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하나씩 배워가며 타는 즐거움 곽풍영<사진작가&g.. 2004-05-11
앗! 기다리던 로버 미니 부품이 멀리 영국에서 도착했다. 주문한 지 1주일만에 도착한 이번 부품은 반짝거리는 실내외 크롬 파트다. 이제 미니의 모습을 확 바꿔줄 차례다. “이 차 몇 년형이에요?” “얼마짜리예요?” “몇 cc짜리죠?” “밟으면 몇 킬로까지 나가요?” 아파트 주차장에서 튜닝 파트를 이리 저리 대보며 궁리를 하고 있다보면, 물어보는 사람들의 질문은 다 똑같다. 하나하나 답을 하다보면 언제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대목이 있다. “에어컨 있어요?” “에어컨 없는데요.” 바로 이말 한마디에 모두들 휙 뒤돌아서 가버린다. 가면서 내뱉는 말. “아니, 에어컨 없이 어떻게 여름을 난다는 거야. 기가 막히는군.” 그러고 보면 그동안 내가 탐닉한 클래식한 앤틱 자동차들은 모두 하나같이 에어컨이 없지 않았던가. 여름에 더우면 아예 밖에 나가지 않았고, 비가 올 듯 하늘이 꾸물거리면 하던 일 멈추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달려오기 바쁘지 않았던가……. 내가 클래식한 차에 푹 빠져든 것은 호주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다. 호주에서 1억 원이 넘는 ‘부포리’라는 수제차를 렌트해 여행 내내 차만 몰고 다녔다. 부포리는 호주에서도 흔치 않은 희귀차로, 여행 중에 만난 호주인들조차 자신의 나라에서 이런 차가 생산되느냐고 되물었다. 신혼여행 기간 내내 폭스바겐 비틀이나 로버 미니, 시트로앵 2CV, 포르쉐 911 등이 세워져 있으면 차를 세우고 그 옆에 서서 기념촬영하기에 바빴다. 호주에서 앤틱카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호주에서 보았던 앤틱카 한 대를 산 다음 고치면서 타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IMF 때 아끼던 73년형 폭스바겐 비틀을 반값에 팔 수밖에 없었던 기억은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제값을 받지 못하고 팔거나 차값보다 많은 비용을 들여 마련했던 부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오래된 차를 정비하면서 그 많은 시간을 차 밑에서 보낸 기억이 너무나도 소중했기 때문이다. 앤틱카에 관한 꿈은 포르쉐 550 스파이더를 갖게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올드 포르쉐는 폭스바겐 비틀과 메커니즘이 비슷해 안타깝게 보낸 비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고, 그때 익힌 정비실력으로 올드 포르쉐를 관리하는 일도 쉬웠다. 사실 550 스파이더는 매력 넘치는 스타일을 지녔지만, 차고가 낮아 엉성한 도로를 달릴 때는 불안하고 톱이 없어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 차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차장에서 닦고 조이는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재미있게 탄 올드카는 1984년형 K-111 군용 지프였다. 원초적인 메커니즘과 뛰어난 개방감, 그리고 탁월한 오프로드 성능으로 인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어디를 다니더라도 부족함이 없었다. 오리지널 군용 지프인 K-111은 이미 오래 전에 단종 되었지만 뛰어난 오프로드 성능으로 인해 전방에서는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고 한다. 군용차라 부품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만 서울 종로에 나가면 원하는 부품은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다. 더군다나 정비도 간단해 K-111은 내가 몰았던 가장 경제적인 올드카인 동시에 지금도 가슴속에 가장 많이 남아있는 차다. 지금 타는 차는 96년식 로버 미니다. 미니 역시 해외에 부품을 주문하고 정비책자를 보면서 메커니즘을 익히는 재미가 쏠쏠하다. 새차를 타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즐거움을 모르고 지나치는 것 같다. 아니 자동차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에어컨을 기본으로 달고 나오는 새차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로버 미니를 단지 에어컨이 없는 낡은 차로만 보는 이들이 올드카를 닦고 조이며 관리할 때 느끼는 행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주차장 드라이브’의 추억 장영일<영화 감독&g.. 2004-05-11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처가살이를 할 때다. 집사람의 성화로 운전면허증을 따려고 면허시험을 몇 번 보았지만 계속 낙방을 했다. 정확히 필기시험은 네 번만에 통과하고 실기는 두 번 가량 떨어졌다. 당시 아내는 단 한번에 운전면허를 따서 오너가 된 지 몇 해가 지난 뒤라 나에 대한 무시가 어지간했다. 아내는 나에게 “천재 아니면 바보라고, 어떻게 운전면허시험을 수 차례에 걸쳐 몇 년을 두고 보느냐”고 했다. 어느 봄날 늦게 일어나 보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어딜 갔는지 다들 외출하고 차고에는 승용차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기회는 이때다’ 생각하고는 차에 들어가 실기연습을 시작했다. “부르릉”, “키익”, “철커덕” 목소리로 자동차 모는 흉내를 내며 실기연습을 하다가 실감이 나지 않자 사이드 브레이크만 걸어놓으면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기억을 살려 사이드만 걸어놓고 실제로 시동을 걸었다. 차는 꿀렁꿀렁 움직였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아, 나는 신나는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다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해 올라오는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순간적으로 액셀 페달을 힘껏 밟았다. 집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차가 굉음을 내며 돌진하다 차고 문에 걸렸다. 사이드 브레이크가 풀리며 차가 앞으로 튀어나간 것이다. 조용하던 집에 난리가 났다. 대문 밖으로 나와 차고 문을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철제 차고 문은 반쯤 찌그러져 있고, 차는 차고 밖으로 머리를 반쯤 내밀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난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장인어른이 오기 전에 빨리 이 상황을 수습해야한다는 마음에 동네 수퍼 아저씨, 전기 재료상 주인, 철물점 아저씨를 찾아가 돈이 얼마 들지는 생각말고 빨리 원래대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동네 사람은 하나 둘 모이고 혀를 차는 사람, 재미난 듯 바라보는 사람 등 표정들도 다양했다. 하지만 남들 시선에 아랑곳없이 나는 계속해서 큰길을 바라보며 장인어른이나 처가댁 식구가 오지 않나 눈치를 보며 아저씨들을 재촉해 겨우 차고에 차를 집어넣고는 부리나케 영화사로 도망갔다. 다행히 그 사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덮어졌다. 가끔 장인어른이 차고 문이 이상하다고 할 때마다 심장에서는 브레이크 걸리는 소리가 났다. 가끔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당시 상황에 가끔 미소를 짓는다. 자동차는 연습이 없는 움직이는 실제상황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다. 문득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그 비밀을 지키고 있는 동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리 없는 진동을 느낀다
운전 속에서 인생을 배우다 .. 2004-05-11
학창시절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엄마가 내게 항상 하시는 말이 있었다. 운전을 하면 인생을 배운다고……. 어렸을 땐 엄마의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운전면허를 따고 매일 운전을 하게 되면서 나는 그 말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생사를 어찌 운전과 비교할 수 있겠냐마는 운전을 하는 속에서 여러 가지 삶의 이치를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 처음 자동차를 운전한 것은 대학시절. 도로연수도 받지 않고 혼자서 대담하게 서울시내를 돌았다. 가슴은 두근두근 뛰고 천천히 가면 뒤에서 빵빵거리지나 않을까, 이 교차로에서는 어떤 신호등을 봐야하는 걸까, 내가 지금 중앙선을 밟고 가는 것은 아닐까……. 핸들을 잡은 손은 떨리고 수시로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때 내 옆을 바짝 쫓아오던 버스가 있었다. 버스기사 아저씨가 나를 향해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초보였던 나는 영문도 모르고 계속 달리기만 했다. 사실 나에게 욕을 하는 것 같아 그 아저씨를 외면하고 싶었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시내 한복판에서 당장 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왔는데 그 버스기사 아저씨는 계속 내 차 옆에 붙어서 나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참 끈질기기도 하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고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난 그 기사 아저씨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아가씨 큰 일 나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내게 아저씨는 신호가 끝나 뒤차가 계속 빵빵거리며 재촉을 하는데도 “차의 보네트가 열려있으니 내려서 닫고 가라, 쌩쌩 달리다 보면 보네트가 갑자기 올라와서 큰일난다”며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 전에 기름을 넣을 때 어떤 것이 주유구인지 몰라 이것저것 누르다 보네트가 열렸던 모양이다. 차를 옆으로 세우고 조금 들떠 있는 보네트를 닫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그 버스기사 아저씨가 생각났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게 좋은 의도로 다가오는 사람에게도 먼저 경계심을 갖고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떤 이야기인지 정작 들어보지는 않고 표면적인 행동만을 보고 고개 돌리진 않는지, 나는 그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 버스기사 아저씨는 그 순간 내가 안전하게 운전하도록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오늘도 나는 밀리는 차선에서 인생을 배운다. 조금 더 빨리 가보겠다고 갓길에 끼어 들다가 딱지를 떼이는 많은 차를 보며 조금 먼저 가는 것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조금 먼저 가기 위해 다른 차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일이야말로 갖은 방법으로 남을 누르고 자신이 먼저 성공하겠다는 우리네 인생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두 번 끼어 드는 일은 어찌 보면 요령일 수 있고 운전을 잘 한다는 자랑일 수도 있지만 항상 그렇게 가다보면 언젠가는 꼭 딱지를 떼이게 되어 있다. 과속이든 끼어들기든 어떤 이유로든 말이다. 핸들을 잡는 순간, 나는 도로 위의 지도가 아니라 또 다른 인생의 지도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도착하느냐도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이다.
20년 자동차 편력이 남긴 추억 최용남<치과의.. 2004-04-07
지금은 20대의 청년이 되어버린 우리 큰 아들이 옹알이를 할 무렵인 1982년 10월. 당시 180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던 3년 된 중고 포니는 그 후 20년 넘게 이어진 나의 자동차 편력기의 첫줄을 장식한 차가 되었다. 워낙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포니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내 여행의 동반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여행에 대한 의욕만 앞설 뿐, 운전과 차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던 나 때문에 우리 가족과 포니는 고생만 잔뜩 하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휴가를 얻어 온 가족이 지리산을 향해 출발했던 여행길이 그랬다. 하필 휴가기간이 장마철과 겹쳤던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지리산을 오르는 길은 포장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는데, 쏟아지는 비에 좁은 산길은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어쨌든 떠난 길이니 노고단은 올라야 할 것 아니냐는 생각에 오기로 차를 몰았지만, 천길 낭떠러지를 바로 옆구리에 끼고 몇번씩 휘청거리다 보니 갓난 아들내미와 아내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결국 노고단 정복을 포기하고 중간에 차를 돌려 내려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행을 즐기는 성격은 그 이후의 자동차 생활과 차 고르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포니와 포니2를 거쳐 프라이드를 구입했을 때의 일이다. 영월 부근의 산으로 여행을 갔다오는 길에 차 바닥이 긁히는 데도 아랑곳 않고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험한 길을 빠져나와 속도를 붙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차의 앞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했는데 소리는 점점 심해지고 연기까지 풀풀 나는 것이었다. 걱정은 됐지만 일단 집에는 가야겠다는 생각에 차를 몰아 집 부근의 카센터에 도착했다. 차를 둘러본 정비사는 “어떻게 차를 이렇게 몰았느냐”며 혀를 내둘렀다. 오일은 바닥나 있었고 엔진은 뜨거워져 늘어붙기 직전이었다. 차 바닥이 돌에 긁히며 엔진 오일 마개가 빠져버렸고, 길 위에 엔진 오일을 쏟아내며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었다. 그 이후로 몇 대의 세단을 구입했지만 나의 방랑벽을 오래 버텨내는 차는 드물었고, 결국은 SUV나 RV가 내 체질에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구입한 첫 SUV는 록스타 소프트톱 모델이었다. “여행의 낭만을 즐기려면 역시 천막차지!”라며 큰 맘 먹고 구입했지만, 벗기기는 쉬워도 씌우기는 어려운 소프트톱은 낭만보다는 괴로운 추억을 많이 안겨줬다. 네바퀴굴림차라고는 해도 차의 안정성이 떨어지고 속도도 붙지 않아 답답함도 느꼈다. 영동고속도로가 2차선이던 시절, 형님과 함께 새말에서 소사로 향하는 고갯길을 오를 때였다. 겨울이라 길이 미끄러워 천천히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오던 차가 미끄러지며 중앙선을 넘어와 록스타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놀란 것도 잠시, 내 차를 들이받은 그 차가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던 나는 불법 유턴을 해 도망가는 차를 뒤쫓았다. 그런데 내리막이라 가속이 붙을 만도 한데, 소프트톱이 찢어져라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아도 도무지 간격이 좁아지질 않았다. 결국 도망간 그 차는 잡지 못했고, 우리 형제는 미끄러운 그 언덕길을 다시 처음부터 올라야 했다. 그렇게 아픈 기억도 있었지만, 그 뒤로 구입한 SUV와 RV들은 나의 여행에 많은 즐거움을 더해줬다. 거친 운전에 빠른 속도를 즐기기는 해도 별다른 사고없이 즐거운 여행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좋은 차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SUV를 타고 있지 않지만, 몇 년 안에는 그동안 꿈꿔오던 세계여행을 온 가족과 함께 SUV를 타고 떠나고 싶다. Z
‘미스 장’의 애마 박경희<방송작가> 2004-04-07
친지분들이 즐겨 부르는 어머니의 별칭은 ‘미스 장’이다. 삶에 있어 젊은 사람 못지 않은 열정과 의욕을 갖고 계신다는 뜻에서 붙은 별칭이다. 칠순이 가까운 지금도 새벽이면 가이드 자격증 시험을 보신다고 일본어 테이프를 틀어 놓고 회화를 익히시고, 언제부턴가는 칠순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치매 예방에 좋다시며 컴퓨터 게임 매니아가 되셨다. 그리고 일주일에 몇 번은 한평생 교단에 계시면서 국어과목과 아이들의 상담교사를 하셨던 것을 활용해 도서관으로, 지역상담소로 자원봉사를 하신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뱃살과의 전쟁’이라며 수영도 열심히 다니신다. 어머니의 하루는 젊은 내가 봐도 숨이 가쁘다. 이렇게 바쁜 어머니의 가장 든든한 친구는 자동차다. 더 늙기 전에 따신다며 정년을 몇 해 앞두고 면허를 따시더니 월급을 모아 예쁜 소형차까지 사셨다. 퇴직 후 남은 시간을 여행으로 보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신 것이다. 주변에서는 환갑이 다 된 나이에 면허시험에 붙은 것도 대단한데 운전까지 직접 하냐며 “역시 미스장이야”를 연발했고 어머니는 그들의 말에 으쓱해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운전하고 다니시는 당신의 모습을 꽤나 즐기셨다. 그렇지만 자식들 맘은 어머니의 친지분들과는 영 다르다. 초보시절, 어머니가 차를 몰고 나가는 순간부터 식구들은 전화기 앞에 대기 상태였다. 하루에도 몇 건씩 날아드는 교통범칙금 스티커는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우체부조차 친한 이웃으로 만들어줄 정도였고 긴장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니시는 통에 저녁이면 늘 “아이구……” 하며 견비통을 호소해 사들인 파스가 또한 얼마인지 모른다. 더구나 주행 중 주변 자동차 흐름을 살필 여유를 채 갖추지 못한 초보인지라 여기서 쿵 저기서 쿵, 가만히 서있는 차에다가도 박치기를 하시는 통에 이제 어머니 보험료는 웬만한 젊은이의 한달 아르바이트 비용을 훨씬 능가한다. 그러니 그런 저런 모든 호소와 사건처리로 분주한 것은 자식들이다. 그렇게 보낸 3~4년. 이제 어머니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셨지만 초보시절 쿵쿵 내려앉던 딸들의 가슴인지라 지금도 나는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신경이 곤두서고 나도 모르게 해대는 조수석 잔소리에 모녀지간이 앉은 차 안은 매번 썰렁해진다. 자식들은 “왜 돈주고 사서 고생이시냐”며 운전대 놓기를 강요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끄떡 않으신다. 당신 차가 자식보다 낫다는 말씀으로 자식들의 기를 죽이신다. 어디든 당신이 가자는 곳이면 군말 없이 가주는 차가 효자라는 것이다. 삶이 바빠 늙은 어머니를 챙기지 못하는 딸들을 돌려서 나무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어머니 차의 별칭은 ‘미스 장의 애마’다. 엄마가 사랑하는 물건이어서 애마고, 자식들의 애간장을 태워서 또한 애마다. 다행히 겁 많고 꼼꼼한 성격 탓에 지금껏 어머니는 큰 사고 없이 초보 딱지를 떼셨고 이젠 자식들도 바쁘게 사시는 어머니 옆에 차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자식들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이젠 너무나 자랑스럽다. 이제 나나 친구들이나 마흔을 넘다보니 부모님들의 연세가 대부분 칠순을 넘나든다. 그 중 우리 어머니처럼 직접 운전을 하고 다니시는 분들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부모님들이 병원을 가실 때나 어디 외출을 하실 땐 자식된 도리로 하던 일을 접고 잠시 짬을 내서 모셔오고 모셔 가는 번거로움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건강하고 아직도 독립적인 나의 어머니가 부럽다고 한다. 나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또 하나의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도한다. “우리 엄마, 미스 장! 오늘 이 모습 그대로 오래오래 사세요.”
‘하나’부터 바꿔 나가는 자동차문화 김필수<대.. 2004-04-07
필자는 자동차 계통에 종사하다보니 자동차 및 교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도 큰 편이다. 길가를 지나가면서 ‘저 차는 어떤 차이고 특성이 어떻고……’ 생각하거나, 새로운 차를 보면 항상 새로운 궁금증에 수수께끼 풀 듯 고민을 하기도 한다. 또한 잘못된 교통신호체계나 상식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운전자를 보면 우리의 자동차문화에 대한 걱정이 앞설 때도 있으니,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다. 최근의 교통을 포함한 자동차문화를 보면 예전에 비해 많이 발전했다. 우리의 자동차문화를 아끼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도 선진 자동차문화를 이루려면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다. 운전을 하다보면 스스럼없이 창문 밖으로 쓰레기,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차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아직도 모자란 우리 자동차문화의 현주소를 보는 듯해 마음이 씁쓸하다. 지금은 음주운전의 위험성이 충분히 홍보되어, 술을 마실 때는 아예 차를 놓고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예전에는 웃지 못할 위험천만한 사례도 많았다. 필자와 가까운 친지는 얼마나 음주를 하였는지 어두운 8차선 도로를 달리다 깜박깜박 졸아서 순간적으로 노란 중앙선을 찾지 못해 무척이나 당황했다고 한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니 왼쪽에 있어야 할 중앙선이 오른 쪽 끝에 있더라는 것이다. 제 차선을 넘어 반대 차선을 고속으로 달리고 있었다는 얘기이니, 얼마나 끔찍한가. 그때 너무 놀란 이후로 다시는 음주운전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음주운전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이처럼 아찔한 상황을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이밖에도 바로잡아야 할 자동차문화는 분야도 다양하다. 올바른 자동차운전 등 교통안전문화를 비롯해 중고차 유통문화도 있고 차를 관리하면서 항상 접촉하는 정비문화도 있다. 특히 정비문화는 운전자뿐만 아니라 정비업자 모두 큰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다. 정비업의 영세적인 경영규모도 걸림돌이긴 하나, 정비인의 올바른 정비문화 정착은 필수적이다. 일부 정비인들의 잘못된 정비의식이 불신을 낳고 있다. 단순한 부품의 교환만으로 정비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유를 들어 뒤 트렁크 부위까지 수리하는 정비인들이 있다.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운전자들의 자가정비 의식 부재도 바뀌어야 할 부분이다. 운전자라면 단지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자가정비 마인드를 갖고 있어야 한다. 1년 이상 차를 몰고 다니면서도 냉각수 등 기본적인 소모품을 점검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보네트 하나 열지 못하는 운전자를 보면 우리의 자동차문화가 기초부터 부실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고차 유통부문의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주행거리를 조작하거나 사고차를 정상적인 차로 파는 예가 종종 있다. 이런 사례들이 중고차 유통문화의 수준을 깎아 내리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 하나부터 바꾸는 일’이다. 우리 모두 하나부터 다시 시작하자. 세계 자동차 생산 6위국에 걸맞은 자동차문화를 만들어 가자. 남을 탓하기 전에 내 자신부터 하나씩 바꾼다는 자세로 실천에 옮긴다면, 머지않아 우리 손으로 이룬 선진 자동차문화를 기분 좋게 느끼고 체험하는 시대가 찾아 올 것이라 믿는다.
한 시간의 자유 권경아<문학평론가> 2004-04-07
기다림은 초조함이다. 약속장소에서 누군가를 기다릴 때 온 신경은 그 사람에게 향해있다. 그 사람이 올 방향을 바라보며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을 살피다보면 신경은 곤두서고 눈은 곧 피로해져 잠시 멍하니 한 곳을 보며 진정해야 할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보다 더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약속시간에 늦는 것이다. 시간에 늦었을 때 허둥대다보면 무엇을 잊고 나가 다시 들어오기도 하고 가는 도중에도 계속 불안한 마음이라 좌불안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늦는 것보다는 기다림의 초조함을 선택한다. 이것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오로지 나 자신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약속 장소에 20~30분 정도 미리 도착하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다. 시간 가늠이 가능한 전철로 인해 항상 일정하게 20~30분 정도 일찍 나가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은 것이다. 10분전에 도착해도 되겠지만 그것도 불안한 일이다. 혹 전철이 연착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조금 늦어버리는 것이다. 30분이란 시간은 무엇을 시작하기에 조금 모자란 시간이다. 책을 펴들고 읽다가 이제 좀 집중이 되려하면 약속시간이 가까워져 그 사람이 올 방향을 힐끔거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은 차가 생기면서 조금 바뀌게 되었다. 한 2년 전쯤 동생이 차를 가져와 1년만 맡아달라고 했을 때 나는 면허를 따게 된 지 6개월도 되지 않았고 그 후로 차를 몰지도 않았던 왕초보였다. 그래도 성격이 겁이 좀 없는 편이라 바로 차를 가지고 다니게 되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시간 가늠이 되지 않아 도무지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약속 시간을 맞춰주는 전철과 달리 도로의 사정은 일정치 않아 막히게 되면 이건 대책이 없다. 또 주차의 문제가 있었다. 일찍 도착하더라도 주차 공간을 찾는 시간도 상당한 것이다. 그래서 차를 가지고 나갈 때는 평소보다 더 일찍 나가게 되었다. 한 시간의 여유는 이렇게 해서 생기게 되었다. 한 시간의 여유는 30분의 여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유였다. 길에 서서 언제 나타날지 모를 사람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던 초조함은 차안에서 약속시간 5분전까지 편안하고 느긋하게 책을 보기도 하고 다이어리를 꺼내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조용히 공상을 하기도 하는 여유가 된 것이다. 한 시간의 자유는 달콤한 것이었다. 일단 약속 시간에 늦지 않는다는 안도감이 심리적 안정을 주었고, 그 안정감으로 인해 차안의 조그마한 공간 속에서 여유롭게 이러저러한 공상을 할 수 있었다. 사실 그 시간에는 무엇인가를 한다기보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머리 속의 생각들을 정리하며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정신없이 지나가던 하루가 잠시 동안 멈춰버린 것 같은 그 시간은 무엇인가를 하는 시간이라기보다 무엇인가를 잊는 시간이었다. 이러한 자유에 익숙해질 무렵 갑자기 자유가 사라져버렸다. 맡겼던 차를 동생이 다시 찾아가 버린 것이다. 뚜벅이 생활로 돌아온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분주하게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가끔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한 시간의 자유가 그리운 것이다.
첫사랑 그녀와의 추억처럼 우인재<DVD 칼럼니.. 2004-03-08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좋아하는 자동차잡지를 사기 위해 꼬박 하루를 동네 어귀 작은 서점에서 보내던 나였다. 기아 아벨라의 사진에 흥분하던 시절, 현대의 컨셉트카 HCD-Ⅰ의 디자인에 감탄사를 날리던 그때, 난 웬만한 차들의 엔진 배기량과 마력을 줄줄이 꿰며 자랑처럼 읊어댔다. 물론 그 또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 이목을 끌었던 건 최고시속이었다. ‘튜닝한 현대 스쿠프가 최고시속 220km를 기록했다’라든가, ‘TV 광고에서 현대 엘란트라가 포르쉐를 앞지른 게 진짜였다’ 따위의 소모적인 논쟁들이긴 했지만 그조차도 지금은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지금도 난 여전히 차가 좋다. 게다가 내 회사가 위치한 압구정동에는 전세계에서 몰려온 자동차들이 거리에 즐비하다. 운 좋은 날엔 영화 ‘나쁜 녀석들 2’의 윌 스미스와 마틴 로렌스 듀오가 몰고 다니던 페라리 575M 마라넬로와 허머도 볼 수 있다. 지난 1월 ‘사상 최고의 자동차 추격신’이라는 특집기사를 쓸 때 난 신바람이 나서 원고를 써내려 갔다. DVD 속에서 멋진 자동차 추격 장면을 발굴하려고 수십 개의 DVD 타이틀을 후보에 올려놓고 저울질했다. 덕분에 화면 속에서나마 갖가지 명차들을 다 만나볼 수 있었다. 친구들은 “그렇게 차를 좋아하면서 운전면허는 왜 안 따냐?”고 놀림 반, 핀잔 반을 섞어 한소리씩 했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작은 접촉사고만 봐도 놀라는 내 소심한 성격 탓이다. 물론 게으름도 한몫 했다. 시간이 많은 방학 때는 실컷 놀다가 개강하면 그때부터 ‘왜 안 땄을까’ 후회하는 식이었으니까. 결국 지난해 여름 난 늦깎이 면허를 땄다. 대학 때부터 미루어오던 터였으니 남들보다 족히 4~5년은 늦은 셈이다. 운전학원에 수강료를 지불하고 연습용 자동차에 처음 올랐을 때의 그 떨림이란……. 키를 돌리자 경쾌한 스타터 모터 소리와 함께 차가 부르르 떨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랬겠지만 클러치만으로 차를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차를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몇 차례나 시동을 꺼먹은 뒤였다. 처음 며칠은 뻑뻑한 클러치를 밟아대느라 발목이 시큰거렸다. 그러다 곧 혼자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 근 두 달을 그렇게 운전연습에 푹 빠져 지냈다. 살면서 그토록 즐거웠던 시간이 얼마나 될까? 네 발 달린 덩치를 내 손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비가 약하게 흩뿌리는 날은 사람이 없어서 더 좋았다. 라디오를 켜고 리듬감 있게 왔다갔다하는 와이퍼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와 연애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도로주행시험에 합격하던 날 핀잔주던 친구들을 만나 실컷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깟 운전면허 하나 딴 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때 난 우쭐해 있었다. 대학입시에 합격했을 때보다 기뻤을 정도니까. 난 가끔 아버지가 타시는 10년 넘은 고물차를 몰아본다. 처음 운전대를 잡던 날을 떠올리며……. 지난해 여름, 나는 아마도 연애를 했던 모양이다. 첫사랑 그녀와의 추억처럼 나의 자동차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Z
아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김별아<소설가>.. 2004-03-08
내 나이 스물 여덟, 여전히 어리고 어리석어 세상의 길을 밝혀 찾는 눈이 어두웠던 청맹과니 시절에 나는 최초로 ‘엄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새로운 세상을 배웠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펄펄 끓는 불덩이를 안고 새벽에 응급실로 뛰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새벽의 종합병원 응급실을 가득 메운 사고 환자들 사이에서 염치없게 의사의 가운을 움켜잡고 제발 눈길을 건네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우리 주변에 그토록 많은 턱과 계단이 존재함을 몰랐을 것이다. 유모차를 밀고 장애물을 헤쳐 가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그런 장애물들 앞에서 언제나 무력했을 장애인과 약한 자들의 분노와 슬픔을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빙그레 머금는 웃음에 온 세상이 환해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말 한 마디를 처음 내뱉을 때까지 얼마나 긴 기다림과 설렘이 있고, 그 어눌하게 터져 나온 불분명한 발음의 외마디 소리가 얼마나 신비롭게 들리는지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뉴 비틀 카브리올레나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같은 요상한 이름의 자동차가 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 4WD와 RV가 무슨 차이인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운전도 못하는 녹색살인면허증의 소유자인 내가 자동차잡지를 사고 모터쇼에 가는 일이라곤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다양한 타인의 취향, 타인의 흥미, 내가 낳은 아이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경이로운 또 다른 세상을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무심코 터지는 아이의 투정과 비난에 부모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나 때문에 가족들이 얼마나 조심하며 발끝으로 걸어야 했는지도 끝내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운동회의 100m 달리기에서 2등이라고 손등에 스탬프가 찍힐 때의 환희를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60점짜리 수학 시험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하는 일보다 자식을 가르치는 일이 백만 배쯤 힘들다는 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햇살과 바람과 바다와 공기…… 나를 키운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할 줄 몰랐을 것이다. 모든 생명이 무릇 자연에 귀속되어 있음을, 스스로 살고 누군가를 살리고자 끊임없이 역동하는 순환과 질서의 신비를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내 아이에게 맞아 얼굴에 상처를 입은 아이의 엄마 앞에서 손이 발이 되어라 비는 일 따위도 없었을 것이다. 자식 둔 죄인이라는 말, 어미로 살아간다는 것은 낮은 포복으로 기는 일에 다름 아님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더 많은 시간의 여유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불편한 양육의 번거로움이 내게 가르쳐주는 숭고한 희생의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한 생애에서 가장 영예로운 일은 부와 명예와 지위와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한 알의 밀알로 고요히 썩어 묻혀 거름이 되는 것이라는 진리를. 그는 앞으로도 더 많이 나를 가르칠 것이다. 나를 부정하고 내게 반항하여 마침내 나를 뛰어넘는 그 순간까지, 그리하여 한 사람의 성숙한 인간으로 새로이 다시 만날 그때까지 나는 기꺼이 그에게 배울 것이다.
초보운전 아내 구하기 김희재<시나리오 작가, .. 2004-03-08
“괜찮을까요?” “괜찮아.” 난 안 괜찮은데……. 남편이 두 살짜리 딸을 데리고 뒷자리에 앉았다. 어제 면허를 딴 내가 핸들을 잡았다. 출발지는 수서, 목적지는 상일동 시댁. 주일이라 도로가 한가하기는 하지만 만만한 도전은 아니다. 문득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다. 면허를 땄다는 말을 듣고는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이 같이 나가자고 했다. 소위 말하는 운전연수를 시켜주겠다는 것. 운전 가르치다 싸운 부부 에피소드가 내가 아는 것만도 500개가 넘는데, 위험한 일이다 싶어 강사에게 연수하겠다고 했지만 남편이 잘 가르쳐 주겠다며 나를 끌고 나갔다. 소양인인 남편의 성격상 한두 번의 다툼은 각오를 해야겠다 싶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한다고 했지만 후진기어를 넣은 줄 모르고 액셀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동네 입구의 다리 아래로 처박히기 직전, 그야말로 깻잎 한 장 차이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두 가지 이유로 심장이 뛰었다. 죽다 살아난 느낌과 남편의 호통을 기다리는 조마조마함. 하지만 남편은 심호흡을 하면서 놀란 가슴만 진정시키고는 조용히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더니 남편이 다시 나가자고 했다. 이번엔 골목을 벗어나 빵집까지 갔다 오자는 것. 그렇게 끌고 나가 기어이 후진주차까지 가르친 후에야 집에 돌아왔다. 그러더니 오늘은 교회에서 시댁 가는 길에 나보고 운전을 하라는 것이다. 불안해하는 나를 보더니 남편이 뒤 유리창에 초보라고 쓴 종이를 붙여주며 웃는다. 그걸로 상황이 나아질까 싶기는 했지만 일단 시동을 걸었다. 10년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사건이다. 남편의 전적인 신뢰와 격려로 익힌 운전이기 때문인지 나는 지금까지 무사고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이 ‘초보 아내에게 핸들 맡기기’ 사건은 이후 우리의 삶에 하나의 방향이 되었다. 서로를 믿고 맡길 것, 맡긴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믿을 것. 직장을 옮기는 일이나 이사를 하는 일, 아이를 키우면서 무수히 맞닥뜨린 선택의 순간……. 그 때마다 우리 부부는 상대의 신뢰를 근거로 용감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신뢰는 그야말로 ‘성질’ 눌러가며 초보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친 남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각자 차를 갖고 나간 날, 도로에서 우연히 남편의 차를 발견하고 신호를 보내면 남편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그 편안한 미소를 보면서 생각한다. 두 살 된 딸을 데리고 앉아 덜덜 떠는 아내의 뒤 꼭지를 바라보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위험천만의 순간에 비명을 참느라 입술 꽤나 깨물었을 텐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릴 때 다리 휘청이던 것을 내가 눈치 채지 못했다고 알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웃음이 난다. 그리고 이 푸근한 웃음은 살면서 큰 힘이 되곤 한다.
아름다운 인연 문성해<시인> 2004-03-08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다. 골목에 세워둔 아버지의 차는 골목을 나설 때나 들어설 때마다 눈에 들어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재색의 엘란트라는 아버지가 평생 타시던 차였다. 10년도 더 된 그 차를 아버지는 늘 반짝거리도록 닦으며 아끼셨는데 중환자실에 계시는 주인을 알고 있는 듯 그 차도 골목 귀퉁이에 초라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차를 타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다녔던 길들이 그립다. 결혼 전까지 부모님께 신세만 졌던 나였다. 노처녀였던 나는 그때 왜 그렇게나 부모님을 따라 다니려고 기를 썼던지, 아마도 이런 날이 올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우리는 그 차를 타고 팔공산과 가창댐, 운문사, 은해사 그리고 기분 좋으면 동생들 사는 포항까지 내처 달렸었다. 중간 중간 경치 좋은 휴게소에서 커피와 어묵을 사먹으며 나는 어리광을 부리기까지 했으니 결혼 후에는 못 누릴 호사를 그때 다 누리고 싶었나 보다. 창가에서 습작을 하다가 듣던 아버지의 차소리, 곧이어 계단을 올라오시는 아버지의 발소리, 그 발소리까지 닮은 나는 아버지의 판박이였다. 유독 맏이인 나를 아끼시던 아버지 때문이었을까, 나는 너무 오래 그 창가를 떠나지 못하고 살았다. 아버지가 쓰러지시던 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버지의 차였다.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자리가 된 담벼락 밑에 그 차는 아버지가 세워 놓은 그대로 서 있었다. 아버지의 차는 여름 뙤약볕 한가운데에 누워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은 우리를 지치도록 집과 병실로 끌고 다녔다. 중환자실에서 회복실로 몇 달이 훌쩍 지나고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셨다. 뇌수술 후 부쩍 기력이 쇠하신 아버지가 서서히 기억을 되찾으시면서 제일 먼저 찾은 것도 아버지의 차였다고 한다. 아직 숟가락도 제대로 못 잡으시는 아버지가 당신 손으로 다시 운전하시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다시는 운전대를 잡지 못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사위와 손주들을 태우고 거뜬히 다니셨던 아버지였다. 그 차는 젊은 날의 아버지의 상징이었다.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노인으로 변해버렸듯이 아버지의 차 역시도 서서히 주인의 손길을 잃어버리고 급속히 늙어갈 것이다. 그런 차가 마음에 짠하셨던지 사위들만 오면 키를 내주시며 운전해보라고 권하시는 아버지,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 차도 세월의 뒤안으로 사라져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훗날 내가 친정을 찾았을 때 그 자리에 항상 서 있었던 아버지의 차가 없다면 많이 섭섭할 것이다. 허름한 집 앞에 그보다 더 허름하게 서 있는 차이지만, 언제나 참 보기 좋았다. 아직도 아버지의 차는 골목 귀퉁이에 세워져 있다. 아침이거나 밤이거나 아버지는 아무도 모르게 골목으로 나가 그 차를 어루만지시며 마음속의 말씀을 하실 것이다. 그러면 그 차도 아버지에게 기계 소리를 윙윙거리며 무슨 말인가로 답할 것이다. 예순 넘으신 나이에 면허를 따서 평생 이 한 차만을 타신 아버지였다. 이 차 역시도 아버지만을 알고 따랐으니 쓸쓸하지만 퍽 아름다운 사람과 기계의 인연이지 않은가. 이제는 내 차로 아버지를 뒷자리에 태우고 남은 여생을 편안히 모시고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옛날 내가 아버지의 뒷자리에서 마냥 호사를 누렸듯이 아버지 역시도 내 차 뒤에서 남은 여생을 아름답게 즐기셨으면 좋겠다.
모과를 차에 싣다 유종인<시인> 2004-02-09
소위 공기산업이라는 게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환경오염이 드디어 우리가 편안하게 숨쉬던 공기마저 새롭게 걸러 정화해서 팔아야 할 상품쯤으로 전락시키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공기정화기가 달린 에어컨이 지난 여름 본격적으로 냉방용품시장에 출시되기 시작했다. 소량의 산소가 든 일회용 제품 등도 여러 형태로 시장에 나와 있다. 이런 대기오염의 현실에 발맞춰서 대형건물이나 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되는 시행령이 발효되었다. 건강과 상관없이 애연가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저만의 공간을 찾아야 하는 궁색함을 면치 못하게 됐다. 차도 밀폐된 이동공간임에 틀림없다. 시골길이나 한적한 교외의 도로를 지날 때면 자연스럽게 차창을 내리게 된다. 맑은 공기를 우리 몸이 본능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환기가 된 차 안은 일시적으로 쾌적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실내 공기는 마치 눅진 과자나 빵처럼 본래의 맛을 잃어가게 마련이다. 본래 닫힌 공간의 공기는 물로 따지면 고인 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동차의 환기시스템이 크게 고려되지 않은 상황에서 차내 공기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향기’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자연스런 향기는 공기라는 음식에 치는 조미료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즘엔 향기를 적극적으로 의학치료에 적용하는 예가 있고 그보다 미약하지만 기분전환이나 정서적 자극에 도움을 주는 아로마 테라피요법이 상품화되고 있다. 자연식물인 허브나 꽃 같은 것들에서 추출한 재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연 성분을 가공해 만든 다양한 방향제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차내에 각종 액세서리를 치장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인공방향제인데 그 향기의 강렬함이나 독특함으로 차내의 잡스런 냄새를 제거하는 데 일조를 하는 게 사실이다. 담배 냄새를 비롯한 갖가지 냄새들이 공기 중에서 결합해 만든 정체불명의 냄새들이 차 안 구석구석에 진드기처럼 붙어있다. 갖가지 모양의 방향제는 그런 차 안의 냄새를 희석시키고 중화하는 역할을 해준다. 그런데 이런 방향제들은 오래 사용하다 보면 또 다른 잡냄새로 전락하곤 한다. 기존의 잡냄새를 어느 정도 희석시키고 정화하다가 어느 기간이 지나면 그 자신의 냄새가 스스로 다른 냄새에 찌들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공기의 순환이 적절하게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방향제만으로는 역부족인 경우다. 사람이 만든 인공의 향기가 가진 한계가 아닌가 싶은 순간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길거리를 지나다가 바닥에 뭔가를 놓고 파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건 크고 노랗게 잘 익은 모과였다. 겉만 봐서는 얼른 한 입 베어먹고 싶은 열매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주인의 허락도 없이 얼른 모과 하날 주워들고 향기를 맡았다. 잠시지만 모과의 향기는 은은하고 상쾌했다. 차 안에 매복해 있는 끈질긴 잡냄새와의 전쟁에서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으로 끝내 자연향(自然香)의 승리를 가져다 줄 복병인양 모과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과야, 타라! 깊이가 있는 향기는 공기의 맛을 부러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끝내 그 공기의 전체적인 맛을 신선하게 조리해낸다 여겨졌다. 길거리의 토종 모과는 향기의 동행을 이끌 편안한 안내자로 보였다. 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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