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정선선 간이역, 쓸쓸한 이별의 노래 별어곡에서 구절.. 2005-05-16
이역 하면 왠지 정겨운 느낌이 밀려온다. 간이역은 역장이 없는 역을 말한다. 역무원이 있으면 배치 간이역, 역무원이 없으면 무배치 간이역이라 부른다. 시속 300km를 넘나드는 고속철도가 다니는 경부선에도 곳곳에 간이역은 있다. 대부분이 간이역으로 이루어진 가은선, 북평선, 옥구선, 정선선 등은 가보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낯설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비둘기호 열차가 다녔다는 정선선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 태백선 증산역에서 갈라지는 정선선은 이제 흔적만 남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역할이 미미하기 이를 데 없다. 광산이 붐을 이루던 1960년대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생긴 정선선. 별어곡역에서 구절리역에 이르는 6개의 역은 언제 그런 일이 있어냐는 듯 황량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철길도 폐광과 함께 스러져 가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진부에서 빠져 59번 국도를 타고 계속 내려가면 강변 따라 길 따라 나란히 놓여 있는 철길과 마주치게 된다. 그 철길이 바로 정선선이다. 강원도 정선. 한 때 탄광촌으로 활기 가득했던 이 일대는 폐광이 되어 한풀 꺾이다 못해 축 가라앉아 보인다. 손에 쥐어든 정선 관광지도를 보면 구경할 곳이 많은데 제철이 아닌 탓인지 가는 곳마다 한가롭다. 증산에서 출발한 열차가 처음으로 들르는 곳은 이름도 독특한 별어곡(鱉魚谷)역. 한자표기는 분명 아닌데 이별노래를 떠오르게 한다. 역무원 아저씨라도 만나 볼 요량으로 역을 찾았지만 이미 폐쇄되어 사람의 온기를 찾을 수 없다. 3월 무배치 간이역으로 바뀌었다는 안내문만이 덩그러니 붙어 있다. 정선선은 하루 세 차례 객차 1량짜리 꼬마열차(정식명칭은 정선아리랑 유람열차라고 써 있다)가 다니고 있다. 차표 회수함에 차표 한두 장이 뒹군 것으로 봐서 사람들이 타기는 하나 보다. 텅 빈 역사는 붙잡는 사람이 없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역무원이 없어도 관리는 하는지 방치되어 있지는 않다. 베이지색의 건물과 기와지붕이 부조화스럽지만 정겨움이 배어 있다. 뒤에는 높다란 산이 가로막고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돈다. 아주머니 한 분이 해질녘 막차를 기다리는 듯 플랫폼에 서 있다. 기차가 도착하니 기관사 에게 물건을 맡기더니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버린다. 선평역은 둔덕에 자리 잡고 있어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다. 선평역 또한 별어곡역과 함께 무배치역으로 바뀌었다. 선평(仙坪)은 맑은 샘물이 마을 가운데서 솟아나고 경치가 좋아 신선들이 모여 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저 멀리 높은 산과 그 밑으로 말려 들어가듯 휘어지는 철길을 넘어가면 신선이 사는 곳이 나올 것만 같다. 텅 빈 역사에는 여객 운임표와 배차 시간표만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일하게 역무원이 있는 정선역을 지나면 역시 아무도 없는 나전역이 나온다. 어느 여자대학 미술과 학생들이 그렸다는 도깨비 그림은 화암동굴의 캐릭터란다. 역사 입구 양옆에 달려 있는 자율방범대와 청년회 현판은 기차역으로의 역할을 다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알록달록한 도깨비 그림과 나무 현판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유람열차의 종점인 아우라지역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아우라지는 오대산에서 발원해 흐르는 성천과 임계 중봉산에서 발원하는 골지천이 합류해 어우러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아우라지역부터 정선선의 종점인 구절리역까지는 관광지화 작업을 거쳐 기차 대신 레일바이크가 다닐 예정이다. 역 공사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젠 들을 수 없는 구절리역의 기적 소리 아우라지에서 415번 도로로 갈아타고 쪽 올라가면 정선선의 마지막 역인 구절리역이 나온다. 유람열차도 아우라지역이 종점이어서 아우라지-구절리 구간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교차로의 차단기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다시금 차단기가 내려올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임무에서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인지 그저 부는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다. 구절리역은 폐역이 된 지 오래다. 구절리역도 아우라지역과 마찬가지로 관광지화 공사가 한창이다. 무궁화 열차 두 칸은 카페로 만들려는 듯 개조작업이 진행 중이다. 역에 다다르면 철길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외롭게 서 있는 선로 변경기는 세 갈래 인생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역사를 지나면 철길은 다시금 합쳐진다. 마치 인생을 어떻게 살든 막판에는 한 길밖에 없다는 인생무상의 외침 같다. 합쳐진 후 종착점까지 쓸쓸한 풍경이 계속된다. 누군가 종착점에 올려놓은 돌탑만이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하다. 아직도 저 멀리 갈 곳은 남아 있는 것만 같은데……. 글 | 임유신 사진 | 이명재
상주(尙州) 바람 앞의 자전거 도시 2005-05-16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 보인다…….(중략) 길가에 서 있는 자전거를 보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는 황동규의 시가 떠오른다. 이 시구에는 어떤 중독성이 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4개의 바퀴를 발진시키는 자동차보다 두 발로 저어 2개의 바퀴를 굴리는 자전거가 좀더 땀 냄새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때로 자동차를 두고 자전거를 타고 싶어지는 이유다. 두 발로 바퀴를 굴리는 일은 짐짓 노동의 행위가 연상되기도 한다. 본질은 그럴지 몰라도 자전거의 가장 큰 덕목은 바로 낭만일 것이다. 학창시절,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하이킹’이란 용어가 그렇듯 또는 최인호의 소설 ‘겨울나그네’에서 자전거에 부딪치는 것으로 시작되는 치명적인 사랑처럼……. 그러고 보면 얼마나 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인가. 시원스레 뚫린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길. 고속버스에 앉아 떠오르는 자전거에 대한 단상이 자연스럽다. 바로 자전거의 도시, 상주에 가는 길이므로. 박물관에서 자전거를 타고 남장사에 오르다 전주와 나주의 앞 글자를 따서 전라도가 되었듯이 경상도 또한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그만큼 상주라는 지역이 유서 깊고 비중 있는 곳이었다는 얘기다. 예로부터 상주는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세 가지 흰 것이란 바로 쌀, 목화, 누에고치를 일컬었는데 해방 후부터는 목화 자리를 곶감이 대신 차지하기 시작했다. 상주는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데다 서쪽과 북쪽이 높고 동쪽과 남쪽이 낮은 지형 덕분에 농사철에 볕이 잘 들어 곡식이 풍성했다. 기름진 땅에서 나는 쌀은 진상품이었고 아직도 그 명성을 잇고 있다. 이런 지형적인 조건에다 옛날에는 금과 무쇠도 난 모양이어서 삼국이 자주 싸움을 벌였다. 속리산 가까이 있는 견훤산성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누에치기의 전통 또한 무척 오래 되었다고 전해온다. 고령가야 터였다는 함창읍 증촌리는 신라 시대부터 명주 산지로 이름난 곳이라 한다. 그러나 값싼 화학섬유가 쏟아져 나옴에 따라 힘들게 무명실을 뽑는 모습은 더 이상 보기 어려워졌다. 누에를 치기는 하지만 대부분 번데기 단계에서 팔려나간다. 요즘은 동충하초나 누에가루로 생산되어 많이 팔린다. 최근에는 이 삼백에 하나를 더해 사백의 고장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하나 더 흰 것이란 자전거의 하얀 바큇살을 이름이다. 조금 억지스런 느낌도 있으나 그만큼 자전거는 최근의 상주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확실히 자리 잡은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전거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렇거니와 온 동네에 곶감이 내 걸리는 10월쯤 열리는 자전거축제가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전국에 자전거도시라는 이름을 알린 것이다. 자전거축제가 열릴 시기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자전거를 타고 나와 진풍경을 이룬다하니 그야말로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상주 땅에 들어서 먼저 자전거박물관을 찾았다. 두 개의 바퀴를 형상화한 박물관 건물은 왜소해 보였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자전거 역사 초창기를 수놓았던 진귀한 자전거를 만날 수 있다. 최초의 페달식 자전거라는 K. 맥밀런 자전거나 드라이지네 등은 마치 나무 조각 같은 느낌으로 자전거시대의 향수를 맛보게 해준다. 그밖에 진기한 자전거를 많이 갖춘 수고로움은 알겠으나 좀더 규모 있는 시설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가까이 있는 남장사에 가기로 한다. 박물관에서는 보통 1시간을 기준으로 무상으로 빌려주는데 사람이 많지 않은 평일에는 조금 더 오래 타도 괜찮다. 보이는 길은 평지에 가깝지만 은근한 오르막이 계속 이어진다. 가는 도중 음료수를 사먹으러 들어간 구멍가게의 주인이 “남장사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려면 걸어서 가는 것보다 두 배는 힘들 것”이라고 귀띔한다. 대수롭게 본 것이 화근인 셈이었는데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은 밀면서 또 타면서 간다. 힘은 들지만 모처럼 하이킹하는 기분을 즐긴다. 무엇보다 차들의 통행이 거의 없어 좋다. 가는 길에 남장동이란 마을을 지나는데 맛 좋은 ‘상주 곶감’의 주요 산지가 바로 이곳이다. 이윽고 나타난 남장사는 아담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절이었다. 작지만 무게감이 있고 별로 꾸밈이 없는 경내가 마음에 든다. 신라시대에 세워진 고찰로 남장동을 사하촌으로 두었을 만큼 예전에는 절 경역이 넓었다고 한다. 입구에 새로 지은 건물도 단청을 칠하지 않고 나뭇결 그대로 두어 오래된 건물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극락보전 뒤에 한 그루 서 있는 목련이 활짝 피었다. 그런데 왜 목련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드는 걸까. 목련은 여러 그루가 함께 있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다. 여기 저기 외따로 혼자 서 있는 까닭에 외로워 보이는 것일까. 화사한 꽃잎이 동백꽃보다 더 처연하게 빨리 지고 만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내려가는 길은 자전거 페달을 거의 밟지 않아도 될 만큼 쉽고 상쾌했다. 오를 때 멀게만 느껴졌던 길은 너무 아쉬울 정도로 짧았다. 자전거 붐은 자동차에 밀려 사라지는 것일까 상주 함창 공갈못에 /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줄게 / 이내 품에 잠자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 연밥 따기 늦어가오……. 옛날부터 입으로 전해져 오는 구전가요 가운데 가장 유명한 노래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상주 함창 공갈못 노래’일 것이다. 어떤 노래는 입에 한번 흥얼거리면 하루 온종일 따라붙는 마법에 걸리는데 이 노래 또한 상주 땅을 다니는 내내 달라붙었다. 그 노래를 기억하는 까닭에 시외버스를 타고 공갈못에 가보기로 한다. 양정리에 내려보니 절경이었다는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공갈못 옛터’ 비와 조그맣게 남은 저수지엔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연대만 무성하다. 한쪽에는 공갈못 복원계획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곳 마을사람의 말에 따르면 예산부족을 핑계로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시골과 함께 있는 도시의 동선은 대개 시외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행선지를 바꿀 때는 다시 터미널로 나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동 용포 선산 방면이라 쓰인 버스를 타고 오래된 가옥 양진당이며 오작당이 있는 낙동면 방면으로 나가본다. 너른 들판을 지나는 길 철길 앞에서 버스가 신호대기에 걸려 멈춰 서고 부산행 무궁화열차가 지나간다. 양진당은 복원공사 중인 모습인데 거의 끝났다고 대문 앞에 선 작업자가 말했다. 임진왜란 때 상주 땅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던 조정(1555~1636년) 선생의 살림집 안채이다. 좁은 툇마루가 복도처럼 이어진 안채에 들어서자 마치 요새 같은 방들의 구조가 독특하다. 길 건너편에 있는 오작당은 원래 양진당에 속했던 건물이나 이쪽으로 옮겨왔다. 지금은 11대손이 살고 있는 여염집이다. 인적 드문 조용한 마을에 트럭이 하나 나타나더니 두 사람이 내려 거대한 전봇대를 하나 쓱 뽑아 싣고는 이내 사라진다. 평화로움을 깨는 조용한 사건은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하늘은 건조하다. 먼지는 쉽게 가라앉지 못하고 지상을 떠돈다. 다시 시내로 나와 시민공원이 있는 제방으로 나간다. 북천을 따라 자전거전용도로가 이어진 길이다.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벚꽃나무 사이로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모습이 보인다. 상주는 확실히 다른 어느 지역보다 자전거가 많으며 생활 깊숙이 자리해 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분명 과도기로 보인다. 자칫하면 자전거 도시라는 명성이 퇴색하지 않을까 싶다. 등하교길에 장관을 이룬다는 학생들의 자전거 행렬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드문드문 지나갈 뿐이었다. 택시기사는 이처럼 자전거가 눈에 띄게 줄어든 이유가 외곽순환도로가 뚫리고 자동차가 많아지면서부터라고 말했다. 실제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생들이 시내로 진입할 때는 위태로워 보였다. 시내 한복판의 어떤 자전거도로는 대부분 노점상이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자동차에 밀려 자전거가 줄어드는가 생각하면 씁쓸한 기분이다. 자전거 도시로 상징되는 건강한 생명력의 도시 이미지는 저절로 지켜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도시에 다가서지 못하고 언저리를 돌며 도시미학을 찾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해남·완도 남도 들녘에서 들려오는 봄 오는 소리 2005-04-21
몸과 맘이 따로 놀 듯 입춘이란 날은 봄이 오기 한참 전에 잡혀 있는 것일까. 입춘이 한 달여나 지나도 매서운 추위가 가실 줄 모르니 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올 겨울은 따뜻할 것이라는 전망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던 겨울의 초입, 서둘러 찾아올 봄에 대한 기대를 키운 따뜻한 겨울의 배신이 그리움을 더욱 키웠는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의 잔상이 가시지 않았지만 햇살에 조금씩 따사로워지던 3월초,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남쪽으로 향했다. 추위가 봄을 시샘하는 것인지 봄이 사람들의 기대에 콧대를 세우는 것인지 남도에도 봄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곳곳에 움트는 따사로운 기운은 존재를 확인한 안도감이 되어 가슴속에 남았다. 이국적인 풍경, 신성리 들녘 푸른 보리밭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목포까지 내려간 후 2번 국도를 따라 강진 방면으로 가다 보면 해남으로 이어지는 13번 국도를 만난다. 국도 주변으로는 막바지에 다다른 배추 수확이 한창이고, 씨 뿌리기를 기다리는 붉은 황토밭이 곳곳에 펼쳐진다. 아지랑이와 함께 피어나는 흙냄새를 기대했건만 언 땅이 녹으려면 아직 멀었는지 어렴풋한 냄새만 기억 속에서 피어오른다. 13번 국도를 타고 해남 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좌우로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타고 왔던 길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특히 계곡면 신성리 일대를 가득 메운 푸른 보리밭은 신선하다 못해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커다란 산을 뒤로 한 채 넓디 넓은 푸르른 보리밭이 펼쳐져 있고 그 옆에는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시골풍경은 ‘전형적인’이란 말보다는 ‘소박한’이란 단어를 붙여주고 싶다. 새벽녘에 찾아간 신성리의 보리밭에는 ‘평온함’이란 단어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을 찾기 힘들 정도로 고즈넉한 기운이 감돈다. 새벽녘 볼을 얼얼하게 할 정도로 바람은 찬데도 보리 잎새는 푸르름을 간직한 채 수그릴 줄을 모른다. 성질이 급한 것일까 아니면 고통을 겪어야 성숙한다는 것을 미리 깨달은 것일까. 화사함을 자랑하는 꽃보다 더 어여쁘게 보이는 이유는 황량함에 지쳐 버린 마음속에 푸른 감성을 먼저 심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13번 국도를 타고 위로 올라가다 보면 월출산국립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병풍 같은 월출산의 수려한 풍광 밑으로 차밭이 펼쳐진다. 바로 월출산 강진다원으로, 녹차 만드는 회사에서 경작하는 곳. 가지런하게 정렬된 차나무는 올이 굵은 실로 짠 스웨터처럼 산자락을 덮고 있다. 손이라도 댔다가는 금방 흐트러질 것만 같은 모습. 인공적이긴 하지만 대자연과 어우러진 풍광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아직 새순이 돋지 않은 차나무는 겨우내 풍파 속에 푸르름은 사라졌지만 잎의 모양새만큼은 봄날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차밭에서 내려오는 길, 무위사 앞 논밭둑에서 쥐불 놓기가 한창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둑에 불을 놓고 논밭으로 번지기 전에 재빨리 끈다. 시뻘건 불길이 사방에 넘쳐나고 들녘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하다. 누렇던 논둑은 어느새 새까만 얼룩을 남기며 흉한 몰골을 드러낸다. 봄을 맞이하기 위한 통과의례치고는 너무 혹독한 의식이다. 이러한 혹독함은 흉한 상처를 아물게 할 봄의 따뜻한 마음을 좀더 빨리 불러내고자 하는 바람이기에 너그러이 용서될 수 있을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한 아저씨가 작업하는 분들에게 캔 커피를 돌리다 사진 찍고 있는 사진기자에게도 하나 건넨다. “전 아닌데요”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슨 상관있냐는 듯 씩 웃으며 “그냥 받아요”라며 건네는 손길이 정겹기만 하다. 갔던 길을 되돌아 13번 국도를 타고 완도로 내려갔다. 완도교를 지나 우회전한 다음 쭉 내려가다 수목원 표지를 보고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완도수목원에 다다른다. 완도수목원은 난대림을 대표하는 수종인 동백나무, 붉가시나무, 후박나무, 황칠나무 등 상록활엽 자생수림이 2천여ha에 분포하고 있다. 국내 유일의 천연난대식물의 자생지인 지역특색을 살린 난대수목원이다. 동백 군락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건만 동백꽃 구경이 쉽지가 않다. 수목원의 근사한 정취는 동백에 대한 미련을 금세 잊게 해주었다. 수목원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는 동안 계속되는 푸르름은 남도에 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육지와 섬, 바다 그리고 수목원을 가득 메운 나무들. 녹음이 짙은 봄날의 그것에는 미칠 수는 없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멋이 서려 있다. 봄을 찾아 내려간 남도기행은 기대감만 잔뜩 키운 채 끝났다. 햇살은 따사로웠지만 대지는 아직 봄을 맞이할 채비를 끝내지 않았다. 좀 있으면 화사하게 꽃 피우고 푸른 새순이 돋아나는 본격적인 봄이 시작될 것이다. 한두 달 뒤에 다시 들르고 싶다는 바람이 강하게 솟구쳐 올랐다. 이런 바람도 태동하는 봄의 기운을 미리 느꼈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글 | 임유신 사진 | 임근재
김제(金堤) 들녘의 불길, 그리고 지평선을 보다 2005-04-18
이른 봄의들녘은 무한정 쓸쓸했다. 아직 푸른 싹을 피어내지 못한 땅은 황량하기만 했고 존재는 이유를 드러내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길은 어디선가로 와서 또 어딘 가로 이어지는데, 문득 어디로 가야하나 흔한 산도 하나 보이지 않는 이곳은……. 고개를 돌리면 어느 방향에서나 산이 보이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바로 김제에 온 것이다. 이곳 김제에 온 날, 전국은 먹구름에 휩싸였다. 라디오에서는 서울의 낮이 칠흑처럼 어둡다고 했다. 그런 날의 분위기는 몇 번 경험한 적이 있다. 대낮이지만 자동차들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는, 왠지 술 한잔 하고싶어지는 그런 분위기에 대해 DJ는 자꾸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먼 나라에서 고국의 방송을 듣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만 들렸다. 군산까지 올 때만 해도 어두웠던 하늘은 김제에 닿자 푸른 하늘로 변했다. 마치 차트를 넘기듯 하늘의 색과 풍경은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다. 다행한 일이지만 왠지 이상한 예감이 드는 것은 왜였을까. 징게맹게 외배미들 지나 금산사 가는 길 인구 11만 명을 조금 웃도는 김제는 도시보다는 농촌의 이미지가 더 많다. 89년 김제군의 일부가 시로 승격되었고, 95년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되어 지금에 이른다. 도시의 골격을 갖춘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익산, 군산, 옥구, 전주와 이웃한 김제는 이쪽 전북지방이 대개 그렇듯 백제의 유적과 미륵신앙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서쪽으로 바다와 면해 있는 한편으로 드넓은 평야가 펼쳐지는가 하면 동쪽으로 노령산맥의 줄기인 높이 794m의 모악산(母岳山)이 솟아 있어 금산사, 귀신사 등 여러 절을 거느리고 있다. 말하자면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만경강과 동진강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들 하천연안에 김제평야, 만경평야 등의 넓은 평야가 발달해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둘을 합쳐 김만평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란 바로 김제, 만경평야의 너른 들을 뜻한다. 들에는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뭉게구름으로 피어나는 하얀 연기와 더불어 춤을 추는 불꽃이 이제 긴 겨울을 보내고 들에 봄을 재촉하고 있었다. 해마다 풍요를 기원하는 이 너른 들은 한때 수탈의 대상지였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한 것도 벚꽃터널로 유명한 전군가도가 열린 것도 모두 김제들녘의 곡식을 수탈해가기 위해 일제가 만든 것이었다. 금산사는 호남고속도로 김제IC 아래 금산사 IC가 따로 있을 만큼 이름난 절이다. 금산사는 스스로 미륵을 자처했던 후백제의 왕 견훤이 말년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아들들에게 유폐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유명한 절집이 대개 그렇듯 금산사 초입에는 식당가가 꽤 큰 규모로 자리하고 눈썰매장까지 들어서 어지럽기만 하다. 그래도 절에 오르면 보이지 않겠지 하고 내처 올라간다. 관리소에서 입장료를 내고 몇 발자국 오르자 떨어져 나간 석성의 일부가 나타난다. 다른 흔적은 모두 없어졌으나 홍예문의 형태는 온전히 남아 있는데, 견훤이 쌓았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까닭에 견훤석성이라 불린다. 이어서 나타나는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의 일주문은 요사이 새로 만든 듯하다. 어디서 저렇게 큰 나무를 구해왔을까.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앞에 보이는 건물이 보제루인데 현수막이 하나 걸려 있다. 내용인즉 KBS 등 방송국 중개소의 모악산 정상 불법점유를 규탄한다는 것으로 빨리 철거하라는 것이다. 약간 고개를 숙이는 자세로 보제루 아래로 난 계단을 오르면 탁 트인 마당이 나타나며 오른쪽으로 금산사의 상징인 3층 미륵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낯익은 풍경인데 만수산 무량사와 비슷한 모양의 가람 때문이다. 백제계 건물의 공통점과 주변 분위기도 비슷한데 차이라면 무량사는 2층이라는 점. 아무튼 겉에서 보면 3층이지만 안에는 하나로 탁 트여 있고 미륵삼존입불이 모셔져 있다. 경내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보리수나무 옆으로 육각다층석탑이 보인다. 화강암이 아닌 점판암으로 만들어 특이하고, 언뜻 보기에 기와를 쌓아놓은 듯 질박한 모습이지만 몸돌마다 새긴 불상 등 장식적인 요소가 많다. 미륵전 옆으로 높은 대가 있는데 이 일대를 방등계단이라 부른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부도와 오층석탑, 사천왕상을 비롯한 돌로 만든 인물상들이 늘어서 독특한 분위기를 낸다. 여기서 보는 미륵전이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가장 좋다. 다시 마당 왼쪽 대장전 쪽으로 천천히 걷다가 그 뒤로 대숲 가까이 다가서니 바람에 서걱대는 대숲소리가 풍경소리와 어울려 파도처럼 몰려온다. 귀신사는 그 이름이 주는 어감이 별로 좋지 않지만 돌아올 귀(歸), 믿을 신(信) 자를 쓴다. 금산사에서 3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가볍게 둘러볼 수 있다. 청도 마을회관 옆 골목으로 따라 여러 채의 집들을 지나가면 귀신사를 알리는 나무표지가 나타난다. 그런데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만 보일 뿐 절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대적광전의 보수공사가 그 컨테이너 안에서 진행중인데 쓸만한 것만 남기고 완전히 새로 해체, 복원하는 대공사다. 새로 만들고 나면 옛 모습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괜한 걸음을 했나 돌아서다 아쉬움에 다시 발길을 돌려 돌층계를 오른다. 삼층석탑과 석수가 보인다. 풍경은 적막했다. 오래된 거리, 부용역에 나가 지평선을 보라 너른 평야를 가진 만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가 이곳 김제에 있다는 것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김제 시내에는 많은 저수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부량면 월승리(月昇里)에는 330년 처음 축조된 벽골제가 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의 배경이 김제인 까닭에 벽골제 기념관의 휑한 주차장 한쪽에 아리랑 문학비가 서 있고 한쪽에는 문학관도 들어서 있다. 옛 수문을 제외하면 스산하기만 한데, 지평선축제가 열리는 가을이면 발 디딜 틈 없이 인파가 모여든다고 한다. 지평선을 조망하는 포인트가 되는 지점인데 황금들녘이 펼쳐지는 가을에 오면 모를까 영 감흥이 없다. 지평선을 보기에는 전봇대가 너무 많고 멀리 낮은 구릉이며 집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망해사에서 일몰을 보려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런데 빗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은 안개에 포섭되어버렸다. 안개 속에서 가로등은 더 위력적이었다. 안개는 때로 지저분한 풍경을 근사하게 바꿔놓기도 한다. 말 그대로 바다를 볼 수 있는 망해사에 닿았을 때 바다는커녕 요사채도 희미하게 잘 보이지 않았다. 인적도 고양이도 한 마리 없는 분위기가 기묘하게 다가왔다. 안개는 발가락 깊숙이 스며들었다. 만경강은 완주군에서 시작되어 이리시 남쪽을 지나 김제와 익산, 군산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서해로 들어간다. 만경강 물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곳에 심포항이 있는데 바로 망해사 부근이다. 망해사를 나와 심포항에 간다. 안개에 휩싸인 포구는 횟집들의 불빛만이 반짝거렸다. 여기서 바다는 좀 더 잘 보였다. 이런 날씨에도 배를 띄우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밝은 날이면 이곳에서 수평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갯벌도 그 속살을 드러낼 것이다. 진봉반도 끄트머리께 이곳 거전마을의 거전갯벌은 군산에서 김제, 부안에 걸친 새만금 갯벌의 일부이다. 다음날 아침 안개는 개었다. 김제는 시가지나 마을 풍경이 그리 변화가 없는 편이다. 그래서 골목 어귀는 정감 있는 표정을 보여준다. 호남선이 지나는 부용역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1914년 호남선 개통 당시부터 문을 열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부용역 일대에선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주택이나 김만평야의 쌀이 부려졌던 도정공장이며 창고 등이 많이 남아있다. 벽골제보다 이곳에서 보는 평야며 지평선이 한층 아스라하게 다가온다. 만경강 유역으로 나가본다. 지난 세월 전북 지역 주민들의 삶의 원천이자 생활 공간이었던 만경강은 오늘도 변함없이 물길을 따라 흐르며 평야지대의 젖줄이 되어주고 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두 개의 다리. 1933년에 지어진 만경대교는 노후화로 인한 붕괴위험 때문에 1988년 바로 옆에 새로 건설한 신 만경대교에게 그 역할을 넘겨주었다. 옛 만경대교 위에 드리워진 난간의 그림자 너머로 강에 내려 비치는 빛살과 배들이 보인다. 그리고 갈대숲, 구름 사이로 융단처럼 쏟아지는 햇살이 마치 성화 속의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만경강 가의 저물 무렵 풍경을 보지 못한 것은 시간 탓으로 돌려야 한다. 어제 저녁에서 밤사이 지독한 안개에 홀렸기 때문일까. 푸른 낮의 기억보다 머릿속에는 자꾸만 안개가 가물거렸다. 무언가 실체가 없는 허상을 본 느낌은 김제에 대한 아스라한 기억을 남기고 꼭 다시 와야한다는 어떤 의무감으로 남았다. 누군가 던져 발 앞에 풀어진 넥타이처럼 길은 그렇게 발 앞으로 다가왔다.
목포(木浦) 목포는 유달산이다 2005-03-31
목포는항구다라는 영화가 있다. 조재현, 차인표라는 배우가 나오는, 그러나 영화의 주무대가 목포라는 것을 빼놓고는 어떤 멋진 풍경이나 감흥을 보여주지 못했다. 괜찮은 배우를 데려다놓고 왜 영화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반면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는 지금 들어도 가슴이 울린다. 그녀의 대표곡인 ‘목포의 눈물’과 함께 1940년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그 노래는 이렇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유달산 잔디 위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어두운 그늘 벗은 항구도시. 더 이상 눈물은 없다 아무튼 ‘목포의 눈물’이 상징하는 것처럼 목포는 오랫동안 어두운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80년대의 시인 문병란이 ‘목포’라는 시에서 ‘더 갈 데 없는 사람들이 와서/동백꽃처럼 타오르다/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중략)/끝끝내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목포는 자살보다/술맛이 더 어울리는 곳/술이 취해서 봐도/술이 깨어서 봐도/유달산만 으렁으렁 이빨을 가는구나’라고 했듯이 애잔함을 넘어 어둡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목포는 이미 오래 전에 삼학도가 육지가 되어버렸듯이 많은 것이 변했다. 변증법적인 변화야 필요한 것이지만 항구의 정취마저 사라진 것은 아쉽지 않을 수 없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종점이자 KTX 호남선 종점으로 목포의 분위기는 이전보다 많이 밝아졌다. 그러나 인구가 좀체 늘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빠지고 있다는 데 목포사람들의 고민이 있다. 목포역에 내리면 바로 번화한 시가지다. 건널목을 건너 상가가 밀집한 골목길을 헤집어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면 큰 봉우리 같은 게 나타나는데 바로 노적봉이다. 유달산 산행의 시작 지점이다.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세로 적을 이기기 위해 봉우리 위에 짚을 쌓아 군량미처럼 보이게 했다는 유래를 안고 있다. 말하자면 군사전략상의 허장성세(虛張聲勢)다. ‘목포의 눈물’ 노랫말에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일제 때 이게 빌미가 되어 금지곡이 되고, 발음이 비슷한‘삼백연(三柏淵) 원안풍(願安風)’으로 바꿔 나오게 되었다는 웃지 못할 얘기. 일본의 이순신 콤플렉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민동종’이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쓴 편액이 걸린 종각에 서면 앞으로 바다가 뒤로는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종각 뒤 바위 언덕에 오르면 가려져 있던 풍경이 드러난다. 초원관광호텔이 보이는 뒤로 이제 뭍이 되어버린 삼학도가 보이고, 그 앞의 물길이 운하처럼 시내로 들어오는 끝에 배들이 정박해 있다. 인근 섬으로 다니는 여객선 터미널이 이곳에 있다. 영산강이 흘러드는 이곳 앞바다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108일 동안이나 진을 쳤다는 길다란 섬 고하도와 영암 삼호, 대아산, 달리도, 외달도, 장화도 같은 섬들이 들어차 있어 파도나 바람을 억누르는 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바다가 잔잔하다. 목포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고하도의 용두귀범(석양에 만선을 이룬 60~70척의 배가 서로 끊기지 않고 꼬리를 물고 들어오는 풍경)이라는 것인데, 요즘은 예전처럼 고기잡이가 되지 않는다. 얼마 있으면 이곳으로 다리가 연결될 예정이란다. 유달산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입장료를 내라 한다. 이순신 동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파수병인 양 작은 대포가 하나 있는데 오포대라 쓰여 있다. 구한말과 일제 때 이 포를 쏘아 정오를 알렸다. 오포대 앞에서 만난 문화유산해설가 한 분이 유달산의 내력을 들려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유교가 도달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유달산이라는 것. 중국 항주와 가장 가까운 거리가 바로 이곳이란다. 마한 이전에 이곳으로 진나라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중국 어선들이 태풍을 피해 주변 섬으로 피신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자연 교류가 많았다는 설명이다. 목포사람들의 반은 신안과 관련되어 있고, 이중 반은 무안, 또 반은 영암 하는 식으로 진도, 해남까지 주변 지역과 목포의 관계가 깊다. 영암 땅에 있는 아산을 두고 이르는 아산춘우(봄 아산에 아지랑이가 올라오고 봄비가 내리는 풍경)가 목포팔경의 하나에 드는 이유다. 여수, 순천을 별도로 하고 서남부지역의 중심지로서 목포의 역할이 큰 것은 비단 도시규모만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밀접하기 때문. 그래서 인근 지역과 도시통합을 희망하는 분위기가 있다. 유달산이 지금의 모습으로 갖춰진 것은 20여 년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는 오막살이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러던 것을 바위와 바위 사이 틈에 굴착을 하고 나무를 심었다. 목포 인구가 24만 명인데 당시 2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한다. 그러자 새가 날아오기 시작했고, 이제 물도 생길 조짐이다. 유달산이 목포의 자랑인 이유는 가난한 도시의 시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이루어 냈다는 자긍심 때문이다. 유달산 정상인 일등바위까지는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한다. 그래봐야 30분이면 오르지만. 가는 길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시가지를 바라보며 서 있다. 노래비 주변에는 그녀의 노래가 끊이지 않고 나온다. 지나는 등산객 아주머니가 “이난영이가 콘서트를 하네”라며 노래를 따라 흥얼거린다. 아직도 이난영을 친숙하게 여기고 있다는 표시다. 사실 목포사람들의 자랑은 유달산만이 아니다. 이난영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애정은 오래고 깊다. 1969년 전국 처음으로 노래비가 세워졌다는 것과 그녀를 추모하는 이난영 가요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는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유달산 정상에 서서 다도해를 바라보다 노령산맥에서 뻗어 나온 마지막 봉우리인 높이 228m의 유달산 정상에 오르면 다도해가 펼쳐진다. 서해 끄트머리에 가깝긴 하지만 마치 남해 같은 풍경이다. 섬들이 아른거리며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른 때문이다. 아직 차가운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의 기운은 이렇게 꿈틀거리며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내려오는 길은 등산로를 따라 샛길로 빠졌다. 언덕 위의 오래된 집들은 목포항 개항 초기부터 조성되어온 목포1번지로 불리는 동네. 목포항은 인천항, 부산항, 원산항에 이어 1897년에 개항되었고, 일제가 강점한 이후 식민지 거점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때 광주시보다 경제사정이 앞서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 항구로서의 기능이 바뀜에 따라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지리적인 이점을 살려 중국과의 교역에 새로운 기대를 안고 있다. 이훈동정원을 지나 아랫길로 내려오면 동양척식회사 건물이 있는 골목 주변으로 일본식 가옥들이 몇 집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목포문화원이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일제 때 준르네상스양식으로 지었다는 장방형의 2층 건물은 시립도서관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박화성 문학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삐걱거리는 나무층계를 올라 문을 열면 이태리 대리석으로 만든 벽난로와 그때 쓰던 거울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목포가 낳은 예술가들이 적지 않은데 한국현대문학사 최초의 여성작가인 박화성 씨를 비롯해 극작가 차범석, 김지하 시인 그리고 동양화가 남농 허건 씨 등이 이곳 출신이다. 목포문화원 축대를 따라 돌계단을 오르면 다시 노적봉이 나오고 유달산이다. 목포는 물론 항구다. 그러나 이제 목포는 유달산이라 해야 옳을 듯하다. 서울 어느 곳에서 보아도 남산이 보이듯 목포는 어느 방향에서나 유달산이 보인다. 그리고 남산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고 쉽게 다가설 수 있으며 또 넉넉하게 받아준다. 언제든 올라 발아래 탁 펼쳐지는 다도해를 볼 수 있으니 시름은 쉬이 바람에 날려버릴 수 있겠다. 그래서 목포는 유달산이다. Z
남쪽 바닷가로 꽃구경 가자 붉은 동백과 아련한 매화.. 2005-03-28
거제시 지심도 동백 하늘에서 바라보면 마음 심(心)자처럼 생겼다는 곳, 지심도. 두세 시간이면 동백숲에서 동박새처럼 날아다니며 일상사 잊고 지낼 수 있는 꿈 같은 섬이다. 섬이라고는 하나 의외로 가깝다. 거제도 동부의 장승포항에서 도선을 탄다. 직선거리로 6km 정도, 선착장을 출발한 배는 20분 만에 지심도에 닿는다. 동백의 절정기는 3월 초∼중반 지심도는 난대림 수목원이라 할 수 있다. 지심도를 뒤덮고 있는 수목은 후박나무, 대나무, 소나무, 동백나무 등 37종에 이르며 특히 숲 전체면적의 60∼70%가 동백나무다. 이런 연유로 지심도는 동백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동백숲은 동박새만 불러모으는 것이 아니다. 동백꽃은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번갈아 피고지면서 외지의 연인들을 유혹한다. 3월 초순에서 중순까지가 절정기이다. 많은 여행객의 시선이 한려해상국립공원 유람선과 외도해상농원에 쏠릴 때도 지심도는 아무 말 없이 동백을 피워내고 연인들의 방문을 받아 준다. 지심도의 동백꽃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선착장-민박집 사잇길-폐교 앞-활주로-유자밭-폐교로 이어지는 길을 일주해 본다. 인정미가 뚝뚝 묻어나는 민박집들도 지나고 동백꽃잎들만 운동장을 지키는 폐교도 하나 스쳐가고 정상부의 방위건물에 닿는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설치한 포대 같은 진지는 정상부의 동녘 아래에 있다.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도 보인다는 곳이다. 바닷가 갯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감성돔을 노리는 꾼들의 낚싯줄이 바닷바람 속에 언뜻언뜻 보인다. 동백숲길은 활주로로 이어진다. 동서 길이 500m, 남북 길이 1.5km, 가장 높은 지점의 해발이 97m에 불과한 이 작은 섬에 활주로가 있다는 것이 기이하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인들이 경비행기의 이착륙을 위해 닦았을 것이다. 봄볕이 화사하게 내리쬐는 활주로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장승포에서부터 지세포만, 일운면 땅이 골고루 눈에 들어온다. 한 민박집 위뜰에는 지금 유채꽃이 피어나 동백꽃과 함께 지심도의 봄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컹컹 짖어대는 진돗개 소리도 꽃바람 속에서는 고향 언덕에서 휘날리는 풀피리 소리처럼 들려온다. DATA 지역번호 055 홈페이지 : 거제시청 www.geoje.go.kr 문의 : 거제시청 문화공보담당관 639-3208 가는 길 : 장승포동사무소 옆의 지심도행 도선장(682-2233, 681-6007, 선장 김재곤 011-835-2276)에서는 오전 8시, 12시 30분, 오후 4시 30분 등 하루 세 차례 배가 출항하지만 여행객이 많으면 오전 10시 30분, 오후 2시 30분 선편이 추가된다. 지심도에서는 오전 8시20분, 12시 50분, 오후 4시 50분에 장승포항으로 출항한다. 왕복 배삯은 7천 원. 주변 명소 여차-홍포 해안 : 꿈결 따라 찾아간 지심도 동백꽃 여행을 마친 뒤 거제도로 이동해서 꼭 가볼 곳은 거제도 최남단의 여차마을과 홍포로 이어지는 비포장 해안도로이다. 해안도로 드라이브의 낭만을 살리려는 뜻에서 일부러 포장을 하지 않고 있는 길이다. 진달래꽃, 제비꽃, 생강나무꽃 등이 군데군데 피어 봄꽃 여행의 의미를 한껏 살려준다. 이 해안도로에서는 병태도, 매물도와 소매물도 등의 다도해에 박혀 있는 자그마한 섬들이 눈에 가득 들어와 시심을 불러일으킨다. 외도 : 자연과 예술이 조화를 이뤄 ‘남해의 낙원’이라고도 하는 외도해상농원은 1995년 4월 개장, 사계절 내내 많은 여행객들이 방문한다. 해금강을 조망하기에 좋은 이 섬에는 늘 은은한 음악이 흐르고 다양한 포즈의 조각작품과 잘 지어진 건물이 방문객을 반기는가 하면 아열대풍의 정원수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산책코스가 봄나들이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 준다. 왼쪽 섬 비탈길로는 각종 정원수가 빽빽하고 반대편 평지에는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을 축소해 놓은 듯한 ‘비너스가든’이 자리잡고 있다. 외도를 방문하는 해상관광유람선사는 장승포유람선사(681-6565), 구조라유람선사(681-1188), 학동유람선사(636-7755), 해금강유람선사(633-1352), 와현유람선사(681-2211), 해금강해양공원(632-8787) 등. 맛집 신현읍에 선향낙지마당(낙지전골, 635-2589), 독로횟집(활어회, 635-8842), 장승포동에 항만식당(해물뚝배기, 본점 682-3416, 분점 682-4369) 등. 항만식당 해물뚝배기는 20여 가지 해산물을 풍성하게 넣었으며 칼칼한 국물 맛이 살아 있다. 숙박 애드미럴호텔(옥포동, 687-3761), 거제관광호텔(신현읍, 632-7002), 장승포비치호텔(장승포동, 682-5151) 등. 펜션으로는 필그림펜션(681-2268), 학동몽돌펜션(011-884-9286 ), 마로니에펜션(632-7467), 솔레미오펜션(633-4243), 윤들펜션(681-0521) 등. 완도군 보길도 동백 봄을 시샘하는 한풍 속에서도 빨갛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동백은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희망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동백꽃 명소로 여행을 떠난다. 그 여로에 어울리는 시가 한 수 있다면 발걸음은 더더욱 가볍다. 완도군에 딸린 섬 보길도를 찾아가는 카페리 안에서 서정주 님의 ‘나의 시’를 음미해 본다. ‘어느 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친척의 부인을 모시고 성 안 동백나무 그늘에 와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 듯이 앉아 계시고/ 나는 풀밭 위에 흥건한 낙화가 안쓰러워 주워 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 놓았습니다.’ 윤선도 유적지와 예쁜 다도해 풍경 세연정 등 고산 윤선도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보길도는 봄에 찾아갈 경우 동백꽃도 감상할 수 있는 여행지이다. 청별선착장에 당도한 뒤 세연정의 동백부터 감상한 다음 북부에서 서부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 보옥리 해변으로, 보죽산으로 찾아가면 곳곳에 동백꽃 군락이 미소를 머금고 손님을 반긴다. 조선 인조대왕이 청나라에 항복한 것을 한탄하며 고산 윤선도는 세상을 등지겠다는 마음으로 제주도로 향한다. 보길도를 지날 무렵 폭풍을 만나 잠시 상륙했다가 그만 산수절경에 취해 정착하기로 결심, 마침내 찾아낸 거처가 부용동이다. 윤선도는 51세에 보길도에 첫발을 디딘 이후 85세 때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부용동에 머물면서 ‘어부사시사’와 32편의 한시를 남겼고 전통 조경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연정’을 건축했다. 청별선착장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1.5km 가면 부용동의 초입인 세연정에 닿는다. 세연이란 ‘주변 경관이 깨끗하고 단정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세연정 건물을 중심으로 수령이 제법 오래된 동백숲이 울창하다. 연못 위에 떨어진 동백꽃과 뒤편 보길초등학교로 이어지는 오솔길에 우수수 떨어진 동백꽃을 감상하다 보면 여행객들은 저마다 시인이 된다. 보죽산의 위용이 대단하게 여겨지는 보옥리 해변 입구에도 동백숲이 짙은 숲그늘을 드리운다. 보죽산(195m, 일명 뾰족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좌우로도 동백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DATA 지역번호 061 홈페이지 : 완도군청 wando.jeonnam.kr 보길도닷컴 www.bogildo.com 문의 : 완도군청 문화관광과 홍보담당 550-5227 가는 길 : ①완도군 화흥포항(555-1010)에서 소안농협(553-8188∼9)의 보길도행 카페리 하루 8∼9회 운항, 1시간 10분 소요. 소안농협 보길대리점 553-2555. 완도공영버스터미널에서 화흥포항까지 소안농협의 셔틀버스 무료 운행. ②해남 땅끝선착장 해광운수 소속 카페리 하루 8∼9회 운항, 40분 소요. 땅끝매표소 533-4269, 보길매표소 553-5632. 보길도내에는 버스가 3대 운행되고 있다. 버스회사 553-7077. 주변 명소 장도 : 완도 본섬에는 일주도로가 잘 닦여져 있다. 완도연육교를 건넌 다음 왼쪽 13번 국도로 방향을 잡으면 청해진유적지인 장도부터 들르게 된다. 완도읍 장좌리 앞바다의 장도는 통일신라시대의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북아 해상무역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섬이다. 썰물 때는 걸어서 들어갈 수 있으며, 목책성과 판축토성 등의 유적을 살펴볼 수 있다. 장도는 섬 전체가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지도 : 완도항 맞은편의 섬은 신지도다. 2005년말 완도읍과 신지도를 잇는 신지대교가 완공되어 섬 방문이 수월해진다. 신지도의 명사십리해수욕장은 여름철이면 피서객들로 크게 붐빈다. 남향을 한 곱디 고운 모래밭이 이름 그대로 10리에 걸쳐 뻗어 있으며 모래찜질을 즐기기에 좋다. 면소재지에서 월양리로 넘어가는 독계령 고개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신리 마을 풍경과 명사십리, 신지도 최고봉인 상산(324.1m) 등이 시원하게 보인다. 문의 신지면사무소 550-5605. 맛집 보길면 부황리에 섬마을가든(활어회, 매운탕, 553-6727), 청명회관(활어회, 552-8506), 호반식당(활어회, 553-6220), 청별리에 보길도아가씨가든(활어회, 555-2775) 등. 완도읍 개포리 완도항 부근에 보고수산(조개구이, 555-2746), 완도버스터미널 근처에 대도한정식(한식, 554-3537) 등. 숙박 윤선도 유적지 주변에 황원포횟집민박(553-6353), 동천다려민박(554-2858), 어부사시사민박(553-5019), 보길민박(553-6776), 삼일민박(553-6533) 등. 예송리에 선숙이네횟집민박(553-7176), 쉼터민박(553-6419), 보옥리에 김철한민박(554-3807), 보옥민박(553-6650), 중리에 갯마을횟집민박(553-6947) 등. 해남군 보해매원 매화 매화꽃의 명소라면 전남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의 청매실농원이 우선 떠오른다. 해남군 산이면의 보해매원은 그보다 늦게 유명세를 타게 된 매화 감상 명소다. 해남읍내 서북쪽에 영암호와 금호호로 휘감겨 낙지 머리 모양을 한 산이면이라는 고장이 있다. 여유롭게 꽃구경 할 수 있어 대부분의 땅은 황토구릉지대다. 배추밭과 보리밭이 초록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틈틈이 부지런한 농부들이 잘 갈아 놓은 황토밭이 보일 때면 빌딩숲의 그림자에 가위눌려 있던 여행자들은 환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가도 가도 녹색과 황토색만 교차되는 산이면 땅의 중간쯤, 예정리라는 마을에 매화꽃 가득한 별천지가 숨어 있다. ‘보해매원 해남농원’이라는 곳이다. 영암방조제와 해남읍을 잇는 806번 지방도에서 간판을 따라 구불구불 1.8km를 가면 매화 세상과 조우한다. 매화꽃단지 가장자리에는 붉은 꽃망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동백나무가 3천여 그루나 심어져 있어 선홍색의 동백꽃 감상은 덤으로 얻는다. 마침내 매화단지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관리사에 도착, 옥상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매화요, 바람에 날리는 것은 매화꽃잎이다. 농원의 규모는 무려 14만 평. 국내 최대의 매화꽃 감상지 아닌가. 매화나무단지 사이사이로 경운기며 작업차가 돌아다닐 길이 만들어져 있다. 발품 팔며 매화꽃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되새겨 보기에 좋은 길이다. 이 농원은 전남 무안 출신으로 보해양조를 창업했던 고 임광행 선생이 가꾼 매화 과수원이다. 2002년 작고한 임광행 선생은 해남땅이 매실재배에 적합하다고 판단, 1978년 14만여 평에 달하는 국내 최대규모의 매실농원을 조성했다. 현재 이 농원에서는 1만4천여 그루 가량의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곳 보해매원은 광양의 섬진마을과 비교했을 때 인파에 부대낄 일 없이 한적하게 매화꽃을 감상할 수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눈이 내린 듯 하얀색 일색인 듯하나 가까이 서면 상아색, 분홍, 연분홍 등 고운 빛깔들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춘다. 관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사방 어디를 가건 매화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고, 터널 밑에 들어서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 꽃비가 우수수 쏟아진다. 매화꽃을 감상할 때 꽃가지를 꺾는 일은 절대금지. 문의 (061)532-4959 DATA 지역번호 061 홈페이지 : 해남군청 www.haenam.go.kr 문의 : 해남군청 문화관광과 530-5229 가는 길 : 목포시와 영암군을 잇는 영산호하구둑을 건너는 것이 매화를 만나러 가는 여행길의 단초. 이어 대불방조제 영암방조제 코스를 달리고 산이면으로 들어간다. 산이면소재지를 지나 해남읍내로 3km 가량 향하다 보면 보해농장 팻말이 보인다. 주변 명소 미황사 : 바위 능선이 발달, 해남의 금강산이라고도 하는 달마산(489m) 중턱에 자리한 미황사는 우리나라 내륙의 절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사찰이다. 송지면 해원리와 현산면 월송리를 잇는 한적한 시골길 중간에 절로 올라가는 길이 열려 있다. 자그마한 저수지에 이르러 고개를 들면 공룡의 등줄기처럼 하늘로 삐죽삐죽 솟은 달마산이 머리 위에 솟아 있고 그 바위 군상 아래에 절집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게 된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 의조화상이 인도에서 불상과 경전, 탱화, 나한 등을 싣고 온 왕과 만난 뒤 지금의 자리에 절을 지었다. 주요 전각으로 대웅보전(보물 제947호)와 응진전이 있으며 동쪽 10분 거리의 동백나무와 소나무숲 속에 부도밭이 있다. 말 없이 미황사의 역사를 들려주는 부도밭은 여러 절집의 부도밭 가운데에서도 특히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다. 대흥사 : 고려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두륜산 대흥사는 영화 ‘서편제’의 주요 촬영장소이기도 했다. 영화 중 송화(오정해)와 동호(김규칠)가 고목나무 위에서 사랑가를 연습하던 장소가 대둔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 중간에 있고 유봉(김명곤)이 춘향가를 부르던 유선여관이 절 입구에 있다. 집단시설지구에서 경내까지 이어지는 십리 숲길. 굽이굽이 계류를 따라 걸어가는 산길이라 지루한 줄 모른다. 한번의 심호흡만으로도 세속의 때가 씻겨 나가는 느낌이 든다. 참나무, 느티나무, 동백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고로쇠나무, 전나무 등이 신선한 호흡을 도와준다. 맛집 삼산면 구림리에 전주식당(표고전골, 산채정식, 532-7696), 해남읍 평동리에 용궁해물탕(해물탕, 535-5161), 해남읍 해리에 국향정(갈치찜, 낙지탕, 532-8922), 해남읍 연동리에 캐빈레스토랑(경양식, 536-9774), 장수통닭(닭 한마리, 536-4410) 등. 숙박 해남관광호텔(533-9002), 사파이어모텔(537-4825), 워커힐모텔(533-1119), 프린스모텔( 536-6255), 전원장(534-2500), 목화장모텔(537-6655), 궁전모텔(537-1067) 등.
짧은 봄의 아쉬움, 꽃으로 달래고… 이 봄에 가볼 .. 2005-03-28
입춘과 우수는 지난 지 오래고 겨울잠 자던 동물들이 깨어난다는 경칩이 내일 모레다. 가끔 때늦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기도 하지만, 해는 길어졌고 바람의 찬 기운도 많이 가셨다. 사람들의 옷깃은 아직 두텁지만 남녘에는 여린 꽃줄기들이 동장군을 몰아내고 꽃을 피웠다. 한라산의 복수초는 얼음 속에서 노란 얼굴을 내밀었고, 지리산 부근에서는 산수유나무가 꽃망울을 머금었다. 전남 광양 매화축제 3월 12∼20일 사군자 중에 봄을 상징하는 것이 매화다. 섬진강은 지리산을 곁에 두고 흐르다가 화개장터를 지나면서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룬다. 화개장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전남 광양시 다압면이 나온다. 매화마을로 유명한 이곳에서 3월 12일(토)부터 20일(일)까지 매화축제가 열린다. 매실 명인으로 유명한 홍쌍리 씨가 운영하는 청매실농원이 있어 다압면은 아예 매실의 본고장으로 자리를 굳혔다. 청매실농원 뒤편의 낮은 구릉에 매화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이곳을 걷노라면 하얀 꽃구름 같은 매화의 향에 취하게 된다. 올해로 9회째를 맞는 매화축제에는 농악과 풍물, 품바 공연 등의 전통 공연과 밸리댄스, 스포츠댄스, 재즈댄스 등의 댄스 공연도 열린다. 13일에 열리는 보물찾기는 모든 참가자가 함께 할 수 있는 이벤트다. 볼거리들은 주로 토, 일요일에 열리므로 여유 있게 매화를 감상하고 싶다면 평일에 찾는 것이 좋다. 축제기간 중에는 백운산 작설차도 맛볼 수 있다. 매화마을을 찾아가려면 섬진강 따라 뻗어 있는 19번 국도에서 화개장터 앞에 있는 남도대교를 건너 하동·진주 방면으로 861번 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섬진교 못 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으면 매화마을이 나온다. 남해고속도로 하동 나들목이 가깝다. 문의 : 다압면 사무소 (061)797-2607 www.maewha21.co.kr 전남 구례 산수유꽃축제 3월 19∼27일 봄꽃에는 노란색이 잘 어울린다. 봄을 맞은 지리산 아래 상위마을은 노란 꽃망울들로 가득하다. 이 산수유꽃들은 3월 말에 꽃망울들을 터뜨려 마을을 노란색으로 뒤덮는다. 3월 19(토)∼27일(일)까지 산수유꽃축제가 열려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봄소식을 전한다. 산수유나무는 한때 ‘대학나무’라고 불리기도 했다. 늦가을에 열리는 붉은 산수유는 한약재로 쓰여 꽤 좋은 수입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산수유꽃은 좁쌀만한 꽃 수십 개가 모여 다시 하나의 작은 꽃을 이루는데, 산동면에는 수십만 그루의 산수유나무들이 있어 꽃이 활짝 피었을 때는 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4월 중순까지는 꽃을 볼 수 있다. 올해 열리는 축제는 제7회로 50여 개의 크고 작은 행사들로 꾸밀 예정이다. 지역적 특색에 맞게 동편제 판소리 공연이 열리고, 절기에 맞춰 고로쇠약수 마시기 행사도 있다. 가는 길은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목이나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함양 나들목에서 빠져 나와 남원과 구례를 잇는 19번 국도를 탄다. 남원 조금 지나 밤재터널을 통과해 지리산온천을 찾으면 된다. 반대 방향에서는 섬진강 따라 19번 국도를 계속 타거나 남해고속도로 서순천 나들목을 통해 17번 국도로 오다가 19번 국도를 찾는다. 문의 : 구례군청 문화관광과 (061)780-2224 www.gurye.net 전남 여수 오동도 동백꽃축제 3월 12∼16일 선운사의 고즈넉함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뒤뜰의 동백만은 변함이 없다. 다른 꽃들은 잎을 압도하여 온통 꽃색으로 주변을 물들이지만 동백꽃은 오히려 짙은 녹색의 잎에 묻힌다. 그래서 붉은 동백꽃을 제대로 보려면 대웅보전 뒤의 동백숲을 찾아 가까이에서 꽃송이를 봐야 한다. 혹은 무리 지어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는 것도 방법이다. 미당은 수만 송이 동백꽃이 지면 그 넋을 위로하려 고창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3월 말이 절정.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나들목으로 나가 22번 국도에서 선운사 방향으로 가면 된다. 충남 서천의 동백정은 500년 된 동백나무가 85그루 있어 천연기념물 169호로 지정되었다. 지역적인 특징 때문에 3월 말에서 4월 말이 절정이다. 동백은 해풍을 맞아야 예쁘다는 말이 실감난다. 동백정에서 바라보는 서해는 그 풍경이 동해와 헛갈릴 정도로 빼어나다.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 나들목에서 나와 춘장대 해수욕장 혹은 서해화력발전소 이정표를 찾으면 된다 오동도에서는 이보다 조금 이른 3월 12일(토)부터 5일 동안 제7회 ‘오동도 동백꽃 축제’가 열린다. 축제기간 중에는 동백가요제와 동백나무 분재 전시회 등이 열린다. 문의 : 여수시청 관광홍보과 (061)690-7064 선운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 (063)563-3450 벚꽃· 진달래·철쭉 넘어 여름으로 꽃이 전하는 봄소식은 겨울 끄트머리인 3월에 가장 반갑지만, 그 후로도 꽃잔치는 계속된다. 봄꽃 축제의 대명사인 벚꽃축제는 4월에 잡혀 있다. 4월의 문턱을 넘어서기가 무섭게 남해안부터 ‘벚꽃전선’이 북상한다. 진해 군항제와 화개장터 10리 꽃길, 섬진강 80리 벚꽃길을 꼽을 만하고 도심에서는 서울 여의도의 윤중로 벚꽃축제가 유명하다. 봄의 절정인 4, 5월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있다. 진달래는 여수 영취산과 대구 비슬산의 진달래가 환상적이지만 산중이니 발품을 팔아야 볼 수 있다. 무형문화재인 두견주(진달래주)가 손짓하는 충남 당진의 면천 진달래축제는 올해로 5회째. 4월 8∼10일에 열린다. 서해안고속도로 당진 나들목을 이용한다. 4월 중순을 넘어가면 철쭉의 향연이 펼쳐진다. 철쭉은 주로 산에 많아 소백산, 지리산 바래봉 등지에서 철쭉제가 열린다. 관악산에서도 철쭉제가 열린다. 철쭉이 지면 여름이다. 봄이 왔나 하면 여름이라 짧아진 봄이지만, 꽃이 피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금세 왔다 가는 봄 동안 전국은 몇 차례 울긋불긋한 물이 들었다 진다. 꽃이 지는 것은 한 순간이라 자칫하면 온통 신록으로 물들 것이니 봄이 짧다 아쉬워 말고 봄꽃 축제를 찾아 봄을 즐겨 보자.
남해안 연육교 3 미지의 섬을 현실로 끌어들인 2005-03-23
앞 가까이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갈 수 없는 곳, 섬. 발을 디디기 전까지 섬은 여전히 환상의 세계로 남아 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혼자 있고 싶을 때, 여생을 한적한 곳에서 보내고 싶을 때 문득 무인도를 떠올리는 것은 환상 속에 자신을 가둬두고 싶은 생각에서가 아닐까. 그 이면에는 누구도 다가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 또한 숨어 있을 것이다. 섬은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대교’라는 이름 아래 뭍과 연결되어 섬이라고 부르기가 무색한 곳이 한둘 아니다. 남해안 일대의 연육교에서는 더 이상의 환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절의 소통이라는 현실만이 남아 있었을 뿐. 서로 다른 모양의 5개 다리가 한데 모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진주 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 순천방향으로 갈아타면 바로 사천 IC가 나온다. 이곳을 빠져나가 3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남해 북동쪽의 단항과 사천의 삼천포항을 잇는 창선·삼천포대교를 만난다. 모개섬과 초양도, 늑도, 창선도 등 네 개의 섬은 징검다리처럼 다섯 개의 다리로 연결되었고 이를 통칭해 창선·삼천포대교로 부른다. 특이한 것은 마치 다리 전시장 마냥 다섯 개의 다리를 모두 다른 공법으로 지었다는 것. 금문교를 떠올리게 하는 삼천포대교는 두 개의 주탑이 우뚝 솟은 사장교다. 모개섬과 초양섬을 잇는 초양대교는 아치를 다리 밑까지 내린 것이 특징.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아 단아한 멋을 풍기는 늑도대교는 초양섬과 늑도를 연결한다. 창선도와 늑도를 잇는 창선대교는 세 개의 아치를 상판에 얹어 마치 피어나는 뭉게구름처럼 보인다. 창선도 안의 단항교는 가장 짧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살포시 숨어 있는 것이 꽤 매력적이다. 바닷가 시골마을에 이렇게 멋들어진 다리가 눈앞에 펼쳐지니 신비롭기까지 하다.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 왕국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랄까. 관광지 분위기지만 계절 탓인지 찾는 사람이 없어 고즈넉하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한려해상의 수려한 풍광은 가슴속을 푸른 바닷빛으로 물들인다. 삼천포대교에서는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어 해돋이 장소로도 유명하다. 새해 첫날에 사람들로 바글거렸을 다리 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 주는 아저씨만이 차가 서지 않나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해질녘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알고 보니 우리나라 9대 일몰 풍경의 하나로 꼽힌다는 그 유명한 ‘실안 낙조’다. 수평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한 섬 뒤로 넘어가는 붉은 해는 운해 속의 산봉우리 뒤로 넘어가는 그것을 보는 듯하다. 해가 지고 나면 삼천포대교와 초양대교, 창선대교는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며 천의 얼굴로 변신한다. 적막한 어둠 속에 유일하게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는 존재감은 나 자신의 존재마저 잊게 만드는 마력을 뿜어낸다. 내가 이곳에 서 있음을 일깨워 주는 잔잔한 파도소리마저 없다면 아로마향과도 같은 은은한 불빛에 취해 언제까지고 다리를 바라보며 서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번잡한 통영대교, 소박한 저도교 통영대교는 통영운하 위에 당동과 보디섬, 미수동을 잇는 총연장 591m, 너비 20m의 다리다.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이제 막 관광지가 된 삼천포대교와 달리 통영대교는 찾아가는 길부터 시작해 곳곳에 도시의 번잡함이 배어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멋을 달리하는 것이 특징. 아파트단지를 배경으로 하는 생활 속의 다리가 되는가 하면 바다가 보이는 한 폭의 자연 풍경을 연출하기도 하고, 운하와 어우러져 관광지다운 운치를 뽐내기도 한다. 통영대교는 다리 자체도 볼만하지만 통영운하와 같이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 통영대교 아래를 지나는 통영운하는 너비가 약 55m로, 원래 육지였던 것을 인공적으로 파서 만든 운하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 패해 도망가던 왜군이 육로를 파 물길을 낸 것이 시초. 이후 1931년 길이 1천420m, 수심 3m의 운하로 정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밤이 되니 통영대교 상판 아치구간 140m에는 반딧불이 모여 있는 것처럼 푸른빛을 낸다. 여기에 운하 주변의 건물과 가로등이 쏟아내는 불빛들이 수면에 투영되면서 아름다움은 극에 달한다. 형형색색의 촛불들이 물속에서 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 손으로 보다듬어 따뜻함을 느끼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 정도로 그 오묘함이 기막히다. 저도교는 한적한 시골마을의 정취가 그대로 살아 있다. 마산시 구복리와 저도를 연결하는 이 다리는 영화 속 ‘콰이강의 다리’와 비슷하게 생겨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라 불린다. 1987년 만들어진 철제 다리로 길이 170m, 너비 3m, 높이 13.5m에 이른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푸른 바다의 풍광은 시원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바로 옆에 새로 생긴 웅장한 다리 때문에 소박한 정취는 묻혀 버려 아쉬움이 남는다. 특색 있는 모양 때문에 ‘인디언 섬머’ 등의 영화도 찍었다지만, 지금은 텅 빈 횟집까지 어울려 황량함이 감돈다. 옛 정취가 더 정겨울 법도 한데 도보여행을 온 듯한 한 무리의 젊은 여행객들은 새로 지은 다리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한다. 슬쩍 쳐다보고 지나치는 그들에게 20년이 채 못된 허름한 다리는 그저 오래된 다리였나 보다. 글 | 임유신 사진 | 정진호
고성 송지호와 화진포호 겨울 호수의 그윽한 정취에 .. 2005-02-25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시인 정지용은 ‘호수’라는 시에서 그리운 사람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호수에 비유해 읊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 다들 바다같이 크기만 한 것일까? “겨울 바다를 찾는 사람은 많아도 왜 겨울 호수는 찾는 사람이 없을까?”라는 물음에 동행한 사진기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황량하잖아” 하고 내뱉었다. 해질녘 도착한 화진포호에서 제일 먼저 반겨준 것은 차가운 겨울바람. 수천 마리가 모여든다는 철새와 고니도 남쪽으로 떠나 버리고 거니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얼음 위로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석양과, 목도리처럼 호수를 두르고 있는 갈대숲, 호수를 다시금 쳐다보게 만드는 전설이 기다리고 있었다. 때묻지 않은 정취 그대로인 송지호 강원도 고성에는 강 하구와 바다가 닿는 곳에 생긴 석호가 두 곳 있다. 송지호와 동해안에서 제일 큰 화진포호가 그곳. 속초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가다 보면 송지호 해수욕장 이정표가 나온다. 구성리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군부대 지나 오른쪽으로 조그만 샛길이 있다. 시멘트로 단정하게 포장해 놓은 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눈앞에 넓은 호수가 펼쳐진다.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송지호는 천연기념물인 겨울철새 고니의 도래지로 알려져 있다. 물빛이 청명하고 수심이 일정해 바닷고기와 민물고기가 함께 살고 있어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낚시를 금지해 겨울 정취를 살려 주는 강태공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포장길을 조금 지나면 흙길이 나온다. 구불구불한 호반길을 갈대를 벗삼아 걷다 보면 야트막한 동산에 서 있는 정자와 마주친다. 정자에 올라서면 너른 호수와 함께 저 멀리 동해바다가 보인다. 고니와 가을 철새들은 이미 떠나 버려 얼어붙기 시작한 호수 위엔 철새의 발자국과 깃털만이 남아 있다. 송지호는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제는 상상 속에 그려봐야 한다. 1996년과 2000년 두 번의 산불이 이곳 소나무들을 휩쓸고 가버렸기 때문. 처음 봤을 때 목장에 온 듯한 이국적인 풍경은 바로 산불이 만들어낸 것이다. 송지호에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조선 초기에 송지호는 비옥한 땅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욕심 많은 부자가 살고 있었다. 성격이 포악하고 인색한 부자는 집에 찾아온 거지 부녀를 흠씬 두들겨 패서 내쫓았다. 부녀의 딱한 모습을 본 금강산의 유명한 고승 또한 정부자의 집에 찾아갔다가 쇠똥만 잔뜩 얻은 채 쫓겨났다. 고승은 쇠절구를 부자의 금방아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쇠절구가 떨어진 곳에서 물기둥이 치솟아 정부자의 집과 금방아간 그리고 논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정부자는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송지호에서 나와 다시 북쪽으로 가다 지하차도 지나 좌회전, 1.5km 정도 가다 보면 왕곡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북방식 전통가옥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은 마을을 둘러싼 다섯 개의 큰 산 덕분에 6·25 때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초가집을 헐어내는 새마을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아 옛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96년 고성산불 때도 이곳에는 불길이 미치지 않았다고. 솔숲과 바다가 빚어내는 절경, 화진포호 왕곡마을에서 나와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화진포호에 닿는다. 호숫가에 해당화가 만발해 이름 붙여진 화진포는 둘레 16km의 동해안 최대의 자연호수다. 해마다 11월이면 넓은 갈대밭에 수천 마리의 철새와 고니가 날아들고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주변경관이 빼어나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호수 주변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이기붕 전 부통령, 김일성 별장 등이 자리잡고 있다. 거의 자연상태에 가까운 송지호와 달리 화진포호는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해 고즈넉한 분위기는 잘 살아 있다. 화진포호는 그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운치 있지만 언덕배기에서 솔숲 사이로 보는 경치도 빼어나다. 특히 7번 국도상에서 보는 호수와 바다와 하늘이 한데 모인 풍광은 얼어서 하얘진 호수와 푸른빛이 감도는 바다의 선명한 대비가 잊지 못할 여운을 남긴다. 송지호와 마찬가지로 화진포호에도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지금의 호수 자리에 열산현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어느 해 큰비가 내려서 마을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좋고 바람이 잔잔해 물결이 일지 않을 때는 옛날 마을터와 담장을 쌓았던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봉이 김선달에 관한 전설도 있다.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고 갈대가 쓰러진 모습이 마치 가을 들녘 같아서 김선달이 서울 부자에게 큰 평야라고 속여 호수를 팔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 화진포에는 옛날 이화진이라는 성질이 고약한 시아버지와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노인은 시주하러 온 스님을 푸대접했고 이를 지켜본 며느리는 미안한 마음에 쌀을 퍼들고 스님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스님은 찾을 수 없었고 며느리가 살던 집과 텃밭은 시퍼런 호수로 변해 버렸다. 며느리는 허망하고 애통해 허리띠를 풀어 목을 매 죽었다. 그후 온 나라에 홍수와 흉년, 전염병이 돌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며느리의 시신을 찾아 분묘를 만들고, 일년에 한 번 서낭굿을 해준 뒤로는 농사도 잘되고 전염병도 사라졌다고 한다. 겨울은 만물을 움츠러들게 한다. 겨울 호수 또한 봄가을의 정취를 떠올리며 찾아갔다가는 실망감에 발자취만 남기고 오기 일쑤. 하지만 바람 한 점, 햇살 하나에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한다면 겨울 호수의 쓸쓸함조차도 멋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글 | 임유신 사진 | 박창완
보령(保寧) 서해 푸른 먼바다, 노을에 지다 2005-02-21
서해에 가면왠지 이별의 정서가 느껴지는 것은 비단 정태춘의 노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해 뜨는 동해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해지는 풍경, 노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떠나는 것이기에 서운하고 또 아련한 것. 겨울 바다는 어디나 쓸쓸하겠지만 서해는 겨울에서야 차디찬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푸르다. 누가 이번 겨울이 춥지 않다고 했던가. 어디 두고보라는 듯 맹렬하게 지속되는 영하의 날씨는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다. 삼한사온은 이제 영 옛말이 되었다. 몹시 추운 날 겨울 바다에는 어쩌면 얼음 기둥이 서 있을지 모른다. 맑고 투명하고 푸른… …. 그 속에 물새는 박제가 되어 있을까. 매운 바람에 떠오르는 상념은 아주 오래 전의 기억으로 데려간다. 빈 절터에서 절집으로, 성주사터와 무량사 도시의 이름은 때로 작은 게 큰 것을 삼키기도 하는 법이다. 보령도 이와 같아서 지난 95년 대천시와 보령군을 합치면서 보령시로 이름을 바꾸었다. 표지판을 보면 보령이라는 지명 옆에 괄호 표시로 대천이라 써 놓은 연유다. 그래서 철도역 이름도 보령이 아닌 대천역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986년 보령군이 보령군과 대천시로 분리되었기에 어쩌면 원상회복의 의미도 있다. 그러나 대천이란 이름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서해 최대의 해수욕장인 대천 해수욕장 때문이다. 바다를 길게 끼고 있는 보령은 부여, 청양, 홍성, 서천 등과 맞닿아 있는데, 차령산맥의 줄기 끝인 성주산에는 한때 충남지역에서 무연탄 산지로 첫손 꼽히는 성주광업소가 들어서 있었다. 지금은 그 터에 석탄박물관이 자리하고 있고, 휴양림 등이 있어 도시인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백제 때 지었다는 큰절 성주사가 있던 터가 이곳 언저리에 있다. 대천역에 내려 먼저 성주사터를 찾아가기로 한다. 역사를 빠져 나와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서 체이스컬트 매장 앞으로 가면 성주 가는 버스가 선다. 도회지를 벗어난 버스는 시골길로 들어서고, 이윽고 버스기사가 일러준 정거장에서 내린다. 미산농협이 있는 삼거리다. 주변 탄좌가 폐광이 된 뒤에 다시 물이 깨끗해졌다는 성주천을 끼고 걷는 길, 개천 아래 갈대숲이며 오래된 나무들이 늘어선 풍경이 좋다. 걷는 맛이 있는 길이다. 바람은 차지만 겨울다운 청명함이 하늘을 더욱 푸르게 한다. 얼마 걷지 않아 시야에 들어오는 탑으로 미루어 성주사터다. 빈 절터에 탑이 있다는 말은 어느 절터에 가나 첫 번째 감상으로 다가온다. 또한 저마다 다른 특색은 분명히 있는 법이어서 그 차이를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된다. 탑도 자주 보면 감흥이 덜한 법인데 성주사터의 탑들은 첫눈에 반듯하게 잘 생겼다는 인상이다. 몸돌 위 처마 끝을 어찌나 날렵하고 우아하게 꺾어 올렸는지 나무를 다듬어도 저보다 잘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빈 절터의 중심을 잡고 있는 5층탑 뒤로 불상의 흔적인 금당터 석조연꽃대좌가 있고, 그 너머 세 기의 삼층탑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 모습이 단아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그 뒤 외따로 서 있는 석불입상이 보인다. ‘코를 긁어 달여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 때문에 얼굴 주변이 마모되어 시멘트로 때웠는데 소박한 표정이 울먹이는 듯하다. 그냥 그대로 두고 보존하면 안되었을까. 예전의 절 규모는 무척 컸을 테지만 이제는 가까이 민가들이 들어서 있다. 어느 집에선가 못질하는 소리가 청량한 바람을 타고 울려온다. 덩달아 개 짖는 소리 공허하게 들린다. 삼거리로 다시 나와 외산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마침 시간표가 맞아 버스는 금방 도착하고 15분 남짓 달려 외산 종점에 닿았다. 마을 어귀에서 무량사까지 2km 거리라는 표지가 붙어있다.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지나는 스타렉스가 절 아래 주차장까지 태워준다. 그이의 말로는 실제 3km거리는 될 것이라 한다. 여하튼 무량사에 온 것이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지은 ‘하여가’(何如歌)에 나오는 그 만수산 기슭에 자리잡은 무량사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부여군에 들어간다. 하지만 만수산이 보령시 미산면과 부여군 외산면에 걸쳐있기도 하거니와 주변 마을 사람들은 굳이 그 경계를 따지려 하지 않는다. 보령에서나 부여 어디서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빈 절터에서 갑자기 절집으로 바뀐 풍경이 어색하지 않다. 공간이 마음에 있다면 현재의 있고 없음은 역시 생각에 달린 문제일 터이다. 겨울 산사의 사람 없는 호젓함은 풍경소리의 쓸쓸함을 더해주는데 마당에 뛰노는 아이 하나의 움직임이 세상을 비추는 빛처럼 환하다. 무량사에서는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2층 구조의 극락전이 인상적인데 건물이 주는 장중함과 더불어 고유하고 은근한 멋이 일품이다. 셀 수 없다는 뜻의 무량사는 극락정토를 지향하고 그 본전 이름이 극락전이다. 개인적으로 절집을 다니면서 하나의 버릇이 생겼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문살 모양을 살피는 것이다. 자칫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조그만 발견에서 얻는 기쁨이 크다. 이곳 극락전의 1층 가운데 쪽으로 조심스레 걸어가 보면 색채는 없어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소슬빗꽃살창을 볼 수 있다. 포구에서 다시 포구로, 대천항 그리고 오천항 대천항 가는 길에 용두해수욕장에 잠시 멈춰 서 바다를 본다. 썰물. 바다는 저 멀리 도망쳐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이 신기루처럼 보인다. 남포방조제와 죽도를 지나고 대천해수욕장을 지나 대천항으로 간다. 대천해수욕장 앞 번화한 거리는 텅 비었다. 모텔 등 숙박업소가 가득한 거리는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구광장은 대천해수욕장이 발전을 시작한 근거지로 그 규모를 넓혀 나간 곳.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항구가 나온다. 먼저 보이는 것은 연안여객터미널이 있는 신항이고 구항은 조금 더 들어가야 한다. 구항은 포구 특유의 어시장 난전이 정겨운 풍경을 드러낸다. 커다란 예인선 검은 굴뚝에 검은 연기가 매캐한 온기를 뿜어내고, 방파제 위로는 길다랗게 조개구이 따위를 파는 천막촌이 늘어서 있다. 천막촌 사이를 걸어 방파제 끝 붉은 등대로 향한다. 천막이 끝나는 곳에 바로 등대의 밑동이 드러난다. 여기가 끝이다. 등대 앞에 서자 비릿한 포구의 전경이며 또 하나의 하얀 등대가 보이고 그 너머로 나란히 선 6기의 거대한 굴뚝이 보인다. 이윽고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인다. 어느새 구름이 몰려왔는지 해가 바다에 떨어지는 것을 가리고 만다. 밤이 내리고 포구의 밤도 얼어붙기 시작한다. 도시의 네온사인은 왠지 따스하지 않다. 어느 가게 앞에서 빈 드럼통에다 나무를 넣고 태운다. 그 불꽃에 손을 녹인다. 바람에 춤추는 불꽃은 한없이 따뜻했다. 뚝딱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니 창 밖 아래가 바로 조그만 선박들을 만들고 수리하는 조선소이다. 지난밤 대천항에서 이곳 오천항에 온 것이다. 포구의 정취를 찾아 이곳으로 온 것은 아니다. 오천항은 백제 때부터 배가 드나들던 유서 깊은 항구이기도 하지만 조선조 충청수군절도사영이 있던 곳으로 그 흔적인 오천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닷가에서 경찰서가 보이는 골목으로 가면 오천성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지금 남아 있는 석문 홍예는 과거 서문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돌을 쌓은 모양이 정연하고, 나무와 집들과 잘 어울려 고풍스런 분위기를 낸다. 홍예를 지나면 진휼청 관아건물이 하나 보이고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공주 공산성을 떠올리는 성곽길이 나타난다. 발아래 오천항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도로가 난 때문에 길은 곧 끊어진다. 2차선 길을 건너 오르면 오천수영 관아건물이 보인다. 담장을 따라 송전탑 쪽으로 가면 끊어졌던 성곽길의 흔적이 이어지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언덕으로 성벽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앞바다에 보이는 보령방조제 위로 성냥갑 만한 자동차가 달리고, 아래에는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오천항 주변의 바다는 내륙으로 감싸있어 호수처럼 잔잔하다. 오천항을 돌아 나가는 길, 어디쯤에선가 버스 차창으로 화력발전소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대천항에서 등대 너머로 보던 그 굴뚝들이다.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는 순간,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문득 초현실적인 느낌에 사로잡힌다.
일출명소 ‘3’ 새해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보며 소.. 2005-01-26
1 경주 대왕암과 감포항 경주시내에서 4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향하면 추령터널을 통과하고 기림사와 골굴암 입구도 지난다. 곧바로 나타나는 양북면 삼거리. 직진하면 감포항으로 가고 오른쪽 길을 타면 감은사지 입구를 지나 대왕암 해변에 닿는다. 새해가 되면 각지에서 찾아온 여행가족들이 이곳 대왕암 해변에 모여 해맞이를 즐긴다. 동해시 바닷가에 추암이 서 있어 일출을 아름답게 만들 듯이 경주시 바닷가에는 대왕암이 자리를 잡아 일출의 감동을 한껏 살려 준다. 대왕암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납골을 뿌린 산골처로 알려져 있다. 대왕암 가운데 문무대왕의 시신이 모셔져 수중릉이라고 일부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라고 역사학자들은 진단한다. 해맞이를 마치고 찾아가는 곳은 감은사지. 문무왕은 부처님의 힘을 빌려 왜구를 물리치겠다며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용당산 양지 바른 곳에 감은사를 세운다. 그러나 완공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신문왕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이름 짓는다. 이 절터에는 동서로 두 기의 삼층석탑이 서 있어 답사객의 발길이 잦다. 대왕암과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감상한 다음 바닷가와 나란히 달리는 31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간다. 이윽고 닿는 곳은 감포항. 등대와 고깃배, 갈매기떼 등 3박자가 잘 어울린 포구다. 밤샘 어로작업 끝에 포구로 돌아온 배에서 싱싱한 생선들이 부려지는 모습을 보자면 문득 시장기가 느껴진다. 포구 뒤편의 좌판 어시장에서 찬 바람 맞으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도시생활의 게으름을 반성해 보기도 한다. 고깃배 사이를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갈매기떼의 분주한 날갯짓을 보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의무감도 배우게 된다. 3일과 8일은 감포장날. 이날만큼은 감포항 뒤편 차도가 내륙에서 온 상인들로 가득 찬다. 바닷가 사람들에게 산나물이며 옷가지가 전해진다. 가위를 쩔그렁대는 엿장수도 신이 나고 말린 가자미, 소쿠리에 담긴 횟감을 파는 포구 사람들도 흥겨운 날이다. 감포항 위편으로는 오류해수욕장이 있다. 파도가 밀려왔다 사라지는 해변, 잠시 산책하기에 더 없이 좋은 해변. 그 겨울바다는 여행객들에게 시심을 불러일으키고 예술가의 혼을 빌려 주기도 한다. DATA 홈페이지 : 경주시청 www.gyeongju.go.kr 문의 :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관광홍보 담당 779-6396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경주시내→보문단지→4번 국도→추령터널→양북면→929번 지방도→대왕암 바닷가 주변 명소 골굴사 : 골굴사는 종종 ‘한국의 둔황석굴’로 비유된다. 거대한 바위산에 12개의 굴을 뚫어 부처를 모시고 벽화 대신 바위에 부처를 새겨넣은 사원이 골굴사다. 수십 미터의 석회암 절벽에 크고 작은 동굴이 군데군데 뚫려 있고, 절벽의 맨 꼭대기에는 충남 서산시의 마애불처럼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마애불(보물 제581호)이 앉아 있다. 오금 저리게 좁은 통로와 가파른 계단을 지나 마애불 앞에 서면 골굴사 주변의 울창한 숲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조망이 탁월하다. 기림사 : 함월산 기슭에 들어선 기림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2년(643)에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창건했다고 한다. 당시의 이름은 임정사였으나 뒤에 원효가 주석하면서 기림사로 개창되었다. 기림사란 부처님께서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인도의 ‘기원정사’를 뜻한다. 한때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릴 만큼 사세가 대단했다. 불국사의 말사가 된 오늘날에도 건칠보살좌상, 대적광전, 지정도삼존불, 소조비로자나삼존불의 복장유물(불상의 배 부분에 넣어둔 유물) 등이 남아 있어 절의 연륜을 짐작케 한다. 양동민속마을 : 안강읍의 양동마을은 우리나라 7대 전통마을 중의 하나다. 월성 손 씨와 여강 이 씨의 씨족마을로 무첨당, 향단, 관가정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것은 손동만가옥(서백당), 낙선당, 이원복가옥, 수졸당, 이향정, 안락정, 강학당 등이다. 옥산서원은 조선 중종대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원이다.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을 두루 답사하고 나면 양반의 초청을 받아 고졸한 한나절 나들이를 흠뻑 즐긴 기분에 젖어든다. 맛집 팔우정 로터리 주변에 해장국집이 많고 구로쌈밥집(쌈밥, 749-0600), 본가966옛날두부(두부보쌈, 744-3303) 등이 있다. 숙박 보문관광단지에 경주현대호텔(748-2233)를 비롯해 경주힐튼호텔(745-7788), 콩코드호텔(745-7000) 등. 시내에 경주장(742-8100), 광림장(749-0086) 등. 2 무안 도리포 ‘땅끝마을’이라는 곳은 언제나 여행자를 유혹한다. 그 끝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호기심을 강렬하게 자극한다. 그래서 해남의 땅끝마을이 유명세를 타지 않던가. 전남 무안군 해제반도의 도리포도 그런 곳 중의 하나다. 무안읍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현경면과 해제면 유월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도리포 가는 길이 시작된다. 7km를 달려 도착한 곳이 함평만 길목을 지키고 있는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다. ‘도로 끝’이라는 표지판이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도리포는 숭어회가 맛있는 곳으로 소문난 포구이다. 도리포에서는 반드시 새벽 일출을 감상할 일이다. 서해안에서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비롭기만 하다. 몇 년 전부터 일출 감상 여행붐이 일면서 서해안에서도 아침 해를 볼 수 있는 여행지가 하나 둘 개발되기 시작했다. 충남 당진의 왜목마을이 가장 먼저 주목을 받았고 뒤를 이어 충남 서천의 마량리가 대열에 끼었다. 그리고 이제는 무안의 도리포도 영광스런 반열에 올라섰다. 도리포에서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특이한 지형 때문이다. 도리포가 자리한 곳은 해제반도의 귀퉁이가 북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끝 지점이다. 도리포는 함평만과 칠산 앞바다의 경계에 자리해 있다. 고깃배들이 정박하는 부둣가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물결 잔잔한 함평만이 넓게 펼쳐지고, 그 뒤로 야산들이 남북 방향으로 줄지어 달린다. 해는 이 야산 위로 솟아 오른다. 수평선 위에서 해가 뜨는 왜목마을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계절이 여름철로 가까워질수록 태양은 남쪽에서 떠오르고 겨울철에는 위치가 북상한다. 동해의 일출은 바다 위에서 불쑥 솟아올라 장엄미를 느끼게 하고 남해의 일출은 아기자기한 다도해의 섬 사이로 떠올라 친근미가 돋보인다. 이에 비해 도리포 등 서해에서 맞는 일출은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 속에 숨은 야산들의 머리 위로 올라와 한 폭의 수묵화를 감상하는 듯한 푸근한 서정미를 안겨 준다. 황금빛 아침 햇살이 함평만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 고깃배 주변에서 단잠을 자던 갈매기들이 일시에 깨어나 삶의 징표인 날갯짓을 연신 해댄다. 주차장도 제법 넉넉하고 선창 주변이 꽉 찼다면 도리포 입구 도로변을 이용해도 좋다. 다만 화장실이나 민박 같은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이 불편한 점이다. DATA 홈페이지 : 무안군청 muan.go.kr 문의 : 무안군청 관광문화과 450-5226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무안 나들목→무안읍 소재지→60번 지방도→현경면 소재지→77번 국도→해제면 유월리→송석리 도리포 주변 명소 법천사 : 목포대학교 뒤편에 우뚝 솟은 산이 승달산(317.7m). 이 지역 사람들은 ‘광주에 무등산, 목포에 유달산이 있다면 무안에는 승달산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승달산을 사랑한다. 승달산 정상에 오르면 동쪽으로 영산호, 서쪽으로는 서해와 무수히 많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승달산 북쪽 기슭인 몽탄면 달산리에 법천사가 자리했다. 법천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사찰 대웅전 앞의 설명문에는 백제 성왕 때 창건했다고 되어 있고, 군에서 만든 자료에는 신라 성덕왕 때 서역국에서 건너온 승려 정명이 세웠다고 한다. 해남 대둔사의 말사인 법천사 입구에서 눈여겨볼 것은 두 기의 석장승이다. 왼쪽에 있는 것이 할머니 장승이고, 오른쪽에 세워진 것이 할아버지 장승이다. 두 장승 모두 인상이 좋아서 무안 땅까지 찾아간 여행자들의 피곤함을 잘 다독거려 준다. 이 장승들은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자도 : 도리포를 뒤로 하고 24번 국도로 다시 나와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가면 짤막한 연육교를 건너게 되고, 신안군 지도읍 점암마을에서 길이 끝난다. 이 마을에서는 임자도행 철부선이 자주 떠난다. 점암마을에서 배로 15분 거리인 임자도는 대광해수욕장이라는 멋진 해변을 지닌 섬이다. 해변 길이가 무려 12km에 달한다. 임자도 북쪽의 전장포는 새우젓으로 소문난 포구지만 지금은 새우가 잘 잡히지 않아 쓸쓸하기만 하다. 맛집 도리포횟집(454-6890)에 가면 숭어회를 추천해 준다. 자연산 숭어는 값이 싸고 맛은 고급어종 뺨친다. 회를 먹은 뒤에는 식탁에 숭어창젓, 조기새끼로 만든 꽝다리젓 등 독특한 젓갈들이 오른다. 몽탄면의 녹향가든(453-8360)에서는 돼지짚불구이를 맛볼 수 있다. 삼겹살을 석쇠에 가지런히 깐 다음 볏짚을 태워가며 고기를 익힌다. 볏짚 특유의 향이 고기에 배어 맛이 좋고 기름기가 쫙 빠졌다. 망운면의 곰솔가든식당(452-1073)은 기절낙지를 잘 한다. 숙박 무안국제호텔(454-8500), 무안비치모텔(454-4900), 은하장여관(453-3302), 장미장여관(453-3901), 동남장여관(453-3075), 우강파크모텔(452-7980) 등. 3 고성 화진포 강원도 동해안에는 석호라는 것이 발달해 있다. 석호는 바닷가와 근접한 호수로 해류나 조류, 바람, 육지에서 밀려든 토사의 작용 등으로 바다로 흘러가던 물길이 막혀 형성된다. 지하를 통해서 해수가 유입되기 때문에 일반 호수에 비해 염도가 높은 편이다. 화진포호수도 청초호, 영랑호와 함께 대표적인 석호 가운데 하나이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항 위편에 형성된 화진포호수는 고니와 청둥오리 등 겨울 철새들이 날아드는 탐조여행지이면서 통일전망대가 가까운데다 바닷가에서는 일출을 감상할 수 있어 겨울이면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호숫가를 한 바퀴 도는 일주도로도 닦여 있어 커플 여행지로 안성맞춤이다.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와 죽정리 그리고 거진읍 화포리와 이어진 화진포는 둘레가 16km에 이르는 제법 큰 호수다. 호수 물 밑으로는 아주 오래 전에 잠긴 마을과 연어, 숭어, 도미 등이 노니는 모습이 보일 정도이다. 민물과 바닷물이 뒤섞인 호수 옆 해변에는 조개 껍데기와 바위가 해풍과 세월에 부서져 만들어낸 백사장이 펼쳐져 신비감을 더해 준다. 화진포의 옛날 이름은 열산호다. 최북단의 일출 감상지답게 수평선을 박차고 솟아오르는 아침해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진한 감동을 안겨 주며 대기가 워낙 깨끗해서 크기도 다른 곳의 두 배쯤은 되어 보인다. 금강산을 스쳐 내려온 겨울 바람은 손발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차지만 북녘땅과 근접한 바닷가에서 민족통일을 기원하며 일출을 감상한다는데 까짓 추위가 무슨 대수랴. 거센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모래사장에서 사그라드는 모습, 편대를 그리며 새벽 공기를 가르는 기러기떼, 수평선 위에 점점이 떠서 불을 밝히며 거진항으로 돌아오는 고깃배들. 그 풍경 하나하나가 사진 찍기 좋아하는 여행객에게는 멋진 소재가 된다. 통일전망대에서는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은 볼 수 없지만 외금강과 해금강은 두루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녀가 자신의 가슴 한쪽을 떼어내 만들었다는 옥녀봉과 낙타의 등처럼 생겨 낙타봉이라고도 하고 구선봉이라고도 부르는 바다 쪽 암산, 말들이 바다 위를 뛰어 다니는 모양을 이룬다 해서 말무리 반도로 불리는 해금강이 가슴에 가득 안겨든다. 통일전망대 관람 문의 (033)682-0088. DATA 홈페이지 : www.goseong.org 문의 : 고성군청 문화관광과 681-2191 가는 길 : ①영동고속도로→동해고속도로 현남 나들목→7번 국도→속초시→고성군 간성읍→거진항 입구→화진포호수→통일전망대 ②홍천→44번 국도→인제읍→진부령→건봉사 입구→간성읍→화진포 주변 명소 거진항 : 거진읍은 ‘거탄진’이라는 갯마을이 발전해서 이제는 읍이 될 만큼 성장했고 거진항에는 수십 척의 어선이 드나든다. 등대가 선 방파제, 해안에 늘어선 촛대바위와 방어바위, 무당바위 등이 어우러진 정경은 정겹기만 하다. 어항 북쪽으로는 자갈해안이 100m 넘게 펼쳐져 있어 여름에는 해수욕장으로 변모한다. 거진항은 오징어뿐만 아니라 명태 산지로도 유명하나 이제 뱃전에 명태를 싣고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 먼 바다로 나가서 잡아오는 원양명태가 풀릴 때나 떠들썩해질 뿐이다. 원양명태는 거진항에서 깨끗하게 씻겨져 진부령, 대관령을 비롯한 여러 덕장으로 팔려 간다. 근해에서 잡히는 명태는 미리 예약한 사람이 비싼 값을 치러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건봉사 : 건봉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의 해발 911m인 건봉산에 자리하므로 특별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리고 있다.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사찰이다. 건봉사는 법흥왕 7년인 서기 520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사지에는 전하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법흥왕 7년이면 백제가 불교를 공인하기 전이고 아도화상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승려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켰는데 그들이 공양할 쌀을 씻은 물이 개천을 따라 10리도 넘게 흘러갔다고 한다. 지금처럼 폐허가 된 것은 한국전쟁 때이다. 맛집 거진항 입구의 성진식당(682-1040)은 생태찌개와 북어해장국을 맛볼 수 있는 집. 생태는 그날그날 안주인이 거진항에서 산다. 아침 7시부터 문을 열며 황태가 아닌 북어로 해장국을 끓여 준다. 그 외 소영횟집(682-1929), 해맞이횟집(681-5868) 등. 숙박 성진식당 바깥주인이 거진항과 가까운 곳에서 보배성 펜션(682-2772)을 운영하고 있다. 미리 주문하면 생태찌개를 숙소까지 배달해 준다. 현대장(681-2058), 옵바위모텔(632-8803), 청간정모텔(632-3344) 등도 괜찮다.
경주 토함산 해를 향해 가다 2005-01-19
‘마알간 해야, 네가 웃음지면 홀로라도 나는 좋아라.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고운 해야 아침을 기다리는 애띤 얼굴(중략). 고운 해야, 모든 어둠 먹고 애띤 얼굴 솟아라.’ 해를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 먹으니 박두진의 시 ‘해’에 곡을 붙인 가요의 한 구절이 머릿속에 맴돈다. 문득 앳되고 고운 해를 떠올린 것은 ‘태양’이 더 어울릴 법한 장엄한 해보다 따스하게 보다듬어 줄 수 있는 그런 해를 바라서인지 모르겠다. 연말이 오고 신년 초하루가 되면 누구나 한번쯤 평소와는 다른 ‘제대로 된’ 해를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 마련. 신년 첫날 곳곳의 해돋이 명소에 수만 명의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드는 것은 이제 너무나 낯익은 풍경이다. 온 국민의 통과의례처럼 되어 버린 신년 해맞이의 그럴싸한 목적은 새로운 각오와 희망을 다지자는 것. 하지만 그동안 쌓이고 쌓인 회한을 뜨거운 첫날의 빛으로 녹여 버리고자 하는 맘은 분명히 그보다 앞설 것이다. 일출 놓친 아쉬움 석양으로 달래 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吐含山)은 해발고도 745m로 경주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경부고속도로 경주IC에서 빠져나가 계속 직진하면 7번 국도와 만나고, 우회전 후 902번 도로로 갈아타면 토함산에 이르게 된다. 토함산은 신라인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계룡산(서악), 태백산(북악), 지리산(남악), 팔공산(중악)과 함께 동악으로 불린다. 너무나도 유명한 불국사, 석굴암 말고도 신라 천년의 역사를 말해 주는 수많은 유물과 유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토함산이라는 이름은 들이마시고 토해낸다는 뜻. 산이 동해바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는데, 바다 쪽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내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또 하나는 신라 4대왕인 탈해왕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토함산의 날씨는 변화무쌍 그 자체. 눈앞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다가 어느 틈엔가 걷혀 동해의 넘실대는 푸른 물결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일출로 유명한 토함산은 이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석양을 선사한다. 불국사에서 약 8km에 이르는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해돋이와 석양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석굴암 주차장에 닿는다. 가을 단풍길로 잘 알려진 이 도로는 아흔아홉 굽이로 되어 있다고. 이 말이 곧이곧대로 들릴 만큼 그 구불구불함에 잠시도 숨돌릴 틈이 없다. 넓은 평야에 우뚝 솟은 산을 바라보면 첩첩산중과는 또 다른 신비감이 든다. 산의 뿌리를 볼 수 있기 때문. 토함산에서 바라보는 서쪽은 경주시내를 품고 있는 평야 뒤로 간간이 자그마한 봉우리 한 두개가 보이고 그 뒤로 본격적으로 산맥이 시작된다. 산의 뿌리이기보다 산맥의 뿌리이기에 신비하다 못해 장엄한 기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저 멀리 수많은 높은 봉우리들이 능선처럼 이어져 있는 곳은 마치 세상의 끝을 보는 듯하다. 그 끝은 하루종일 광명을 내비친 해의 보금자리리라. 정상에 걸린 해는 이것이 뜨는 것인지 지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사그러들 줄 모르는 그 기운은 형체를 잃어 버리며 서서히 주변으로 붉게 물들어 간다. 활화산의 용암이 분출하듯 시뻘겋고 샛노란 기운은 다음날의 일출을 기다리는 이에게 진한 그리움과 여운을 흩뿌린 채 가라앉는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 동안 눈을 한번 감았다 뜰 때마다 색조를 달리하며 찬란한 변화를 거듭하는 석양. 그 색조의 한 켠 한 켠마다 지나온 한 해의 온갖 고민과 갈등을 담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어스름이 짙어갈수록 조급함만 커져 간다. 토함산에서 바라보는 해돋이는 우리나라 8경 중의 하나로 꼽힌다. 양옆으로 펼쳐진 수많은 봉우리와 그 끝에 이르러 푸르게 펼쳐지는 감포 앞바다. 바다와 산을 아우르기 때문에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감동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생명력 가득한 겨울 목장 풍경 무작정 해돋이를 보기 위해 달려왔지만 바다의 푸른 기운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짙은 구름 때문에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잠시 구름의 빈 자리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는 것. 보다 정갈한 맘의 준비를 하고 와야 속내를 드러내려는 심산인가 보다. 멀리까지 찾아온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잠시 얼굴을 내비친 아량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 나중에야 안 것이었지만 토함산 이름의 유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바다에서 직접 올라오는 해는 일 년에 두세 번밖에 볼 수 없다고 한다. 토함산에서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토함산 목장. 석굴암에서 내려오다가 불국사 쪽으로 꺾지 말고 직진하면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내리막으로 바뀔 무렵 오른쪽에 너른 풀밭이 나타난다. 산자락에 펼쳐진 목장의 초입은 왠지 초라한 모습이다. 알고 찾아갔더라도 “에게~ 겨우 이거밖에 안되잖아” 하면서 그냥 지나쳐 갈지도 모를 일. 하지만 첫눈에 보이는 것은 목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시멘트로 대강 만들어 놓은 목장길은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지만 둘이 걷기엔 아주 넉넉하다. 목장을 휘감고 도는 목장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초입에서 느꼈던 실망감은 어느새 탄성으로 바뀐다. 입체감의 오묘함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드넓게 펼쳐진 목장은 올려보다 내려보고 어느새 평탄해지기를 반복한다. 봄의 푸르름이 그리워지고 하다못해 가을에라도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갖게 마련. 하지만 겨울에 보는 목장도 썰렁하지는 않다. 흔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황량함과는 거리가 먼, 군데군데 푸른 빛이 도는 풀밭은 다가올 봄날의 생명력을 미리 가늠케 한다. 목장의 풍광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다 보면 언제 이곳이 목장이었냐는 듯 운치 있는 억새 밭이 펼쳐진다. 억새밭을 지나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내리막길과 솔숲으로 뻗은 갈림길이 나온다. 좀더 거닐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빠듯한 일정을 떠올리며 되돌아 나왔다. 무언가 아쉬움을 남기고 가야 나중에라도 다시 한 번 찾지 않을까 하는 핑계거리를 마음에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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