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브라부스 해외수출 총책임자 Detlef Schedel .. 2005-02-23
차를 타다 보면 평범한 차와는 다른, 나의 취향에 꼭 맞는 차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처럼 개인의 욕구에 맞게 차를 개조해 주는 튜너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완성차 수준의 뛰어난 품질과 명성을 자랑하는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 가운데 브라부스는 3년 10만km의 품질보증을 내세울 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튜너다. 1977년 독일에서 문을 연 브라부스는 현재 벤츠를 비롯해 스마트, 크라이슬러 차를 전문으로 튜닝하고 있다. 특히 벤츠 튜너로 양대산맥을 이루던 AMG가 벤츠에 흡수된 이후 브라부스는 제일 가는 벤츠 튜너로 군림하고 있다. 벤츠를 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국내에서, 브라부스 로고가 달린 벤츠를 본다면 한번쯤 오너에게 눈길을 보내 주는 것이 어떨까? 성능을 높이는데 주력하는 브라부스를 선택한 이는 분명 외유내강형의 멋진 사람일 테니까……. 가장 좋아하는 차는 610마력짜리 G V12 지난 1월 14일, 부라브스 해외수출 총책임자인 데틀레프 쉐델 씨를 국내 제휴업체인 ‘스터디’의 서울 강남 매장에서 만났다. 새해를 맞이해 아시아 수출지역 순방에 오른 그는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했고, 이후 일본과 홍콩을 거쳐 독일로 돌아갈 예정이다. 국내에 3일 동안 머물면서 스터디와 올해 사업계획을 논의하고, 고객들의 불편사항을 체크했다. 데틀레프 쉐델 씨는 “한국 시장은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아직은 브라부스의 이미지를 바르게 정착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라이벌이던 AMG가 벤츠에 흡수된 이후 브라부스는 벤츠 혹은 AMG가 채워 주지 못하는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성능을 높이는 작업 외에 모바일 오피스나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주문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미 유럽에서는 DVD와 멀티미디어 시스템이 널리 보급되어 있습니다. 브라부스는 이 분야에 상당한 기술을 축적했고,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벤츠를 튜닝하는 업체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바라본 벤츠는 어떨까? 그는 올해 국내에서 판매를 시작하는 첫 4도어 쿠페 CLS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차가 평가를 받으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는 CLS를 최고 디자인의 벤츠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현재 데틀레프 쉐델 씨가 타는 차는 메르세데스 벤츠 C270 CDi. 고성능 차를 만드는 브라부스의 이미지와 그의 큰 체구를 생각하면 평범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그의 C클래스 디젤은 브라부스 튜닝을 통해 최고출력 238마력, 최대토크 50kg·m의 성능을 지닌 만만치 않은 실력을 자랑한다. “한 마디로 양가죽을 쓴 늑대지요. 한번은 아우토반을 달리는데 한 스포츠카가 100km 넘는 거리를 따라왔습니다. 휴게소에 나란히 들어갔을 때 스포츠카 오너가 다가오더니 기겁을 하더군요. 아우토반에서 시속 250km가 넘는 속도로 자신을 앞지른 차가 벤츠 세단 가운데서도 막내인 C클래스이고, 게다가 디젤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브라부스 로고를 보고는 이해할 수 있다는 눈빛을 보내더군요.” 눈치 챘겠지만 데틀레프 쉐델 씨는 스피드와 운전을 즐기는 대단한 카매니아다. 또한 그는 브라부스의 수출을 총괄하는 임원이기 전에 브라부스의 열렬한 팬이다. 이처럼 좋아하는 취미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의 일상은 어떨까? 매일매일이 즐거울 수도 있지만 좋은 취미를 잃어 버릴 수도 있다. 데틀레프 쉐델 씨는 전자에 속한다. “개인적으로 브라부스 가운데 G V12를 가장 좋아합니다. 제 덩치를 보면 왜 벤츠 G바겐을 좋아하는지 아실 겁니다. G V12는 벤츠 S600의 심장을 튜닝한 V12 6.3X 트윈 터보 엔진을 얹고 최고출력 610마력/5천300rpm, 최대토크 102.6kg·m/1천750rpm의 놀라운 힘을 내지요. 덕분에 무게가 2.8톤에 달하는 G바겐이 0→시속 100km 가속 4.7초, 최고시속 240km(속도제한)의 날렵한 성능을 냅니다. 엄청난 엔진 힘에 맞추어 섀시와 브레이크 등도 아주 스포티하게 튜닝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투박하고 덩치 큰 SUV가 페라리와 맞먹는 날쌘 몸놀림을 보인단 말입니다. 전혀 아닐 것 같은 차가 의외로 잘 달리는 것, 그것 참 매력적인 일이지요.” 차가 좋고 일이 즐거운 남자, 데틀레프 쉐델. 그는 커다란 덩치로 놀라울 정도로 스피드를 내고, 느릴 것 같은 차로 스포티하게 달리기를 좋아하는, 그런 ‘의외성’을 즐기는 멋진 남자였다. 글 | 박지훈 사진 | 박창완
신영복 교수 인간성의 회복을 동양고전의 관계론에서 .. 2005-02-18
“동양고전을 ‘관계론’으로 본 책이 바로 입니다. 내가 20여 년 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독방에서 4~5년을 지냈어요. 주로 명상을 많이 했는데, 말하자면 면벽이지요. 주요한 내용이 뭐냐하면 어렸을 적부터의 기억을 찾아내는 거예요. 신기하게도 네 살 때의 기억이 나더군요. 그 이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추 체험하는 내용으로 명상을 하는 거지요. 이상한 것은 오래 같이 지냈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잠깐 스쳐 지났지만 심층에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나는 무엇인가’를 묻게 되고, 관계론이라는 화두가 생겨난 것이지요.” 오랜 수형 기간 동안 휴지조각과 엽서에 적은 편지글들을 모은 책 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영복 교수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만인 88년에서야 석방되기에 이른다. 김지하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곳이 아닌 그곳에서의 오랜 단절은 사유의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되는 모양이다. 그 오랜 사유의 결과로써 생명이라는 또는 고전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한 성찰을 주문하는 것일 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애정이 가장 큰 가치 89년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중인 신영복 교수는 그동안 , , 등의 저서를 펴냈는데, 이번에 내놓은 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금, 여기서 왜 다시 고전인가? “내가 59학번인데 그 세대의 정신적 영역은 매우 불행한 것이었어요.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허락되지 않는 불행한 문화였지요. 분단과 군사독재에 저항하면서 열정을 쏟았던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식민지 의식을 비롯한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시간관념에 대한 반성으로 고전을 읽기 시작하게 되었어요. 동양고전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미래의 사상이기 때문이었지요.” 에서는 시경, 서경, 주역을 비롯해 공자(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등의 사상가를 다루고 있다. 물론 ‘관계론’이라는 관점에서다. 중요한 것은 고전의 근본주의가 아니라 주체로서 나의 관점일텐데, 우리 시대의 실천적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지(知), 앎이란 무엇일까요. 참된 지는 사람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보화사회에서 진정한 앎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가장 근본적이지요. 우리 사회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관계론을 조금 쉽게 설명하면, 내가 전공이 감옥이므로(웃음), 감옥에 있을 때는 춥고 배고픈 게 힘든 게 아니라 나 때문에 아파할 가족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기쁘고 슬프다는 게 모두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거지요.” 따라서 신영복 교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인간관계의 황폐화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의 사회의 본질인데, 지속성이 없는 만남에서는 사회적 가치를 세우기 어렵다. 익명성을 이용한 인터넷상의 폭력도 그 때문이다.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지요. 단속에 걸린 사람이 교통경찰에게 다른 사람들도 다 위반하는데 왜 나만 잡느냐고 항의했어요. 그러자 교통경찰은 ‘어부가 바다 고기를 다 잡을 수 있냐’고 대꾸했다지요. 문제는 법규를 위반해서 걸린 사람의 의식구조지요. 우리 사회의 문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가르침은 큰 데 있지 않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훨씬 좋아질 것이다. 나아가 한 나라가 부끄러움을 안다면 다른 나라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는 못할 것이다. 관계망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면 물질과 익명성의 시대에, 이러한 성찰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시대의 문제는 속도와 효율, 물질가치가 인간적 가치를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감각적인 문화토양에서 근본적인 것을 모색해나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비디오문화에서 오디오문화로 다시 독서문화로 되돌아가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애정이 가장 큰 가치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에 희망을 걸었으면 합니다.”
이준희와 기아 카니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극단적인.. 2005-01-26
이 준희(36) 씨는 평범함 자체를 혐오(?)하는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다. 그의 개성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쉬운 부분은 자동차에 대한 열정과 집념. 외국인 회사에서 5년여 근무하면서 1년간 외국 생활을 했는데,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1년 동안 타본 차만 100여 대가 넘습니다. 눈에 띄는 차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서라도 시승을 해야만 직성이 풀렸어요. 비슷한 차라도 제각기 다른 성격이 있어요. 그것을 느끼는 순간의 짜릿한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더. 이준희 씨는 속도를 즐기는 스피드 매니아이기도 하다. 1994년 처음 마련한 현대 아반떼를 타면서 튜닝에 눈을 뜬 것도 스피드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본지 자매지 을 매달 사 보면서, 튜닝숍과 용품 광고가 나오면 그 면을 찢어서 직접 찾아다니기도 했다. 테일램프 여섯 개나 갈아치워 이준희 씨는 튜닝을 하면서 본능적으로 DIY를 시작했다. 튜닝은 속도에 대한 욕망을 채워 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개성이 드러나는 차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DIY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튜닝은 만들어진 부품을 사다 끼우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DIY는 부품을 다른 용도로 쓸 수도 있고,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 수도 있지요. DIY는 획일적인 자동차와 그런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어요.” 이준희 씨가 처음 손댄 DIY는 아반떼의 센터페시아 패널을 떼어 색을 입히는 것이었다.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굉장히 뿌듯하고 보람이 있었다. 이후 DIY에 빠져드는 속도가 빨라졌고, 튜닝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손에 잡히는 물건이 있으면 먼저 DIY에 쓸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본격적인 DIY는 1999년형 카니발로 바꾸면서 시작되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지금은 없어진 서울 청계천 주변을 돌아다니며 DIY 재료를 모았고, 잘 꾸며진 카니발이 있으면 눈여겨 보았다. 그는 카니발을 사자마자 아반떼를 통해 쌓은 실력을 마음껏 쏟아붓기 시작했다.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는 테일램프는 여섯 번이나 갈아 치웠다. 작업내용을 사진과 함께 카니발 동호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 좋은 반응을 얻었고, 2002년 초에는 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마련한 ‘DIY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준희 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DIY 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2002년 초였어요. DIY를 하면서 만든 자료를 바탕으로 DIY 쇼핑몰 ‘다이월드’(www.diyworld.co.kr)를 만들었습니다. DIY에 필요한 재료를 팔기도 했지만 회원들과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어요. 지금은 회원이 1천200여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벌이는 시원치 않아요. 불황인데다 요즘은 ‘헝그리 DIY’를 하는 분들이 부쩍 늘었거든요.” 산만한 느낌이 들 정도로 치장된 카니발을 살펴보면서 ‘이것은 왜 붙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의 대답은 한결 같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제가 볼 때는 예쁘고 특별하거든요. DIY를 하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일단 해봐야 한다는 것이 제 철학이에요. DIY도 마찬가지입니다. 억눌림 없이 내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 DIY의 매력 아닐까요.” 자신만의 개성을 고집하는 이준희 씨. 다른 사람이 똑같은 DIY를 하고 있으면 미련 없이 뜯어내고 새로이 꾸민다. “남들과 똑같은 DIY는 DIY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좋아하는 일 찾아 끝까지 밀어붙여라 자동차 관련 직.. 2005-01-26
렉서스 월간 최고판매 기록 보유자, D & T 모터스 신동경 부장 2004년 신동경 부장(46)의 손을 거쳐 고객에게 인도된 렉서스는 100여 대. 2003년에 이어 2년 연속 한국토요타자동차 판매왕에 올랐다. 놀라운 사실 하나 더. 2003년 10월과 12월의 월 18대 판매실적은 전세계 렉서스 사원 중 최고기록이라고 한다. 그는 1987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자동차 인생을 시작한다. 영업직은 스스로 원했던 일. 영업은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를 거짓 없이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1996년 포드자동차 강남영업소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좀이 쑤신다. 10년 동안 몸으로 부닥쳤던 직업병(?)이 도진 것. 2000년 렉서스가 국내에 진출하자 영업직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개인마다 영업방식이 다르지만 신 부장은 너무나도 차분하고 조용한 스타일이다. 고객을 만나고, 설득하며 결과를 이끌어내야 하는 직업을 생각했을 때 의외다. 그러나 이 점이 현재의 그를 있게 만든, 신 부장만의 영업비결이다. “수입차 고객은 40∼50대의 중년층입니다. 차를 팔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들의 편한 대화 상대가 되려고 합니다.” 장황한 설명과 함께 차 자랑을 늘어놓기보다는 먼저 고객들의 불편사항, 요구사항을 듣고 해결해 주려고 노력한다. 신 부장은 “최선을 다하지만 선택은 고객이 한다”면서 어느 누구를 만나든, 절대로 편견을 갖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집중력과 끈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한 고객은 2년여의 노력 끝에 단골로 만들 수 있었다. “당신의 친절에, 당신의 끈기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라는 고객의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신 부장이 확보한 고객 명단은 4천여 명. 이름과 얼굴을 조합할 수 있는 고객만 2천여 명이다. 현대자동차에서 일할 때 인연을 맺은 고객이 이제는 렉서스 고객이자 또 다른 영업동지라는 말도 덧붙인다. 한 달 18대라는 세계기록은 한눈 팔지 않고, 한 우물만 팠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가 후배들에게 전하는 한 마디.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어려운 시기라고들 합니다. 반대로 자신을 단련시킬 수 있는 좋은 때입니다. 시간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조바심 갖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이세요.” 2002∼2004년 보험왕 3연패, 삼성화재 조근옥 팀장 하나, 사무실 습격사건. 초대받지 않은 인물이지만 ‘굿모닝’이라는 싱그러운 아침인사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간다. 하루, 이틀, 사흘….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사무실에, 그것도 자기 집 안방처럼 드나드니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하지만 굴하지 않는다. 갑자기 일이 생겨 며칠 못 나가게 되자 이게 웬일?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그 사람들이 오히려 걱정을 한다. 다시 출근 도장을 찍던 날,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더 관심을 갖더란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힘, 그녀가 강조하는 첫 번째 팁은 ‘고정관념’을 깨자. 둘, 조근옥(46) 팀장이 고객에게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사고가 났을 때 보험회사보다 자신에게 먼저 전화를 해달라”는 것. 사고가 나면 당황하게 되고, 제대로 진술을 못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명함에는 집, 사무실, 휴대폰 등 자신과 관계되는 모든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그것도 모자라 고객에게 펜을 건네주며 몇 개 더 적어 놓으라고 권한다. 또 그녀는 언제, 어느 장소에서도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꼭 챙기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비닐 주머니다. 목욕탕에도 휴대폰을 갖고 들어가기 위해서다. 셋,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반드시 자존심은 지킨다. 그녀는 빼어난 노래솜씨를 자랑한다. 고객의 경조사를 잊지 않고, 특히 경사가 있을 때면 노랫가락으로 흥을 돋구는 것도 조 팀장의 몫이었다. 하지만 절대 자존심은 버리지 않는다. 고객에게 보험을 권할 때 쓰는 말은 딱 하나. ‘보험 좀 들어 주세요’가 아니라 ‘보험에 가입하십시오’다. “다른 말입니다. 부탁이 아니라 권유예요. 보험은 고객을 위한 상품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보험을 권할 때 고객에게 가장 필요한 상품만 추천하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고, 자신이 가해자·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넷. “목표를 세우십시오. 작게는 한 시간, 하루 목표부터 10년 뒤에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종이에 적어 보세요. 그리고 종이에 적었던 목표에 대한 책임을 지십시오.” 앞으로 십 년 뒤, 멋진 펜션을 지어 고객을 위해, 갈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조근옥 팀장. 그 목표를 꼭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명장’이 전하는 따뜻한 마음, 현대자동차 서부사업소 김수길 반장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처음부터 너무 높고, 좋은 자리에서 시작하면 재미없잖아요. 눈을 조금만 낮추세요. 단계를 밟으면서 업그레이드시켜 나가면 됩니다.”  현대자동차 서부사업소 김수길(47) 반장의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취업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첫 직장이 자동차 정비업소였다. 군 입대·제대를 거치며 제대로 된 정비사가 될 것을 다짐한다.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차를 일부러 고장낸 뒤 분해·조립하기를 수십 번. 저녁에는 자격증 시험에 매달렸다. 폐차 직전 차가 자신의 손을 거쳐 제대로 굴러가는 것을 볼 때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1988년 실력을 인정받아 현대자동차에 입사하고 1992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자동차검사 2급 자격증을 딴다. 이때부터 후배들과 정비기술을 나누고 싶어진다. “정비를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알고 싶은데 선배들이 가르쳐 주지 않을 때, 차를 고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못 고칠 때였습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교육은 후배들을 가르치기보다는 토의하면서 서로 배워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1998년 자동차 정비 기능장을 획득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99년에는 마흔을 넘긴 나이로 서울산업대 자동차공학과에 입학하는 정열을 보여준다. 기능장이라는 최고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걸 몸소 실천한 셈이다. 그리고 2003년 대한민국 자동차정비 ‘명장’으로 선정된다. 지금은 대학원 2학기 과정을 다니면서 서울정수기능대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그의 기름밥 27년이 곧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의 역사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김 반장은 고객이 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고객이 맡긴 차의 문제점을 찾지 못해 힘들 때도 있지만 “고생합니다”라는 따뜻한 한마디와 “좀더 찾아보겠습니다”라는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대화가 있기에 꿋꿋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직원이든 손님이든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일이 정비 아닙니까. 차를 고치는 것만큼이나 고객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부분 명장, 김수길 반장이 마지막으로 전한 말이다. 국내 모터스포츠 미캐닉계의 맏형, 현대레이싱 & 커뮤니케이션 백성기 기술팀장 자동차경주에서 우승해 표창대에 오르는 주인공은 드라이버다. 화려한 주연 뒤에는 묵묵히 땀 흘리는 조연이 있기 마련. 드라이버 역시 조연이 있기에 우승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조연은 경주차의 세팅과 유지, 관리를 책임지는 미캐닉이다. 국내 최고의 미캐닉으로, 미캐닉계의 맏형으로 통하는 현대레이싱 & 커뮤니케이션의 백성기(37) 기술팀장을 만났다. 겨울에는 모터스포츠가 열리지 않아 맘 편히 지낼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시즌 때보다도 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프로야구 선수의 1년 성적이 스토브리그 때 얼마나 체력을 단련하고 기술을 쌓았는지에 좌우되는 것처럼 모터스포츠 역시 겨울 준비가 중요하다. 더욱이 최고 자리를 지키던 팀이 2년째 우승컵을 다른 팀에 내주어야 했기에 더 열심히 뛸 수밖에 없다. 친구 손에 끌려 레이싱팀을 찾아간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초보 미캐닉에게는 주어지는 일은 잡일밖에 없었지만, 경주차는 한없이 흥미롭고 새로운 세계였다. 1995년 오일뱅크 소속이 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팀 재정이 넉넉해 선진국에 기술연수도 갔다 올 수 있었다. 국내 최고의 미캐닉으로 꼽히지만 국내 모터스포츠가 아직 활성화되지 못했기에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외로움’도 있다. 초창기에는 미캐닉이 되기 위해 팀을 찾아오는 예비 미캐닉이 많았지만 요즘은 수가 줄어들어 안타깝다. 그가 매캐닉 일에 몰두하는 것은 재미있기 때문. “미캐닉의 일은 끝이 없습니다. 우승을 하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졌을 때는 우승컵을 되찾기 위해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요.” 빼앗기고 되찾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고 설명한다. 2004년 렉서스가 모터스포츠에 뛰어들었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국내 메이커도 모터스포츠 참가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되면 할 일이 더 많아지고, 작업분야도 한층 세분화될 것이다. 백 팀장은 미캐닉이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긴 안목에서 엔지니어의 길도 고려해 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일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세요. 그래야 일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고, 의욕도 생기니까요.”
한불모터스 송승철 대표 멋과 실용성 겸비한 왜건으로.. 2005-01-25
한국을 떠난 지 5년 만인 2003년 8월 국내 판매를 재개한 푸조. ‘차분하게’ 지난 1년을 뒤돌아보고 새해 설계를 하는 연말연시지만 푸조의 공식수입업체 한불모터스에는 이런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정신없이 바쁘다. 남들은 경기침체로 최대한 몸을 낮춘다고 하지만 반대로 공격적인 마켓팅을 펼치고 있는 것. 한불모터스는 최근 몇 달 사이에 잇따라 새 모델을 발표했다. 푸조의 활약을 총지휘하는 한불모터스 송승철(48) 대표를 만나 보았다. 송승철 대표가 수입차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6년, 코오롱상사 BMW 사업부에 몸 담으면서다. 그 후 사브 등을 거쳐 2003년 한불모터스 사령탑이 되었다. 수입차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만큼 영업·마케팅 쪽에서 역량을 인정받았고, 결국 푸조의 국내 수입권을 따냈다. 디젤 모델 더해 경쟁력 강화 송 대표는 먼저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의 푸조 위상을 들려주었다. ‘푸조는 현재 자동차 생산 세계 6위, 유럽 2위를 달리고 있으며, 2006년 연간 400만 대 판매를 목표로 한다. 그는 미국 빅3에 합병되지 않고 이런 결과를 낸 것만으로도 푸조의 역사와 품질이 입증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맥을 못춘다. 수입차 고객들이 독일과 일본 브랜드를 선호하기 때문. 2003년 들여온 206CC와 307SW로 인기몰이에 성공했으나 아직 국내는 프랑스차에 대한 인식이 떨어진다. 그러나 한불모터스는 최근 세단 407에 이어 407SW와 206SW까지 들여와 SW 라인을 완성시켰다. 이런 적극적인 판매정책을 놓고 ‘무리가 아니냐’는 걱정의 목소리도 들린다. SW와 같은 왜건은 국내에서 잘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왜건의 대표격인 볼보까지 두 손을 들었을 정도로 국내 시장은 세단과 SUV로 양분화되어 있다. 하지만 송 대표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SW 삼총사는 보수적인 왜건이 아니라 파격적인 스타일링을 갖춘 패션카로서 틈새시장을 노려볼 만하다는 것. “석 대의 SW 모두 독특한 색깔을 갖추고 있는, 개성 넘치는 차들입니다. 206SW가 앙증맞다면 307SW는 시원스럽고 407SW는 중후한 맛이 풍기지요. 모두 실용성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습니다.” 2004년 100여 대의 307SW가 주인을 찾았다며, 307SW 매니아층이 생겼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독특한 개성에 더해진 깊이 있는 맛도 푸조만의 개성이다. 송 대표는 프랑스의 예술을 예로 들었다. “예술이라는 것이 처음 접했을 때는 재미없고 따분하지만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중독성이 강합니다. 푸조차도 마찬가지예요. 음미하는 맛이 일품입니다.” 다른 수입차에 비해 값이 저렴한 것도 장점으로 꼽았다. 206SW는 국산 SUV나 중형 세단과 비슷한 2천800만 원, 407SW가 4천290만 원이니 조금만 긴축재정을 하면 프랑스차의 아름다운 선율을 느껴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푸조의 또 다른 장점은 유럽 최고 수준의 디젤 승용차 기술. 2005년 상반기 SW 디젤을 들여오면 푸조의 인기는 더욱 올라갈 전망이다. 송 대표는 디젤 승용차의 인기몰이를 확신하고 있다. “디젤 모델을 들여오면 블라인드 테스트를 계획하고 있어요. ‘털털거린다’고 생각하는 디젤 엔진이 절대 아닙니다. 휘발유 엔진인지 디젤 엔진을 얹었는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 한불모터스는 2005년 원스톱 서비스 시설을 갖춘 전시장을 16개로 늘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푸조가 멋진 왜건을 앞세워 세단과 SUV로 굳어진 국내 자동차 시장에 다양화의 바람을 몰고 오기를 기대해 본다.
HBC 코오롱 모터스 전인선 이사 아시아인 최초의 .. 2005-01-19
1972년 어느 날, 작은 체구의 한국 청년이 낯선 독일 땅을 밟았다. 청년의 이름은 전인선, 그로부터 만 9년 동안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 폭스바겐, 아우디 등의 메이커에서 정비 기술을 익힌 그는 1981년, ‘독일 마이스터’ 자격을 얻었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인 최초의 일. 마이스터에 대한 독일인들의 존경과 믿음은 상상 이상이다. 마이스터는 특정 기술 분야에 대한 국제 공인 자격일 뿐 아니라 그 분야의 사업을 할 수 있는 공식허가증이기도 하다. 자신의 사업체를 운영하며 자동차 정비에 관한 한 독일 최고임을 공인 받은 그는 지난 1996년 BMW 코리아 설립 소식을 듣자 만 24년만에 모국을 찾았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다. 이국 땅에서 맨주먹으로 일궈낸 ‘마이스터’ HBC 코오롱 전인선 이사(60세)의 경력과 노력은 ‘아시아인 최초의 독일 마이스터’라는 한마디에 모두 스며있다. 모두의 삶이 빠듯하던 70년대 초, 일찌감치 자동차 쪽으로 눈길을 돌린 그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자동차라고 해봐야 거리에서 간혹 시발택시다 도요타 크라운이 눈에 띄곤 하던 때였어요. 역설적으로 자동차가 아직 드물던 때인지라, ‘머지 않아 자동차의 시대가 올 것’ 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학 기계과를 다니면서 어지간한 국내 자격증은 모조리 섭렵한 전 이사는 선진 기술에 대한 욕심으로 외국행을 결심한다. 물망에 오른 목적지는 미국과 독일, 일본. 모두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들이었던지라, 당시 현지에 진출한 광부와 간호사 덕분에 한국인에 대한 인지도가 높던 독일은 왠지 그의 마음을 끌었다. 결과론이지만, 그가 독일이 아닌 다른 나라로 떠났더라면 아시아인 최초의 마이스터는 다른 나라 엔지니어의 차지가 되었을 지도 몰랐을 일. "독일은 외국의 자격증을 인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도합 10년이 넘는 정비 경력을 인정받아 마이스터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마이스터 시험은 단지 기술만 측정하는 게 아니라 그 기술로 사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 은행업부, 상법 등 법률분야, 심지어 후배양성을 위한 교육학까지 테스트하기 때문에 고시공부 하듯 책을 모조리 외웠어요." 14명의 최종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도, 아시아인 최초의 마이스터라는 축하를 받고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을 만큼 그의 심신은 시험공부에 지쳐있었다. 합격 한 달 뒤 그는 베를린에서 정비사업을 시작했다. "마이스터의 사업체에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뒤따릅니다. 가난한 이방인이던 제게 마이스터 자격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지요. 단골손님이던 베를린 자유대학 의대교수는 정년퇴임하면서 아끼던 자신의 BMW를 선물로 주었답니다. 토요일 오후, 이미 영업이 끝난 시간에 고장난 새신랑의 차를 힘들게 수리해줬더니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부와 함께 인사를 하러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어요." 마이스터로서 첫발을 내디뎠던 베를린에서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떠오르는 듯 그의 눈빛이 따뜻해진다. 그에게도 시련이 다가왔다. 통독 이후 독일 정부가 새로운 수도인 베를린 시내의 공장들을 구 동독지역으로 옮기는 계획을 추진했기 때문. 하지만 구 동독지역의 불안한 치안과 열악한 제반시설은, 이미 베를린에서 기반을 닦은 그를 망설이게 했다. 결국 독일에서의 정비사업을 정리하기로 결심. "당시 빠른 속도로 차가 늘어나던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이주해 정비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BMW 코리아의 설립 소식을 우연히 들었지요. 95년이었습니다. BMW 본사에 이력서와 편지를 보냈고, 기술고문으로 모국을 찾게 되었어요." 독일 마이스터인 그가 꼽는 BMW 차의 강점은 순발력과 제동력. 특히 제동력은 최상으로 자신한다. BMW 차의 성능에 대해 딱 부러지게 말하던 전 이사는, 다른 나라 차들보다 앞선 독일차만의 장점을 묻자 뜻밖의 대답을 했다. "물론 독일차의 완성도는 전반적으로 아주 높지만, 사용자들의 습관이 독일차를 더 좋게 만들어 가는 것 같아요. 독일인들은 의도적이든 교통체증 때문이든 공회전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옴쌀달싹 할 수 없을 만큼 꽉 막힌 도로에서는 어김없이 엔진을 꺼요. 심지어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주말 국경 부근에서는 아예 시동을 끈 채 차를 밀면서 가는 운전자들도 많아요. 겨울 아침에는 더운물이나 스크레이퍼로 얼어붙은 눈을 치운 뒤에야 시동을 겁니다.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어둔 채 차를 오랫동안 세워놓으면 어김없이 주민들의 항의나 신고로 이어지게 마련이에요. 추운 겨울이면 실내가 후끈해질 때까지 시동을 미리 걸어두곤 하는 우리나라 운전자들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입니다." 시동을 걸고 5~10초면 엔진오일이 골고루 분사되는지라 공회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 엔진 내구성을 해치는 필요 없는 공회전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서, 정작 엔진온도가 정상 수준에 오르기도 전에 곧장 급가속부터 하는 운전습관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70년대만 해도 자동차는 그저 기계였을 뿐이지만, 지금은 전자와 컴퓨터, 인테리어 등 모든 사업분야의 총집합체입니다. 차와 더불어 살고 싶다면 기계뿐 아니라 관련된 모든 분야의 지식을 매일매일 쌓고 다듬어야지요. 무조건 공부해야 합니다. 더구나 요즘은 거리마다 자동차의 홍수인데다 대학에도 자동차공학과 등이 많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 환경입니까." 머나먼 이국 땅에서, 온갖 편견과 난관을 뛰어넘어 경지에 다다른 노(老) 마이스터의 충고는 오직 ‘공부’ 뿐. 그 자신 누구보다 치열한 20대를 견뎌냈던 주인공이기에, 대가(大家)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이 땅의 청년들이라면 그의 한마디 한미드를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다.
델파이코리아 이대운 사장 “비GM 영업비율을 50%.. 2005-01-13
1999년 5월 GM에서 분리 독립한 델파이는 세계적인 자동차부품회사로 전세계 43개국에 196개의 공장과 53개의 고객센터·판매법인, 34개의 기술연구소, 18만6천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다국적 기업이다. 2003년 매출은 262억 달러(약 30조9천100억 원). 포춘지 선정 100대 기업 중 56위로, 독일의 보쉬사와 업계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델파이는 ‘고객이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느 곳이라도 간다’는 모토 아래 89년 한국에 상륙했다. 한국 진출한 지 15년만인 지난해 7월 경기도 용인시에 기술연구소를 설립한 델파이코리아는 현재 한국델파이, 델코, 패커드코리아 등 6개 합작회사와 에어백, 시트벨트 생산업체인 델파이성우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델파이코리아는 2003년 델파이의 아·태지역 매출 27억 달러(약 2조9천700억 원) 중 11억 달러(약 1조2천100억 원)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커졌다. 자동차부품회사, 원가 경쟁력이 최대 무기 델파이코리아 이대운 사장은 “본사에서 아시아 국가 중 한국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중국의 노동력이 한국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이 아직 많이 뒤쳐져 있고 일본의 기술력이 앞서지만 별 차이가 없어 앞으로 좀 더 노력하면 아시아에서 기술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대운 사장은 지난 76년 미국 IBM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82년에는 크라이슬러의 엔진개발 엔지니어로 일했다. 84년에는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눈에 띄어 39살의 젊은 나이에 현대자동차 이사로 입사, 17년간 연구소에서 엔진과 트랜스미션 개발을 주도했다. 현대에서의 바쁜 생활이 자동차업계를 바라보는 능력을 키워 주었다. 그리고 2001년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교수를 거쳐 2002년 1월 델파이코리아 사장에 전격 발탁되었다. 델파이는 아시아 자동차시장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데다 현대의 쾌속항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20년 가까운 현대자동차 경력과 국내 최고의 엔진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를 선택했다. 이대운 사장은 ‘노(no) GM’, ‘노 GM대우’가 되어야 살아남는다는 각오로 현대와 기아, GM대우, 르노삼성, 쌍용 등 대다수 국내 완성차업체 공략에 힘을 쏟고 있다. 2002년 6월에는 현대의 V6 엔진에 얹을 4억 달러(약 4천400억 원) 상당의 엔진제어시스템(EMS) 공급 계약을 맺는 성과도 일궈냈다. 이대운 사장은 “델파이가 GM대우와 관련이 깊어 타 자동차회사에 납품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라며 “앞으로는 GM대우보다 현대와 기아가 더 큰 고객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기적으로 그는 GM과 비GM의 영업비율을 50대 50까지 끌어올린다는 청사진을 내비쳤다. 그는 델파이코리아의 목표를 확실히 정해두고 있다. 자동차부품회사의 살길을 모듈화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 사장은 “하나의 자동차에는 2만여 개의 부품이 필요한데 최근에는 이들 부품을 기능별로 묶어서 수백 개의 모듈로 공급하는 추세”라며 “이 때문에 자동차 부품도 시스템통합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런 시스템을 합치면 하나의 자동차가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현대모비스, 보쉬 등 쟁쟁한 경쟁자 속에서 델파이코리아가 국내 자동차업체에 모듈부품을 공급할 수 있으려면 원가 경쟁력만이 최대 무기라고 그는 믿는다. 최근 들어 세계 자동차시장은 좋은 물건을 얼마나 싸게 공급하느냐가 기업의 생존 조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동차산업에서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고객 입장에서 보면 값이 더 중요하므로 기술은 항상 값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며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비싸서 가격경쟁력이 없으면 고객이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편 2000년 커먼레일 기술을 보유한 루카스사를 인수한 델파이는 2006년까지 디젤차가 전세계적으로 25%, 유럽은 50%에 이르는 등 시장규모가 폭발적으로 늘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델파이는 최근 수요가 늘고 있는 한국에서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더욱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설 계획이다.
영사기 수집가 김동일 “구식 영사기는 숨쉬는 예술품.. 2004-12-23
서울 연희동의 주택가. 조그마한 간판에 ‘PLUS’라는 글자가 있고 그 안쪽으로 허름한 작업장이 보인다. 건물 구석 유리 너머로 보이는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 꽤 오래됨직한 구식 영사기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하얀 담배연기 피어오르고 그 밑에 ‘도리구찌’를 삐딱하게 쓴 김동일(49세) 씨가 앉아 있다. 모으다, 고치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 김동일 씨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한 번도 다른 일은 한 적이 없다. 하지만 한 번도 일에만 만족한 적도 없다. 그러는 과정에서 영사기, 그것도 오래된 구식 영사기를 만났고, 지금은 그 매력에 푹 빠져 매니아가 되었다. 김동일 씨의 컬렉션을 보자. 구식 영사기가 250여 점, 영화필름이 200여 편, 영화포스터도 200∼300여 장 된다. 그렇다고 여기저기서 고풍스런 인테리어 소품을 수집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영사기들 중 90%가 작동된다. 고장난 영사기는 직접 고쳤고, 부품이 없으면 똑같은 영사기를 사서 두 대, 때로는 세 대로 한 대를 만들었다. 구식 영사기가 김동일 씨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85년 무렵. 한 카페의 인테리어 공사를 맡으면서 영사기를 인테리어 소품으로 들여놓았다. 그 고풍스런 느낌이 좋아 두어 대를 사서 두었다. 그러다가 ‘괜찮은데 한번 모아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모으기 시작했다. 수집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수집벽 자체는 새삼스럽지 않았다. 우표, 옛날 돈, 카메라, 수석도 거쳤다. 수석은 몇 년을 모으다가 아는 사람 다 줘버렸다. ‘죽어 있는 돌’은 아무리 예뻐도 별 의미가 없다고 느끼던 때였다. 하지만 영사기는 달랐다. 고치고 필름만 걸면 그 골동품의 생명력이 빛나기 때문이다. 영사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모든 시간의 퇴적지인 황학동에서 시작해 전국일주는 물론 해외경매까지, 영사기를 구할 수 있다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3년 정도 지나자 영사기들이 꽤 모였다. 어느 날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든 생각. ‘이 영사기로 다시 영화를 볼 수 있을까.’ 그러려면 영사기를 고쳐야 하고, 필름을 구해야 했다. 영사기는 직접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기를 했나, 영사기를 만져 보기를 했나. 할 줄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기름범벅으로 보낸 지 5년 만에 영사기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부품 이름은 모르지만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무슨 기능을 하는지는 훤해졌다. 무성영화를 본 적 있는가. 김동일 씨가 무성영사기를 돌리자 ‘끄르르릉’거리며 돌아간다. 처음 영사기로 필름을 돌렸을 때, 김동일 씨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희열은 대단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살아 있는 예술품이구나.’ “다 내 새끼들인데, 소중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어요?” 많은 영사기들은 각자 나름의 사연을 지니고 있을 터, 가장 아끼는 영사기를 묻자 김동일 씨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까닭에 아침에 출근하면 한번 주욱 둘러보고, 퇴근할 때면 다시 한번 훑어본다. 영화포스터 넘겨보는 것도 재미나다. 깊은 눈동자가 매력적인 젊은 시절의 숀 코네리가 그려진 ‘멀고먼 다리’와 이제는 고인이 된 이주일 주연의 ‘평양맨발,’ 반항아적 기질이 넘치는 젊은 시절의 말론 브란도가 나오는 ‘워터프론트.’ 모두 사람이 직접 그린 그림인지라 느낌이 색다르다. 오대산에 영사기 박물관 짓는 것이 꿈 오대산 인근의 영사기 박물관. 오대산 부근이 고향인 김동일 씨가 지닌 꿈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박물관’은 아니다. 그에게 영사기는 생명이 없는 ‘박물 영사기’가 아니라 시간의 흔적을 안고 한 시대의 영상을 보여주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아빠 손을 잡고 온 아이가 직접 영사기를 돌려 아빠 어렸을 적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김동일 씨의 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다. ‘박물관’이라는 명패를 붙이려면 영사기도 500여 대는 있어야 하고, 그 중에는 요새 쓰이는 32mm 영사기도 있어야 한다. 필름도 정리하고 더 확보해야 되고, 포스터도 더 많이 모아야 한다. 현재 가장 큰 숙제는 개별 영사기의 이름과 특징을 알아내는 것. 그래서 틈만 나면 부족한 자료나마 보고 또 보면서 공부를 한다. “연희동에서는 전두환, 노태우 다음이 김동일이라오(웃음).” 썩 내키진 않았지만 신문과 방송에 몇 차례 나간 다음부터 제법 유명해졌다며 농담을 던진다. 그가 인터뷰를 하고 방송에 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행여 영사기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까 기대하는 것이다. 영사기를 만나면 ‘총각, 처녀를 만나듯’ 가슴이 뛰고, 영사기를 사러 가는 길도 두근두근거린다는 김동일 씨. 구식 영사기에는 시간의 흔적뿐만 아니라 그의 땀과 정성도 함께 스며 있다.
부부 스쿠버다이버 최승훈·양혜경 “물 속에 있을 때.. 2004-12-23
올림픽공원 수영장 다이빙풀. 한 쌍의 남녀가 잠수복을 입고 있다. 차분하게 잠수복을 입고 오리발을 차는 모습이 제법 전문가 같다. 반복되는 사진 촬영에도 계속 오리발을 저으며 물의 기운을 만끽하는 이들의 표정에서 행복함이 묻어난다. 물이 좋고, 바다 밑 풍경이 너무도 보고 싶어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했다는 최승훈(42세)·양혜경(40세) 부부. 광대하고 흐릿했던 신비의 세계 처음 보았던 동경의 세상은 흐릿했다. 실내수영장에서 연습을 하면서 내내 그려 왔던 세상이지만 첫인상은 흐릿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다 속 세상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뿌옇던 바다는 시퍼렇던 겉모습과는 달리 따스하게 다가왔다. 이들 부부가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5월. 스쿠버다이빙 교실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보고 나서다. 그 전부터 텔레비전에 나오는 물 속 풍경을 보고 막연하게 ‘한번쯤 눈으로 직접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신문기사를 보고 그 길로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게 되었다. “스쿠버다이빙 하기 전엔 주말에 집에만 있었어요. 마음은 굴뚝 같은데 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최승훈 씨는 원래 운동을 좋아해 농구도 즐기고 아내와 탁구도 쳤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시들해졌다. 그러다 스쿠버다이빙을 만났다. 망설임 없이 스쿠버다이빙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물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파’ 최승훈 씨는 꽤 오랜 기간 수영을 했고, 아내 양혜경 씨도 2년 가까이 수영을 배워 물이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수영을 잘 하는 것과 스쿠버다이빙은 달랐다. “장비가 몸에 익숙해져야 물 속에서 편해요. 그런 다음에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요.” 복장과 장비가 완벽해야만 스쿠버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까닭에 장비에 대한 믿음과 익숙함은 필수다. 처음 바다에 들어갔을 때, 내려가는 동안 장비에 대한 걱정으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산소통은 잘 연결되었을까, 공기는 충분할까, 오리발은 잘 신었을까…. 잠시 후, 무중력이나 다름없는 물 속에서 공기통의 무게도, 다이빙 수트의 압박도 사라진 다음에야 지금까지 뭍에서 보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스쿠버다이빙 교육을 마치고 처음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오픈워터’(open water)라고 한다. 오픈워터의 기억. 최승훈 씨는 “별로 무섭지는 않았고, 모든 게 신기했죠”라고 떠올렸고, 양혜경 씨는 “처음엔 무서웠지만 금세 편해지더군요, 굉장히 좋았어요”라며 웃었다. 운동을 좋아해 수영을 하다가 다이빙이 하고팠던 남편과 실내수영장에서만 배워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아내. 이 둘은 첫 경험의 기억을 떠올리며 ‘맞아, 그때 그랬어’ 하는 눈빛을 나눈다. 살짝 들여다본 자연의 속살에 감탄 “자연은 정말 위대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넓은 바다, 다이버가 본 세상은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 속살 한 조각마저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들 부부가 남해 매물도 앞에서 새삼 몸으로 느낀 진리였다. 그러면서도 늘 같은 모습으로 있는 자연이기에 더욱 매력적이었다. 이들의 스쿠버 실력은 중급(advanced). 고급(rescue)이나 마스터(master)가 목표는 아니다. 그렇다고 대충 즐기다 ‘시들해지면 말고’ 하는 식도 아니다. 그저 스쿠버다이빙을 즐기고, 열심히 하다 보면 자연스레 고급 수준을 거쳐 마스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올해 중학교 1학년인 지원이와 초등학교 3학년인 원준이에게도 스쿠버다이빙을 가르칠 생각이다. 좋은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고, 무엇보다 가족이 함께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다이빙을 하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므로 아이들은 수영을 배우고 있다. 부부는 원준이까지 다이빙복을 입고 온 가족이 스쿠버다이빙 할 날을 기대하고 있다. 요즘은 날씨가 추워 투어가 어렵다. 그래서 이들은 올림픽공원 수영장의 다이빙풀에서 스쿠버다이빙 연습을 하고 있다. 매주 시간을 내기 어려워 한 달에 두어 번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내년 투어를 대비한 훈련이지만 연습 자체로도 즐겁다는 두 사람.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녹여 버릴 수 있고, 평소에 볼 수 없는 색다른 세계도 볼 수 있다. 체력 소모가 커서 운동도 되고, 공기방울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는 절대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도 있다. 게다가 좋은 사람들이 있어 바다를 오가는 길이 즐겁고, 맛난 음식에 부부금실까지 좋아지니, 다른 레저에는 눈길이 가질 않는다. 최승훈·양혜경 부부는 스쿠버다이빙에 푹 빠져 있다. 취재 협조 : 산호수중 (02)478-2663
포르쉐 아시아태평양 A/S 매니저 Andreas Kli.. 2004-12-20
6세대 포르쉐 911(코드네임 997)이 지난 11월 10일,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 데뷔 무대는 서울 성동구 용답동에 자리한 포르쉐 서비스센터. 고급 스포츠카의 데뷔 무대로 뜻밖일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어울릴 장소도 없을 것 같았다. 고객들과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장소인데다, 그 자체로 완벽한 ‘포르쉐 공간’이기 때문. 포르쉐로 시작해 포르쉐로 끝나는, 오직 포르쉐뿐인 그 곳에서 신형 911의 한국 론칭을 알린 이는 포르쉐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 애프터 세일즈 매니저인 안드레아스 클링글러 씨. 대학 졸업 이후 줄곧 포르쉐에서만 일해온 서른 여섯 살의 이 엔지니어는, 한마디로 ‘포르쉐 맨’이었다. 최고의 브랜드에 걸맞은 최상의 서비스 공대에서 테크니컬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지난 1986년 포르쉐에 입사한 클링글러 씨는 품질 관리 등 메커니즘 관련 분야에서 만 18년의 경력을 쌓아온 전문가다. 포르쉐의 첫 SUV 카이엔 개발팀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독일 본사를 떠나 싱가포르의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로 옮겨온 때가 2001년 9월. “애프터 세일즈 매니저로서의 일은 힘들지만 자부심을 가질만한 분야입니다. 애프터 세일즈는 생산과 판매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받고 있으니까요. 브랜드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분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겁니다.” 포르쉐의 엔지니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정확하고 꼼꼼하게 자신의 일을 설명하는 말투와 태도가 전형적인 엔지니어답다. 간간이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 않는 모습에서는 차분함과 열정이 함께 전해온다.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로 온 뒤 대여섯 번 방문했다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그의 견해는 꽤나 우호적인 편. “한국인들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잘 교육받은 듯한 인상을 줍니다. 열정적이고 브랜드나 품질에 대한 집착도 상당해요. 그런 면에서 보면, 911이야말로 한국인들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카로서 최고의 엘리트 브랜드인데다 최상의 품질과 열정적인 전통까지 갖고 있으니까요.” 무엇에 대한 얘기든 결국 포르쉐와 911로 이어가는 말재주가 능란하다. 911은 카레라와 카레라 S 등 두 가지 자연흡기 버전과 터보로 엔진 라인업을 구성한다. 터보가 있음에도 자연흡기 엔진을 굳이 두 가지로 나눈 것은 전적으로 고객 본위의 결정. “복스터와 911, 카이엔 등 포르쉐의 모든 모델들은 노멀과 S의 두 가지 자연흡기 엔진을 갖추고 있습니다. 앞으로 등장할 포르쉐 차도 모두 그런 식의 엔진 라인업을 지닐 거예요. 엔진뿐 아니라 보디 스타일 등 디테일도 세분화해 나갈 겁니다. 가능한 한 다양한 엔진으로 고객들의 선택 범위를 넓혀주는 것은 포르쉐 미래 방침의 핵심이지요.” 노멀과 S로 엔진 라인업을 나눌 때는 단순히 배기량과 출력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그에 따른 서스펜션과 브레이크 세팅, 시트 조절, 에어로 파트 구성 등 세세한 부분까지 체크해야 하므로 그 과정에서 기술력 향상이라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단다. “신형 911은 40여년 역사상 최고의 모델이라고 자부합니다. 그 오랜 세월 포르쉐는 크고 작은 변화를 시도해왔지만, 911 본연의 컨셉트는 단 한번도 건드린 적이 없어요. 신형 911은 소중하게 지켜온 컨셉트의 정수입니다. 남성적이고 공격적이면서 스포티한 스타일링에 고유의 수평대향 엔진, 완벽한 서스펜션 등 최강의 조건을 다 갖춘 차지요.” 포르쉐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중대사건 중 하나는 카이엔의 등장. 정통 스포츠카 고객들만 대하던 포르쉐의 세일즈와 마케팅은, 카이엔의 데뷔와 함께 100% 달라졌다. 클링글러 씨는 카이엔을 가리켜 포르쉐 스타일의 패밀리카라고 정의한다. 고성능과 가족 여행, 출퇴근 등 일상적인 모든 용도에 맞춰 쓸 수 있는 차라는 말. 장거리 드라이빙을 즐길 때는 911을, ‘포르쉐 표’ 운전재미를 최대한 맛보려면 복스터를 타보라고 말한다. 미드십 엔진의 환상적인 퍼포먼스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것. “최상의 브랜드임을 자부하는 만큼, 포르쉐 고객들에게는 최고의 애프터 세일즈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한국의 서비스센터도 세계 공통의 포르쉐 컨셉트에 맞춰 지어졌어요. 시설과 실력 모두 완벽합니다. 바닥의 타일 하나까지도 쇠뭉치를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도록 시공했을 정도니까요. 그래도 힘든 수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가 책임집니다.” 전 세계 스포츠카 팬들을 사로잡은 포르쉐의 매력은 철저한 애프터 세일즈 서비스에서 완성된다는 게 클링글러 씨의 주장이다. 최상의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작품’에는 그에 걸맞은 수준의 사후 관리가 뒤따르게 마련이라는 말을 듣다보니 포르쉐 오너들이 부러워졌다. 최고의 스포츠카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한 직원들이 세계 최고의 기술과 장비로 성심 성의껏 돌봐주는 차를 타고 있어서다.
미쯔오까 코리아 권중혁 경영대표 “명품 수제차가 무.. 2004-12-14
10월 18일 일본의 소규모 수제차 전문 제작업체인 미쯔오까가 국내에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날 미쯔오까 코리아는 가류Ⅱ와 누에라를 선보였고, 내년 5월 2도어 로드스터 라세드와 2006년 수퍼카 오로치를 들여오겠다고 밝혔다. 1979년 설립된 일본의 10번째 자동차 메이커인 미쯔오까는 완성차를 기본으로 클래식한 스타일의 차를 선보이는 독특한 업체다. 소량 판매로 명품의 가치 이어갈 계획 소량 생산을 고집하기 때문에 일본 거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수제차가 국내에서 얼마만큼 평가받을 수 있을까. 이 같은 물음에 미쯔오까 코리아 권중혁 경영대표는 “이제 한국 자동차시장도 이러한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고 답한다. “미쯔오까 차의 디자인은 정말 개성 있고 아름답습니다. 판에 박힌 스타일의 수입차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유혹일 것입니다. 본사 디자인센터에는 소규모 자동차 메이커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15명의 디자이너가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열정과 특유의 철학이 만나 탄생한 차가 바로 미쯔오까입니다.” 1987년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 일본으로 건너간 권 대표는 10여 년간 일본에서 닛산 딜러를 하다 미쯔오까와 손을 잡았다. 미쯔오까와 닛산이 특별한 제휴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쯔오까 본사 스스무 회장 역시 닛산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만큼 미쯔오까와 닛산의 관계는 각별하다. 그래서 자연스레 대부분의 생산 차종이 닛산 모델을 베이스로 하고 있다. 권 대표는 ‘명품’으로서의 미쯔오까를 강조한다. 미쯔오까는 수작업으로 차를 만들기 때문에 대량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고, 이 때문에 희소성이 높다. 권 대표는 처음 본사 스스무 회장을 만났을 때 “올해 100대를 판매하면 내년에는 90대를 팔아야 한다”는 스스무 회장의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명품으로서의 가치를 유지하려면 적게 만들고 판매 조건도 까다로워야 한다. 이는 미쯔오까를 먼저 산 사람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는 스스무 회장의 소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희소성이 명품의 절대조건은 아니겠지만, 여기저기에서 같은 디자인의 제품이 눈에 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반감되는 것도 사실이다. 명품의 또 다른 조건(?)인 값에서도 미쯔오까는 만만치 않다. 보디의 주를 이루는 FRP 패널의 제작과정은 불량률이 30%에 이를 만큼 까다롭고 복잡하며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차값이 양산차보다 비쌀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 수입모델은 일본 내수용과는 뼈대가 전혀 달라 값이 더욱 비싸다. 가류Ⅱ를 예로 들면, 일본 모델은 세드릭을 베이스로 만들고 2.5X와 3.0X 엔진을 얹지만, 국내 수입모델은 올해 선보인 인피니티의 최신 모델인 M45를 베이스로 V8 4.5X 엔진을 얹는다. 겉모습만 같을 뿐 일본 내수 모델보다 한 급 위인 셈.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국내 시장에서 주력 모델로 내세웠던 누에라(8천800만 원)보다 차값이 1억5천400만 원이나 하는 가류Ⅱ가 벌써 20여 대 계약되었을 만큼 반응이 좋다고 한다. 권 대표는 “가류Ⅱ를 선택한 고객 중에는 벤츠 S클래스나 BMW 7시리즈를 타던 이들이 많다”고 말한다. 즉 고급 수입차를 이미 타보았고, 6억∼7억 원대의 마이바흐나 롤스로이스 뉴 팬텀 등으로 바꾸는 것은 부담스러운 이들이 ‘1억∼2억 원대의 새로운 차’로 구미에 딱 맞는 미쯔오까를 선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명품은 브랜드 자체가 지니는 독창성과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 초창기 미쯔오까는 클래식한 재규어 등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자체 디자인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그 의지의 표출이 바로 수퍼카 ‘오로치’다. 오로치는 큰 뱀에서 영감을 얻은 매우 독특하고 공격적인 스타일의 스포츠카로, 개발비만 200억 엔(약 2천억 원) 이상이 들었다. 엄청난 개발비를 감안하면 많이 팔아야 수지타산이 맞겠지만 희소성을 통한 ‘명품’을 지향하는 철학 때문에 2006년에 겨우 20여 대를 생산할 예정이다(2007년에는 아예 생산 계획을 잡아놓지 않고 있다). 권 대표는 2006년 국내에 5대만 수입할 수 있는 오로치 가운데 한 대를 자신의 차로 ‘찜’해 놓았다. 그 비싸고 귀한 차를 팔아서 이익을 남기기는커녕 본인이 타겠다고? 아참, 깜박했다. 그가 미쯔오까 코리아의 경영인이기 이전에, 차를 굉장히 사랑하는 골수 카 매니아라는 사실을 말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 섬세한 감성, 인간에 대한.. 2004-11-19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48). 서울 도산공원과 마주앉은 카페 ‘느리게 걷기’에서 그를 기다렸다. 지금 발을 올려둔 플로어도, 등 뒤로 서있는 바도, 머리 위에 펼쳐진 시원한 천장도 그가 손수 디자인하고 짜 맞춘 것들이다. 몸 전체가 차분하고 아늑하게 보호받는 느낌. ‘아마도 그윽하고 심도 깊은 눈을 하고 목소리 또한 낮고 그윽하리라’ 상상했던 그 공간의 창조자는, 하지만 첫 등장부터 떠들썩하다. 웃음소리는 유쾌하고 그 표정 또한 개구지다. 얼굴에 ‘나, 활달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고, 머리는 까치집이 되어 있다. 동양적 정서 접목한 인간을 위한 디자인 “오늘 새벽 6시까지 작업했어요. 잠시 실례. 여기~! 스파게티 줘. 응? 빨갛고 제일 맛있는 거 있자나. 응, 그래 그거. 아직까지 밥도 못 먹었거든요.” 모 백화점에서 기획한 전시회의 인테리어를 작업중이라는 마영범 씨. 자연과 동양적인 정서, 개인적인 감수성을 접목한 그의 디자인은 국내 인테리어 업계에서 단연 주목받는 ‘마영범 스타일’로 구분된다. 경희대학교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자신의 인테리어 디자인 사무실(So Gallery)을 세운 지 어언 14년이 됐건만 그는 지금도 그림을 그리던 경험을 바탕 삼아 AB형의 방식으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낸다. “건축 디자인은 30~40년, 더 멀리는 100년 이상까지도 바라보는 기능적이고 공학적인 설계 방식이에요. 반면에 인테리어는 생명이 그리 길지 않고 경직되어 있지도 않아요. 사람과 구조물, 사람과 사람이 피부를 맞대고 체온을 나누는 매우 친밀하고 감성적인 공간이지요. 건축처럼 꼭 기능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인테리어 디자인의 우선 순위는 인간에 대한 풍부하고 섬세한 이해입니다. 디자인은 개인적인 창작물인 동시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거든요.” 디자인이 사회를 변화시킨다? 디자인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그의 지론은 ‘책임 있는 디자인 운동’의 창시자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디자이너 빅터 파파넥(1926~1998)으로부터 기인한다. “디자인의 사회성과 환경성을 부르짖었던 분이에요. 알래스카에 사는 에스키모를 예로 들어볼까요? 그들은 개 썰매가 유일한 운송수단이었지요. 하지만 스노모빌이 알래스카에 소개되면서 에스키모의 행동반경은 무한대로 넓어졌고 혈연관계로 맺어진 그들의 민족사회는 붕괴를 맞이했습니다. 인간편의를 위해 디자인된 제품이 역으로 인간사회를 와해시킨 셈이지요.”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출발한 대화는 어느새 디자인의 사회적 효용성과 프로덕트 디자인을 거쳐 인터뷰어가 몸담고 있는 분야, 자동차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누가 디자인으로 먹고사는 사람 아니랄까봐 마영범 씨는 칫솔 하나라도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야 골라 쓴단다. 하물며 고가의 자동차라면 디자이너로서의 ‘미적 기준’은 더욱 엄격해질 수밖에 없을 터. 덧붙여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에게 ‘디자인은 곧 라이프스타일’이다. “서른 즈음에야 처음 차를 갖게 됐는데, 그게 혼다 비트였어요. 지난 5년여 동안은 아우디 TT를 타고 있습니다. 컨셉트카를 그대로 양산화한 TT의 디자인은, 프로덕트 디자인계에 있어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지요. 하지만 TT를 사고나서는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기능과 미 둘 중에서 디자인의 우선 순위를 꼽으라면 언제나 미를 우선하던 제가 깨끗하고 예뻐서 이 차를 모시고 있더라고요. 그때 디자인의 효용성에 대한 참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언제나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인간을 위한 디자인, 그리고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동양적인 정서에 주목하고 차가운 하이테크 대신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로테크(low-tech)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디자인의 근간이 되어온 ‘디자인의 사회적 효용성’을 떠올린다면 자동차 인테리어나 산업디자인계의 거장 필립 스탁을 능가하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의 마영범을 그려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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