 피로가 몰려오고 하루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즈음 찾은 앞산전망대는 대구 시가지 전경을 한눈에 보여준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서부터 흐느적거리며 벌판을 가로지르는 낙동강을 빨갛게 물들이며 영역을 넓혀가는 낙조의 아름다움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멋진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이들로 전망대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 앞산에서 내려다 본 대구 시내  아름다운 앞산의 노을​해가 지고 시가지의 불빛이 하나둘 기지개를 켜면 ‘맛있는 대구’가 우리를 유혹한다. 대구 남구에 있는 안지랑 곱창골목은 가격이 저렴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고, 전국 5대 음식테마 거리로 지정되어 젊은이들은 물론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넉넉하다 못해 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양에 한 번 놀라고, 달궈진 불판에 양념을 한 곱창이 알맞게 익어 입안으로 들어가면 그 맛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입안 가득하게 침이 고이면서 술을 부르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면 밤은 속절없이 깊어만 간다. 마비정과 인흥마을 그리고 사문진 나루터이튿날의 첫 일정인 달성군 마비정의 벽화마을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비무’라는 수말과 ‘백희’라는 아름다운 암말의 사연에서 유래했다. 마을 전체가 토담과 벽담을 활용해 마비정 문지기, 오누이, 누렁이와 지게, 장독대와 메주 등 1960~70년대의 농촌 풍경을 벽화로 꾸몄다. 흙담과 좁은 골목길 등 토속적 자연환경을 그대로 보존했고, 국내 유일의 연리목(連理木)+연리지(連理枝) 사랑 나무와 국내 최고령 옻나무, 대나무 터널, 이팝나무 터널 길 등이 여행객들을 동심의 세계로 이끈다. 2013년 도시 대상을 수상했고, 2015년 대한민국 경관 대상 최우수상을 받은 이유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 마비정 벽화마을​벽화마을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의 사연에서 유래했다 ​마비정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인흥마을은 남평 문씨 세거지로, 세월이 흔적이 곱게 느껴지는 곳이다. 마을로 들어서려면 목화밭을 지나야 하는데 여기에서 마을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바로 고려시대 말 우리나라에 목화를 전한 문익점 선생의 18세 후손인 문경호가 19세기 중엽에 터를 잡아 만든 것. 당시에는 초가로 시작을 했지만 이후 100여 년에 걸쳐 지금의 세거지가 형성됐다. 현재는 70여 채의 기와집이 한울 안에 정연히 들어서 있다. 어른 키 높이를 훌쩍 넘는 흙 내음 가득한 토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덧 마음이 푸근해진다. ​​​남평 문씨 세거지인 인흥마을  인흥마을은 문익점의 후손 문경호가 19세기 중엽에 터를 잡았다 ​여정의 끝에서 만난 사문진 나루터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남쪽에 있어 물류의 요충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한국 최초로 피아노를 들여온 역사적인 장소다. 달성군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12년부터 ‘100대 피아노 콘서트’를 매년 10월 가을 연례행사로 치른다. 500년 된 팽나무가 옛이야기를 전하는 주막촌에는 막걸리를 비롯해 잔치 국수, 국밥, 부추전, 두부 등 다양한 먹을거리가 식욕을 자극한다. 유람선 달성호는 나루와 강정보, 포 신당리를 거쳐 다시 나루터로 돌아오는데, 애잔한 노래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유람객을 따라나선다.  ​​ 사문진 나루터의 주막촌 ​​사문진 나루터는 국내에 최초로 피아노가 들어온 곳이다 ​내 사랑이 떠나가네 사문진 나루칠백 리 물길 따라 흘러서 가네못 지킬 그 약속을 그리 쉽게 말하더니눈물만 남겨 놓고 가는 사람아가는 이야 좋겠지만 남는 나는 어쩌라고아 이별의 강나루 사문진 나루나루터 위쪽의 화원 동산은 신라 유적인 상화대와 고분 떼 외에도 서북쪽으로 흐르는 낙동강 강물을 따라 늘어선 버드나무, 깎아지른 절벽, 포플러 나무의 짙은 그늘이 어우러져 분위기를 더한다. 옛 봉수대가 있던 전망대를 지나 강변으로 향하면 낙동강과 금호강 두 물줄기가 만난다. 이곳에서는 사문진의 일몰은 물론 국내 최대의 내륙 습지인 달성 습지를 감상할 수 있다. ​​화원 전망대  시문진의 일몰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던 1박 2일 여정의 대구 여행도 막을 내려간다. 아직 가야 할 곳도 많고, 맛보아야 할 것들도 지천인데……. 일몰 속으로 여운이 짙게 드리운다.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화원 유원지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지점
아이코스? 오브콜스! 2017-10-12
광화문에서는 역시 궐련아이코스? 오브콜스!담배인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아니, 줄어들었다. 담뱃값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힘들어졌고 제대로 된 흡연구역 하나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쾌적한 흡연구역은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공간이다. 아이코스 스토어 광화문점은 우리 모두에게 대안이 될 수 있다.​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실내에서 담배를 피운다. 혹한의 겨울에 따뜻한 실내에서 담배를 피운다. 실내금연이 대부분 금지되는 요즘, 흡연가들에게 좀처럼 누리기 어려운 호사다. 담배를 피울 때면 영락없이 유목민 신세가 된다. 겨우 적절한 장소를 찾아 한 모금 들이키고 내뿜으면 연기도 유목민처럼 여기저기를 떠돈다.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예상치 못하게 연기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딜레마를 한 번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면 믿겠는가. 되묻지 마시라. 실화다. ​실내의 중심에서 담배를 피우다담배와 직장인은 어울리는 한 쌍이다.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연기 몇 모금에 날려 보낸다. 옛날에는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익숙했지만 요새는 따가운 눈총 세례로 끝나지 않는다. 때문에 옥상이나 건물 주변에서 눈치 아닌 눈치를 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빌딩 숲에 수줍게 자리잡은 아이코스 스토어 광화문점은 근처 직장인들의 새로운 성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높이가 낮은 크림색 외관은 높게 치솟은 푸른 창문들 사이에서 잔잔한 존재감을 드러낸다.내부는 외관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진다. 크림색으로 꾸며진 인테리어는 매번 따뜻하게 반겨줄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스토어는 아이코스 이용자라면 자신의 아이코스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용이 끝나면 스페셜리스트가 클리닝을 도와주기 때문에 들르면 들를수록 이익 보는 기분이 날 거다. 간단한 미팅을 하기에도 제격이다. 실제로 매장에서 업무 전화를 하거나 매장을 약속 장소로 잡는 고객이 적지 않다고. 한마디로 아이코스 고객의 전용 카페인 셈이다. 실내라서 행여 옷에 냄새가 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면 그 걱정, 홀더와 함께 차저 안에 넣어두기 바란다. 매장에 들어가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만이 느껴질 뿐 담배 냄새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2층에서 상담과 시연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이코스가 기존 담배에 비해 갖고 있는 장점을 새삼 되새기게 되는 부분이다.   2층에도 디바이스와 액세서리가 진열돼 있어 시연하면서 둘러보기에 좋다​스토어가 존재하는 이유는 고객을 돕기 위해서다. 스페셜리스트가 1:1 혹은 2:1로 사용자에게 설명을 해준다. 특히 첫 구매자에게는 아이코스에 관한 모든 것을 교육한다. 홈페이지에서 할인 코드를 받을 때, 제품 사용법에 관한 동영상을 끝까지 보도록 되어 있지만 사용법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홈페이지 사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스토어를 방문해 실수로 아이코스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하자. 아이코스도 이젠 개성시대담배가 예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액세서리를 직접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홀더캡은 12가지 색상으로 판매 중이다. 2만원이면 단조로운 화이트와 네이비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일반은 1만7,000원이고 메탈릭은 1만9,000원. 천연 소가죽으로 만든 파우치와 케이스도 6가지나 준비됐다. 전자 디바이스와 가죽의 조합은 언제나 옳다. 케이스에는 히츠 한 갑, 차저, 클리너가 꼭 맞게 들어간다. 배터리는 충격에 약하기 때문에 물건을 잘 떨어뜨리는 사람이라면 파우치가 필수다. 케이스는 4만9,000원, 파우치는 3만9,000원이다.​​천연 소가죽 케이스. 왼쪽 상단에 구성품이 알맞게 들어찬 자태를 보시라 천연 소가죽 파우치로 생활 흠집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자. 카트레이는 아이코스와 함께 하는 자동차 생활의 품격을 높여준다​​ 사용이 끝난 히츠를 처리하기가 애매하다면 트레이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트레이의 표면은 재나 먼지가 깔끔하게 털릴 수 있도록 다듬어졌다. 스토어 관계자에 따르면 아이코스 사용자가 아닌 사람이 트레이를 사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디자인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 탁상용 트레이​는 사이즈에 따라 두 가지로 가격은 각각 4만9,000원, 3만8,000원이다. 카 트레이는 다양한 도로 상황에서 히츠가 날아가지 않도록 뚜껑이 달려 있다. 가격은 4만5,000원. 예쁘다고 정신없이 사다보면 액세서리 값이 디바이스 값과 비슷해지는 상황이 생긴다. 돈이 나가는 건 슬픈 일이지만, 더 슬픈 사실은 디바이스가 망가졌을 때 할인 없이 제 가격을 주고 사야 한다는 것이다.  플래그십 스토어는 서울에 2곳, 고양에 1곳, 광주에 1곳, 부산에 1곳이 있고 편의점은 CU가 서울 전 지역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GS25를 제외하고 서울 이외에 편의점 구입이 가능한 지역은 경기, 광주, 대구, 부산, 청원 등이다. 자세한 안내는 각 편의점을 통해 확인하자. 이 밖에도 대학가, 카페, 바버샵, 마트 등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아이코스를 만날 수 있으니 공식 홈페이지에서 판매점 위치를 찾아보길 바란다.  글 김태현 기자​ ​​HOW T0 1. 차저 안에서 천천히 홀더를 꺼낸다 2. 히츠를 돌리지 말고 홀더 밑에 공간이 남지 않을 때까지 반듯하게 넣는다​3. 예열을 하기 위해 버튼을 2~3초 누르고 진동이 오면 버튼에서 손을 뗀다. 깜박거림이 끝나면 사용한다​4. 히츠를 분리할 때는 꼭 홀더캡을 위로 올려줘야 한다. 겁먹지 말고 과감하게 올리자 ​5. 캡을 올린 상태에서 히츠를 분리해야 홀더에 잔여물이 남지 않는다 
강진(下) 2017-09-27
 아쉬움은 그리움으로 피어나고강진(下)​모란이 필 때면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 없다는 영랑생가는 시인의 감성이 숨결로 다가오고 듯하다. 시문학파기념관에서는 한국 서정시의 진수를 만끽하고, 전라병영성과 하멜기념관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이끈다.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지자 온 몸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땀방울이 한순간 그 무게를 주체하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른다. 연신 얼굴을 훔치던 손수건은 이미 흠뻑 젖었다. 맞설 수 없으니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 응달을 찾으니 단아하게 치장을 한 새색시처럼 영랑생가가 눈에 들어온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영랑 김윤식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햇빛에 부서지는 초가가 더욱 더 짙은 황금색의 정겨움으로 다가선다.  ​​​​​화살처럼 쏟아지는 햇빛을 피해 응달을 찾으니 단아하게 치장을 한 새색시처럼 영랑생가가 눈에 들어온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영랑 김윤식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햇빛에 부서지는 초가가 더욱 더 짙은 황금색의 정겨움으로 다가선다.​​대나무를 엮어 만든 문을 지나자 강진감성여행안내소의 문이 열리며 나이 지긋하신 해설사가 햇볕이 너무 뜨거우니 잠시 들어와 땀을 식히고 둘러보라고 권한다. 3평 남짓한 공간에 들어서자 “어휴 시원하다”라는 말과 함께 거짓말처럼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듯 땀은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영랑의 시집 등이 가지런히 책장에 꽂혀 있고, 생가를 안내하는 홍보물이 놓인 공간이 눈에 찬다.  ​​​존영과 가구가 소박하게 놓여 있는 방​​시인의 감성 느낄 수 있는 영랑생가“고맙다”는 말과 함께 “생가의 관리가 잘 되어 있다”고 첫인상을 얘기하자 모란이 필 때면 이곳을 찾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라서 “시인의 감성이 숨결로 다가오는 기분을  느끼고 가라”고 한다. 그래서 일까. 금세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접한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생가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는 책을 읽는 소년과 소녀, 그리고 이를 지긋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조형물이 정겨움을 주고,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비가 발길을 머물게 한다. 영랑의 존영이 놓인 방은 소박한 가구 몇 점을 통해 당시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시루와 물동이 등 투박한 옹기와 맷돌이 터를 잡은 장독대에도 ‘누이의 마음이 나를 보아라’라는 영랑의 시비가 시선을 끈다.  ​ 영랑생가 정원 풍경​​장독대 곁에 ‘누이의 마음이 나를 보아라’ 시비가 있다​안채에 돌아서니 대마무가 그늘을 내어주는 계단을 통해 세계모란공원과 맞닿아 있다. 꽃 중의 왕이라는 모란을 주제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세계 모란들을 심어놓은 곳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모란왕도 대구에서 기증을 받았고, 연중 모란을 피게 하는 기술을 개발해 사철 볼 수 있고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사계절 모란원도 조성했다. 공원의 정자에서는 강진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양한 모란을 모아놓은 세계모란공원​영랑생가 곁에 위치한 시문학파기념관은 1930년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던 영랑 김윤식과 정지용, 용아 박용철 3인의 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이 발행한 ‘시문학’은 당대를 풍미했던 프로문학과 낭만주의 문예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이 땅에 순수문학을 뿌리내리게 한 모태가 됐다. 이들을 포함해 1930년대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던 문학 동인회 시문학파 9명이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시문학파기념관이란 공간에서 다시 만나 순수 서정시의 진수를 선사하고 있다. ​ ​시문학파 9명을 기리는 시문학파기념관 ​박용철, 정지용, 김윤식의 상​​전라병영성과 하멜기념관시문학파기념관에서 20여 분 거리의 ‘전라병영성’은 1417년부터 1895년까지 조선왕조 500 년 동안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하던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불타고 갑오개혁으로 폐영, 지휘부의 건물과 유적이 소실돼 성곽의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지속적인 복원사업을 통해 성문과 성벽이 거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성곽의 길이는 1km가 조금 더 되는데 그 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공허한 현재와 역동적이던 당시가 겹쳐지는 묘한 여운과 마주한다.네덜란드의 상징 풍차가 반겨주는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인 핸드릭 하멜을 기념한 곳이다. 하멜은 동인도회사의 선원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후 감금되었다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다시 붙잡혔다. 효종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온 하멜의 지식을 높이 사 훈련도감에서 일을 하도록 했고, 그 후 전라병영성으로 유배를 보내 7년을 머물렀다. 하멜기념관은 당시 그가 타고 왔던 배인 스페르 베르호를 상징하며 전시실은 5개 주제로 유물 15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 ​​하멜기념관에는 핸드릭 하멜 관련 유물 1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하멜기념관의 풍차​트레킹 코스로 사랑을 받는 가우도는 강진만의 8개 섬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다. 강진읍 보은산이 소의 머리에 해당하고, 섬의 생김새가 소에 다는 멍에와 비슷해 ‘가우도(駕牛島)’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두 개의 출렁다리로 연결됐는데 길이가 긴 쪽은 1km에 이른다. 섬의 2.5km의 ‘함께 海길’을 걷다보면 바람의 속삭임이 귓가에 들려오고 햇빛에 부서지는 강진만의 바다가 은비늘처럼 번쩍인다. ​그러다가 앞서 헤어졌던 영랑이 먼저 와서 환한 얼굴로 어깨를 내어주고, 넉넉한 그의 품에 기대면 다시 또 그의 시가 스치듯 지나간다. 해상복합낚시공원은 손맛을 즐기려는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곳이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하루 1만원이고, 낚싯대도 5,000원에 빌릴 수 있다. ​​가우도 출렁다리와 해상낚시공원 ​​가우도의 영랑 조각상가우도 해변가의 조각상​빠르게 조여 오는 시간의 사슬을 끊어낼까. 아니면 걸음을 재촉할까.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에 고민할 새도 없이 몸은 본능적으로 서두름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나폴리라는 애칭으로 사랑받는 마량항에 이르자 ‘낭만과 여유’에 이끌려 본능은 잠시 뒷전으로 물러선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다가서는 바다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늦추게 하고 그러다가는 결국 멈추게 만든다. 바다는 표정을 바꿔가면서 아낌없이 치장을 한다.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거북선 한 척이 상시 대기하는 전략적 요충지 마량포구는 앞에 까막섬이 수묵화처럼 떠 있고 고금도와 약산도가 든든하게 풍랑을 막아준다. 이곳에서는 지난 4월부터 매주 토요일 아름다운 항구를 배경으로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언젠가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을 노래가 초대가수의 마이크를 통해 객석으로 전해지면 박수가 터지고, 더 이상 흥을 참지 못하는 이들은 무대로 나가 몸을 흔들어댄다. 가수도 관객도 신이 났다. ​​마량포구 앞에는 까막섬이 그림처럼 떠 있다  마량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마량포구 공원​​볼거리, 먹거리 풍성한 강진에서의 하루무대 뒤편의 횟집과 간이음식점 등을 지나면 마량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작은 공원과 만나게 된다. 등대는 장난감처럼 앙증맞고, 돌고래 조형물을 파인더에 들여 놓으면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시간과 공간이 주는 사치랄까. 시간을 붙들어 매고 싶지만 해가 기울면서 그림은 질감의 깊이를 더해간다. 마량놀토시장은 ‘3최’를 다짐하는데 최고의 품질과 최고의 신선도, 그리고 최고로 저렴한 가격이 그것이다. 여기에 수입산과 비브리오균, 바가지요금이 없다는 ‘3무’가 더해진다. 관광지의 흔한 풍경인 호객행위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뉘엿뉘엿 기울어가는 해를 마주하며 길을 재촉하지만 이제 멈춰야 한다. 천년고찰 무위사와 호남의 3대정원이라고 하는 백운동 별서정원, 그리고 월출산 자락의 다원 등 아직도 갈 곳이 수두룩하고, 오감을 자극할 먹거리가 풍성한 강진. 하지만 이제 발길을 멈춰야 한다. 머물고 싶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풍경들이 바람처럼 스치듯 떠올랐다 자취를 감추는 아쉬움에 자꾸만 뒤돌아보게 된다. ​글과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중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특별한 주택, 토루(土樓) 2017-09-28
중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특별한 주택토루(土樓)우연찮게 토루를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예로부터 전란에 휘말릴 때가 많았던 허난성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해 복건성 산 속에 터를 잡았다. 이때 산적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한 주거형태가 바로 토루다. 토루의 이색적인 모습과 주변의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으로 이곳은 영화 촬영 장소로도 종종 이용된다.​​​​​우리나라의 서울 남산타워에 납품할 제품을 복건성 첸조우(泉州)에서 만든다. 제품이 완성단계에 있어 검수차 첸조우에 들렀다가 샤먼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 놓인 여행 안내서를 통해 토루(土樓:투로우)라는, 아주 오래된 주택이 있음을 알게 됐다. 얼마 전에 이우에서 광저우를 가는 비행기 안에 비치된 잡지에서 보았던 주택이다. 구조가 참 특이해서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다니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마침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해서 여행사에 전화를 하니 아침 7시 15분까지 자동차 검사소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초반부터 난항이었던 왕복 10시간 대장정같은 복건성 내에 있다지만 토루가 있는 난징(南靖: 강소성의 난징과 다른 난징)까지는 꽤 먼 거리다. 가이드 말로는 왕복 10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그리 녹록한 여정은 아니다. 그런데 출발부터 갈 길이 더욱 험난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 ​버스를 타고도 왕복 10시간의 대장정이었다​​샤먼을 출발한 지 1시간쯤 되었을 때 버스는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어느 작은 마을 지나고 있었다. 화장실을 들른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 뒤 공장처럼 생긴 건물로 된 휴게소에 도착했다. 2층에 있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안으로 들어서니 건물 전체가 생고무로 된 베개와 매트리스를 파는 매장이었다.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이곳을 지나야만 버스를 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니 꼼짝없이 갇힌 신세다. 청산유수의 안내원이 생고무 베개와 매트리스의 장점을 소개하고 이를 체험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곤 많은 판매원이 관광객들에게 달라붙어 각개전투하듯 베개와 매트리스를 권한다. 여행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상품을 강매하는 것을 보니 오늘 얼마나 더 시달려야 할지 짜증이 앞선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2층에서 내려오니 미로처럼 된 길을 따라 수입 커피와 코코넛 등 식품을 파는 매장이 있고 이어서 기념품을 파는 매장이 나온다. 그냥 나갈 수도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앞 사람을 따라 길고 긴 길을 돌고 돌다보니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지쳐 버린다.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의 시작은 쇼핑부터 시작된다​​​생고무로 만든 베개와 매트리스 매장​​​여행을 하다가 이런 상품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런 나의 추측을 뒤집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구매했다. 잔뜩 산 물건을 어떻게 가지고 돌아갈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계산대 바로 뒤에 택배회사가 자리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여행객들을 상대로 상품을 파는 이들의 장사 수완이었다. 19세기의 비단 장사 왕서방은 저리가라였다. 마지막 순서는 음료수와 과일 매장이었다. 하긴, 한국에 오는 중국 관광객들도 이런 식의 여행패턴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싶다. ​중국인들의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면서 중국의 여행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작년 해외여행을 떠난 중국인들이 1억2,200만 명이나 되고, 중국 내 여행객도 44억4,000만 명에 이른다 하니 세계 여행업계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규모다. ​중국은 외국과 외교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무기로 활용해 상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2015년 홍콩에서 우산혁명이 발발하자 중국 관광객들의 홍콩행을 금지시켰다. 또한 대만에서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자 여행 자제를 독려했다. 실제로 작년 400만 명을 넘어섰던 중국인들의 대만 여행이 올해는 250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사드 문제가 불거진 우리나라도 비슷한 상황이다. 중국의 인해전술이 실감나는 부분이다.​나를 포함해서 38명이 탄 관광버스는 수없이 많은 산과 터널을 지나 쉬지 않고 달렸다. 토루로 가는 길은 험준한 산악 지형의 연속이었다. 한계령과 같은 산을 수없이 지나치는데, 도로 옆은 천 길 낭떠러지다. 만약 이곳에서 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뼈도 추리기 어렵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려온다. 산에는 유자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가파른 산등성이를 깎아 일구어 놓은 차밭이 보인다. 복건성은 열대 기후이기 때문에 바나나, 파인애플 등 많은 열대 과일이 생산된다. 또한 운남성과 함께 차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복건성을 대표하는 차로는 태관인(铁观音)이 있다. ​전란이 만들어낸 독특한 주거문화토루가 있는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점심시간이 되었다. 가이드는 토루 형태로 지어진 호텔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번에도 역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기 전 입구에 있는 찻집에서 차부터 마셔야 했다. 물론 말로는 무료 시음 코너라고 하지만 차를 팔기 위함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토루가 형성된 마을은 일년 내내 물이 흐르는 깊은 산속에 조성되어 있다 ​​ 가는 곳마다 차를 마시는 행사를 가졌다. 현대판 비단 장사 왕서방들이다​​앉아서 차를 마시는 동안 차가 좋은 이유, 차를 마셔야만 하는 당위성을 듣다보면 차를 사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선 돈을 내고 여행을 하더라도 이렇게 물건을 사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래서 피곤하다. 그러면서도 정작 식당에서 제공하는 밥은 너무 허접하다. 배를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수준. 식당에서 관광객들에게 식사를 공짜로 제공하는 대신 차와 담배를 파는 공생관계다. 그래도 불평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식사를 하고 다시 갈 길을 재촉하는데 인근의 마을이 모두 토루와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다만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전에 잡지에서 본 토루의 모습은 모두 원형이었지만 이곳에 산재해 있는 건물들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원형이 가장 많았지만 직사각형과 정사각형도 있다. 토루의 역사는 7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런 식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복건성 출신이 아니라 모두 허난성(河南省:하남성)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들이 쓰는 언어 또한 복건성의 민난화가 아닌, 오래전에 중국에서 쓰던 말이라고 한다. ​​​보기엔 별로이지만 방어에는 완벽한 구조의 주택이다 토루는 원형뿐만 아니라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의 구조로 되어 있다 ​등을 토루 형태로 만들었다​​허난성은 중국의 중원에 위치하고 있다. 예전부터 중국을 차지하려면 중원을 장악해야 한다고 해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허난성의 소림사가 유명한 것도 전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술을 연마하면서 부터이다.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길에 오른 허난성 사람들은 깊고 깊은 산속에 자리를 잡았다. 깊은 산 속 누구도 침범할 것 같지 않은 안전한 장소에 정착 한 셈이다. 그런데 평화롭기만 할 것 같던 산속 마을에도 침입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산적들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에 겨워하던 이들에게 산적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악귀와도 같은 존재였다. ​가족과 이웃들을 산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 바로 토루다. 토루의 구조는 외부의 적이 침입할 수 없게 완벽하게 지어져 있다. 워낙 튼튼하게 만들어져 문을 걸어 잠그면 절대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대부분의 토루는 4층으로 지어졌는데 구간을 나누어서 한 가정이 4층을 모두 쓰는 구조로 되어 있다. 1층은 주방, 2층은 창고, 3층과 4층은 침실이다. 침실이 3층과 4층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보통 한 집에 3세대가 살았기 때문이다. 토루는 흙을 사용해 지었지만 밑 부분은 돌을 이용해서 쌓고 지붕은 기와로 마무리해 건축미를 살렸다. 여기에 건물 앞 쪽으로 배수로를 두어 비가 많이 와도 잘 빠지는 과학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큰도시로 떠나 빈 곳이 많다 ​토루 안쪽으로 들어서니 상당히 오래 되었음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시설이 낡았다. 일부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있었다. 건물 외부는 흙으로 쌓았지만 안쪽은 나무를 엮어서 방을 만들었다. 좀 불편하기는 해도 이보다 안전한 장소는 없었을 듯하다. ​​​많은 토루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져 가고 있다​​가장 큰 문제는 물이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한동안 안에서 지내며 이들이 물러갈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음식과 물의 확보가 관건이다. 그래서 토루 안에는 반드시 우물이 있다. 이런 정황으로 살펴볼 때 물이 있는 지역을 골라서 토루를 지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홍수를 막기 위해 하단부에는 돌을 이용해서 지반을 다졌다​토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물이다. 물이 있는 곳에 토루를 지었다​그리고 모든 토루의 건물 안쪽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곳 사람들은 독실한 불교신자들이다. 복건성 사람들은 중국에서도 광동성과 함께 종교에 가장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객지에서 전란을 피해 먼 길을 온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지켜줄 뭔가가 절실했으며, 이들은 집안에 부처를 모셔 둠으로써 마음의 안위를 찾았으리라. ​​​안쪽에는 부처상이 놓여져 있다. 객지에서의 생활에서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토루의 주인. 웃음 속에는 넉넉함이 있어 보인다 ​​사람들 떠나간 토루에는 장사꾼들이토루는 복건성 짱조우(漳州)와 롱옌(龙岩)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주위를 살펴보니 마을 전체가 토루로 지어져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도 대단히 많다. 이들 모두 허난성에서 옮겨온 사람들이니 허난성이 얼마나 전쟁이 많던 지역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허난성은 쓰촨성(四川:사천)과 함께 중국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1억이 넘는 지역이다. ​언뜻 보아서는 토루의 건물 구조가 독특해서 사람이 사는 건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한때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토루가 중국의 특별한 군사시설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고. 첩보 위성으로 찍은 사진을 분석해 보니 진기한 모양의 건물들이 엄청나게 산재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내가 보기에도 군사 연구소 같기도 하고 미사일 기지 같기도 한 특이한 건축 구조이다. ​​​한때 미국 정보기관에서 중국의 군사시설로 착각했던 토루다 ​​토루가 근래에 알려진 것은 깊은 산골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토루가 지어진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첩첩 산중이다. 오래전에는 이곳을 왕래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속도로가 발달한 현재도 큰 도시에서 차로 3시간 이상 걸리니, 도로가 없었던 시절에는 몇 날 며칠은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덩사오핑의 개방정책 이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토루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늘어 이제는 대부분 나이 지긋한 노인네들만이 살고 있다. 워낙 외진 곳에 위치한 데다 그리 살기 편한 구조도 아니어서 젊은 세대들이 살기에는 적절치 않았던 것. 그래서 요즘은 관리가 되지 않는 토루가 늘어나 금이 가고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는 건물이 더러 눈에 띄었다. ​​​세월의 흔적은 지울 수 없는 법. 일부 토루는 금이 가고 비바람에 패어 간다​​​거주공간으로는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다. 살기 위해 이렇게 지을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안타깝게 여겨진다​​토루의 주인들 대신 장사꾼들이 이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토루 안에 들어서면 차를 대접하기 위한 탁자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차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물론 차는 무료로 제공되지만 자신들의 차가 중국 어느 곳에서 생산되는 차보다 훌륭하고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결국 차를 사 달라는 뜻이다. 차 이외에도 각종 기념품과 담배를 팔고 있다. 이날도 이곳에서 재배한 담배 잎으로 즉석에서 담배를 말아 판매하고 있었다. 원래 담배는 국가에서 관리를 하는데 이곳에서 만든 담배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것인지 모르겠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담배를 말아서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다​​토루에 도착하자 이 지역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관광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안 그 가이드는 처음에는 내게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실 토루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귀찮은 내색 없이 대답을 꼬박꼬박 해주던 안내원은 내가 차를 사지 않자 갑자기 냉정한 태도로 돌변했다. 급기야 내가 질문을 해도 나중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관광객들이 가게에서 상품을 사면 가이드에게 일정의 수수료를 지급하게 되어 있는 것이 관광업계의 불문율이다. 내가 차를 사야 자신한테 돈이 들어오는데 그러지 않으니 괘씸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필요 없는 차를 억지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전날 샤먼에서 태관인을 2봉지나 샀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아무리 내가 차를 사지 않은 것이 섭섭하다고 하더라도 180도로 돌변하는 그녀의 태도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는 장사에 혈안이 되어 정작 안내해야 할 장소를 그냥 지나치기도 했다. 토루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는데 장삿속에 시간이 쫓겨 그냥 지나치고 만 것이 못내 아쉬웠다.   ​​ 토루의 현지 안내원. 물건 파는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마을 전체가 토루이다 보니 좀 답답한 느낌도 든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토루의 둔탁한 모양과 조화롭지 못한 것. 하지만 깊은 산중에 있어 일년 내내 맑은 물이 마을의 냇가를 거쳐 흘러 내려가며,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대나무와 울창한 열대림이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낸다. 이런 멋진 풍광 때문에 가끔 영화 촬영 장소로도 이용된다. 2006년 소개된 ‘윈수야’(云水谣: 옛 고을의 이름)라는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내리는 깊고 깊은 산속에 토루의 터를 잡았다​아름다운 풍광은 영화 촬영지로도 인기다​​돌아오는 길에 만난 의외의 복병마지막으로 난징에서 가장 크다는 토루를 관람했다. 높이가 25미터나 되는 직사각형의 웅장한 건물이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일부 벽에 금이 가기는 했지만 내부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4층짜리와 달리 여기는 5층이었다. 토루는 기본적으로 가운데가 텅 빈 공간이고 벽 쪽으로 방이 만들어진 형태인데 이곳은 내부가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다른 토루와 같이 1층은 주방, 2층은 창고이고 나머지 3개 층이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대가족을 위해 설계된 듯하다. 안쪽에는 역시나 불상이 모셔져 있고 우물이 여러 개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그 자체가 하나의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 후난징에서 가장 크다는 직사각형의 토루. 높이가 25미터에 이른다 ​큰 구조의 토루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살았으니 한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대로부터 전란이 많았던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을 막았다. 또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토루를 지어야 했던 중국인들의 처절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토루는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의 주택이다. 비록 먼 길을 왔지만 실제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독특한 볼거리가 주는 감동에,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남부의 8월은 덥다. 무덥고 습한 날씨는 사람을 금방 지치게 만든다. 토루를 돌고 나자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힘들고 목이 말랐지만 진기한 토루를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만족스런 하루였다. 샤먼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다행히 쇼핑 코스가 없었다. 그런데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샤먼 톨게이트에 도착하니 차들이 엄청나게 밀려 있고,  톨게이트가 끝나는 지점에서 검문검색을 하는 경찰들의 모습이 보였다. 모든 차들이 정차한 뒤 신분증을 제시하고 트렁크를 열어 경찰의 검색을 받는 사이 승객들도 버스에서 내려 임시로 마련된 검색대를 지났다. 한 명씩 신분증을 확인하고 검색대를 통과했는데, 9월 샤먼 시에서 열리는 브릭스(Brics) 정상회의로 인해 검색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란다. 브릭스는 신흥 경제 5개국으로 브라질과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말한다. 어쨌건 검색대를 통과하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허긴 작년 항저우에서 개최된 G20 회의를 위해 회의장 인근 주민 3만 명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킨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시민들의 불편 따위 개의치 않는 중국정부의 스타일에 다시한번 놀라면서 토루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글 사진  양인환​700년의 역사와 현대의 상징인 코카콜라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강진(上) 2017-09-07
다산 정약용의 숨결과 발자취를 오롯이 만나는강진(上)​초당의 툇마루에 앉으니 동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로 인해 어두컴컴하다. 오른편으로 다가서자 거짓말을 보태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연못, 연지석가산이 시선을 끈다.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키우던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냈다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발길을 돌리기가 아쉽다면 2014년 문을 연 다산기념관에서 채울 수 있다. ​​​키가 작은 구릉과 너른 들의 끝자락이 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시 포개어지며 지는 해의 기운을 빨아들일 즈음, 강진읍내의 가로등이 하나 둘 기지개를 켠다. 발길이 드문 소도시지만 버스터미널은 광주와 목포, 순천 등에서 차가 도착할 때마다 대처로 나갔던 이들이 하나 둘 땅을 딛고 걸음을 재촉한다. 여정의 끝이어서일까, 노곤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서도 그들의 눈망울은 곧이어 하늘에 지천으로 깔릴 별처럼 초롱초롱하다. 아마도 그리운 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일 게다.2010년 10월 전남 영암의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KIC)에서 국내 최초로 세계 모터스포츠의 최고봉인 ‘F1 코리아 그랑프리’가 열려 처음으로 강진을 찾았을 때의 풍경이 떠오른다. 국내외 팬들이 몰려들었지만 목포와 영암 일원에는 이들을 수용할 숙박시설이 한참 모자랐다. 값은 평소보다 2~3배가 뛰었고, 그나마 자리를 잡기도 불가능해 도심에서 조금씩 떠밀리어 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강진이나 장흥을 지나 보성과 순천에 숙소를 정하는 게 나았다. 마침 일정보다 하루 더 일찍 내려왔기에 저 멀리 순천의 송광사를 둘러보고, 벌교에서는 태백산맥의 소화를, 보성의 녹차밭 대한다원 등지를 쏘다녔다. 그러다 멈춘 곳이 강진이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땅거미가 올라오자 한 몸 쉬어갈 곳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고, 몸은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난 그냥 강진에 갈 뿐이다”강진은 F1 그랑프리의 여파에서 비켜선 듯했다. 읍내의 숙박시설은 여유가 있었고 값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짐을 풀어놓을 것도 없이 그대로 방에 던져 놓은 후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시내를 둘러보았다. 도시에서는 초저녁이라고 해도 좋을 때임에도 일찍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간판은 한 집 건너 불을 내렸고 불이 켜진 곳도 이내 어둠의 대열에 합류했다. 가로등 불빛이 점점 더 밝기를 더해가는 것과 비례해 저녁을 건너뛰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오던 기억이 새롭다.  강진. 코리아 그랑프리가 열리기 전까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낯설고 조그만 도시는 유흥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빛바랜 사진처럼 다가서고 있었다. 유 교수는 “조용하던 시골은 은둔자가 낙향을 했던 곳이었거나 유배객의 귀향지였을 뿐”이라면서도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 있는 역사의 채취가 살아 있다”고 이 땅을 소개했다. 그리고 당시 그와 함께 답사를 했던 제자들은 “마치 꿈결 속에 다녀온 미지의 고향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한해에 수십여 차례 목포(숙소가 있는 곳)와 영암 서킷(KIC)을 오가지만 강진과의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다. 가끔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질문을 해도 좀처럼 답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여름, 일을 핑계로 강진행을 단행했다. 단지 일탈이라는 이름으로……. 모처럼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한 가족여행. 서해안고속도로에 차를 올린 후 목포 톨게이트를 통과할 무렵 해넘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멈춰야 했다. 세상은 곧 어둠의 망토를 두를 것이고, 무엇보다 아내와 아들이 더 이상 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목포에서 맛집으로 제법 이름을 알린 옥암로의 ‘별 스넥’에서 병어회로 저녁식사를 한 후 평화광장으로 나갔더니 분수 쇼가 한창이다. 음률에 맞춰 무희처럼 흐느적거리다 다시 휘감아 돌고 격하게 수직으로 물줄기를 뿜어 올린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은 신이 났고, 연인들은 아름다운 시공간을 마음껏 음미하며 추억쌓기에 여념이 없다. 이튿날, 서두른다고 그렇게 재촉을 했음에도 해는 이미 중천에 걸렸다. 이곳에서 다산초당까지 거리는 50여km에 불과하나 시간상으로는 1시간이 걸린다. 남해고속도로는 한산했다. 강진IC를 빠져나온 후 강진군청으로 방향을 잡으니 내비게이션이 친절하게 길을 안내한다. 창밖은 더 이상 짙어질 수 없는 벼와 잡풀들이 뽐내듯 다투는 녹색의 향연과, 이에 질세라 푸르고 깊은 하늘, 그리고 시뻘건 백일홍이 드문드문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창문을 열자 한여름이 무서운 기세로 몰려들어 차안이 후끈 달아오른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안내하는 이정표 ​​강진 초입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지척이다. 동백나무와 삼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등이 제공하는 짙은 그늘에 얽히고설킨 나무의 뿌리들이 마중을 나왔다. 정호승 시인은 ‘뿌리의 길’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노래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지하에 있는 뿌리가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중략)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그렇게 오른 다산초당(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다)은 초가가 아니라 기와를 올렸다. 본디 초가였던 것을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반뜻하게 지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은 윤씨 집안의 서당으로 쓰이던 이곳에 놀러왔다가 아늑하고 조용하며 아름다운 경치에 반했다. 이에 시를 지어 머무르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10여 년을 이곳에서 머문 다산은 18명의 제자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을 썼다.  ​초당의 툇마루에 앉으니 동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로 인해 앞이 막혀 어두컴컴하다. 오른편으로 다가서자 조금 과장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연못이 시선을 끈다. ‘연지석가산’으로 불리는데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이곳에 잉어도 키웠는데, 잉어의 움직임을 보고 날씨를 알아냈다고 한다. 그곳에서 한 걸음을 더 나가면 백련사로 가는 길로 이어진다. 길이는 1.0km 정도지만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부담감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산초당에는 ‘다조’와 ‘丁石’ 등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 연지석가산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라는 뜻이다 ​​다산초당의 부족함 기념관에서 가득 채워 다산의 숨결을 느끼지 위해 찾은 다산초당. 하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이게 다일까? 다산은 이렇게 초당에서 훗날 자신의 발자취를 찾아올 후인들에게 잠시 땀이나 식히고 가기만을 원했을까?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불볕더위에 숨이 턱 막혔고, 연신 흐르는 땀을 훔쳐낸 손수건은 흥건했다. ​그러나 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산기념관’이라는 이정표가 이끄는 곳으로 향하자 그곳에 다산이 있었다. 이곳은 강진군이 다산의 유배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다산초당 아래에 세운 것으로 2014년에 문을 열었다. 기념관 입구에 제자를 가르치는 다산의 모습을 모형으로 제작해 놓았고, 벽면에는 “아래로는 백성을 두려워하고, 위로는 감찰기관을 두려워하고, 그 위로는 조정을 더 두려워해야 하고, 또 그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목민관이 경계해야 할 4가지가 새겨져 있다. ​​다산에 대한 갈증은 다산기념관에서 채울 수 있다​ 기념관 입구에는 다산과 제자들이 공부하는 장면을 모형으로 보여준다​ 다산이 축저한 수원 화성 모형​다산의 각종 저술과 당시 교류했던 학자들의 별첩과 간찰들이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은 다산이 공부하던 어린 시절부터 관료생활 시절의 모습들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다산을 총애하던 정조의 죽음과 뒤이은 유배로 강진에 머무른 과정 등도 동영상으로 알기 쉽게 재현해 놓았다. 기자는 특히 부인과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오롯이 담겨 있는 ‘하피첩’과 ‘매화병제도’에 시선이 고정된다. ​결혼한 지 30년, 유배 간 남편과 헤어진 5년 후 다산의 부인 홍씨는 시집올 때 가져와 장롱 밑에 넣어둔 붉었던 치마를 남편에게 보낸다. 세월이 흘러 빛이 바랜 그 치마는 여인의 모든 것으로, 남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이 묻어 있었다. 이에 다산은 치마를 마름질해 여러 폭으로 나눠 두 아들에게 경계의 말을 적어주었다. ​이것이 ‘하피첩’이고, 남은 치맛자락에 유배생활로 12년 동안 보지 못한 딸의 결혼을 축하하며 매화 꽃가지 위에 정다운 멥새를 그려 선물한 것이 ‘매화병제도’다. 이밖에 기념관은 다산의 일생과 주변 인물들을 그림과 동영상, 조형물 등으로 제작해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친근감 있게 만들었다. ​​​관료생활을 하던 때의 모습​다조에서 차를 즐기는 다산의 모형 ​시집가는 딸에게 선물을 한 매화병제도​두 아들에게 보낸 하피첩과 경직의방 다산기념관에서 자동차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백련사’가 있다. 통일신라 문성왕 1년(839년)에 지어진 이 사찰은 고려후기에 8국사와 조선후기 8대사를 배출했다고 한다. 백련사의 동백나무 숲은 크기도 어마어마해 5.2헥타르의 면적에 7,000여 그루가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통일신라 문성왕 1년에 지은 백련사 ​ 백련사 대웅전 옆에 활짝 꽃을 피운 백일홍​ 백련사 한 전각의 실내 ​ 숲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됐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까지 이르는 300m의 비탈길은 오래된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그리고 비자나무가 도열하듯 늘어서 햇빛을 걸러낸다. 대웅전에서는 예불 올리는 승려의 독경과 목탁소리가 은은하다. 그 곁에는 수백 년의 세월동안 뿌리를 내렸을 백일홍이 단청 고운 처마와 수시로 바뀌는 하늘빛, 그리고 저 멀리 강진만의 물결과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백련사 경내로 오르는 길 백련사에서 훤히 보이는 강진만의 풍경​아직도 강렬함을 잃지 않는 햇빛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시장기가 슬슬 고개를 내민다. 오늘의 메뉴는 강진에서 한정식으로 유명한 ‘남문식당’. 하지만 자리가 없다. 한껏 기대하고 갔는데, 헛물을 켜고 말았다. 허탈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한 손님이 생선구이 정식을 하는 식당을 소개해준다. 돌솥에 밥을 해서 내놓고, 고등어와 열기, 전어 그리고 갈치를 구워서 내는 집이었는데, 정갈하고 깔끔한 맛에 감탄이 저절로 일었다.(다음호에 계속)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강진읍내의 생선구이 정식집의 상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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