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서산(瑞山) 그 미소 아니었다면 울어버렸을 2004-06-10
오월의 햇살을품은 신록은 정말 눈부셨다. 봄바다에 부서지는 은비늘이 마치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뜨거운 눈부심이라면 숲의 나뭇잎 등위로 반짝반짝 소곤대는 햇살은 아련한 눈부심이다. 숲은 여름이 되면 더 짙어지지만 신록의 그 신선한 빛깔은 잃어버리니 참으로 자연이란 한순간도 쉬이 놓칠 수 없는 법. 어디서나 해가 뜨고 지듯 신록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지만 서산 마애삼존불을 만나고 내려가는 숲길의 그 반짝이는 신록은 오직 하나뿐인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보원사터를 거닐며 상념에 젖다 서해안고속도로가 뚫린 이후 서울에서 충남 서산은 정말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70년대 포장이 되지 않았을 때는 여섯 시간, 80년대 이후 포장이 되었을 때는 3시간 남짓 걸리던 것이 이제는 그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서초구 남부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버스가 들어선 마을 풍경 속으로 이곳이 운산면임을 알려주는 상징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류장에 차가 멈춰 서는 순간 여기다 하는 생각에 서둘러 내린다. 판단은 옳았다. 서산버스공용터미널까지 갔다가는 예까지 도로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조그만 가게에 들어가 마애삼존불이며 개심사 등지로 가는 교통편을 물었다. 대략의 행선지를 말하자 주인장께서 “오늘 하루에 다 돌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지레 겁을 준다. 아무튼 버스는 금방 와 차에 오른다. 서산이라는 이름에 상서로울 ‘서’자를 써서인가 시작부터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다. 버스는 타고 내리는 이 없어도 코스를 거르지 않고 급할 것 없이 달린다. 꽤 큰 저수지가 나타나고 돌고 돌아 좁다란 비포장길에 들어선다. 그런데 버스가 가는 방향을 보니 마애삼존불을 지나 보원사터까지 갈 모양이다. 운전기사에게 물으니 탑 같은 게 서 있는 그곳 같다며 주변을 살피더니 내릴 곳을 일러준다. 제법 걸을 것을 각오하고 왔는데 코앞에서 내리게 되었으니 횡재가 따로 없다. 바로 보원사터에 온 것이다. 버스는 곧장 되돌아 가버리고 순간 깊은 숲속의 정적에 휩싸이는데, 어디선가 새소리만 서로 다른 울음으로 메아리친다. 한때 번성했던 수많은 건물들과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발걸음을 옮긴다. 오래된 고찰도 좋지만 빈 절터는 상상력의 공간으로 매력이 있다. 초록 무성한 드넓은 터에 당간지주가 눈에 들어오고 맑은 시냇물 징검다리를 건너면 오층석탑이 반긴다. 비록 지금은 허물어져버린 빈 절터지만 그 중심에서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단아하고 품위 있는 자태, 석탑 위 녹슨 철제 찰주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원형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 기단을 보면 아수라상 등 팔부신중이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이 무척 사실적이다. 그 아래 기단을 보면 칸마다 하나씩 모두 12마리의 사자상이 새겨져 탑을 받치고 있다. 그 뒤로 법인국사 부도와 부도탑이 서 있다. 보원사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오층석탑의 양식이나 고려 초기의 국사였던 법인국사 부도를 통해 고려시대의 큰절로 짐작하고 있음이다. 그런데 부도탑은 보수해체수리 공사중이란 안내판과 함께 철제구조물이 흉물스럽게 감싸고 있고 주변에 공사자재가 어지러이 널려져 있어 보기에 썩 좋지 않았다. 보수공사를 하더라도 잘 정돈해서 할 수는 없는지 모를 일이다. 그 한쪽 옆으로 흙담 갈라진 폐가 하나가 빈 절터의 쓸쓸함을 더해주는 듯하다. 전각에 갇힌 ‘백제의 미소‘ 마애삼존불 보원사터에서 걸어 내려와 마애삼존불을 만난다. 초입에서 돌계단을 가쁘게 올라가면 조그만 평지 암자가 나오는데 마애삼존불 보존관리소이다. 산길로 난 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돌부처 하나 보이는데 비로자나불이다. 앉아서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이 순박하고 친근하다. 옆에는 연꽃모양의 석등 받침대가 있다. 무심코 그냥 지나치기 쉽겠다. 다시 돌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니 기와단청 암자가 나온다. 무얼까 하는 생각에 들여다보니 마애삼존불이 그 안에 계신다. 뭔가에 한방 맞은 듯 그야말로 말문이 막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삼존불이 웃는 듯 우시는 듯 그 표정을 종잡을 수 없다. 이런 황망함이라니…….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어디에도 전각에 갇혀 있는 모습은 없었기에 예상치 못한 충격이 더 컸다. 아무래도 그냥 가기 아쉬워 관리사무실에 도움을 청하자 구자도 씨가 따라와 설명을 해준다. 그에 따르면 전각에 보존하는 문제에 대해 학계의 논란이 있었지만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물론 자연광으로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지요. 요즘에는 아이들이 만지는 것을 어른들이 나무라지를 않아요. 얼마전에 한 여대생이 전각 안으로 신발 신고 들어가길래 뭐라 했더니 ‘왜 써놓지 않았냐’고 되레 큰소리 치더군요.” 참 여러 가지로 할 말을 잊게 만드는데 구자도 씨가 긴 장대에 갓을 씌운 전구를 켜 불상을 비쳐준다. 불빛을 비추자 놀랍게도 생생한 표정이 살아난다. 마치 “다 괜찮다”는 듯 그 미소가 마음을 녹인다. 비추는 각도에 따라 신비로운 표정이 달라지는데 전각이 없는 상태라면 해가 떠올라 기울기까지 그 표정변화를 자연스레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부처는 법화경에 따라 가운데 본존이 석가여래로 현재를 나타내고, 왼쪽이 관음으로 과거, 오른쪽이 미륵으로 미래를 나타낸다고 한다. 가장 풍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래의 미소는 벙긋벙긋 절로 따라서 미소짓게 하고, 반가사유의 상을 하고 있는 미륵은 옆에서 보아야 그 미소가 돋보이는데 귀엽게 살짝 웃는 모습이다. 구자도 씨는 친절하게도 태양이 떠오를 때부터 지기까지 해의 움직임을 따라 등잔을 비쳐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백제의 미소’를 제대로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실망만 가득 안고 돌아섰을 것이다. 큰길가로 향하는 조붓한 들길에서 돌무더기 위에 선 미륵불 하나가 길손을 배웅한다. 아름다운 정원 개심사에서 붉은 꽃잎을 밟고 개심사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힘들게 가야 보람도 있는 법.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전경이 반갑기 그지없는데 붉은 꽃잎이 발에 밟힌다. 왕벚꽃나무들이 떨군 꽃잎들이다. 이제 정녕 봄이 가는군. 그런데 이렇게 예쁜 절집을 본 적이 있던가. 옆으로 에돌면서 명부전을 지나 대웅전 앞마당에 서니 하! 짧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안양루 마루에 앉으면 정면으로 500년도 더 오래 전에 지은 대웅전이고, 왼쪽으로 심검당, 오른쪽에 무량수전이 에워싼 작은 마당에는 오직 작은 탑 하나뿐인데 세상 가장 아름다운 정원처럼 느껴진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 보니 마당에 지주 모양의 가느다란 구조물이 보인다. 바로 괘불화(야외에 거는 큰 부처 그림)를 걸기 위한 것으로 조선 영조 때 만든 괘불화가 이곳에 전해진다고 한다. 부처님오신날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날 그것을 내건다 한다. 한편 심검당 부엌문의 휘어진 나무가 눈길을 끈다. 크게 휘어진 나무 그대로를 사용해 건물을 지은 대담함과 천연덕스러움이 요즘의 의식으로 감히 따라갈 바 아니라는 생각이다. 마침 리포트 하러 나온 학생들의 낡은 세피아를 얻어 타고 해미읍성까지 단숨에 나갔다. 예전에 이곳을 지날 때 망루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기억인데 이번에 직접 올라가 보기로 한다. 남문인 진남루를 비롯한 성벽은 오랜 풍상에도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고 수원 화성의 규모에는 못 미쳐도 성곽을 따라 한바퀴 산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너무 넓어 휑한 느낌을 주는 성안 한쪽에는 마을 노인잔치를 위한 준비로 부산하다. 망루에서 보는 마을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성안으로 유모차를 밀고 나온 새댁이며 산책 나온 가족들, 성벽 아래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저녁 노을에 살며시 묻혀져 간다.
신안군 임자도 드넓은 해변과 멋진 노을 품은 모래섬 2004-06-08
전남의여러 섬들 중에 임자도가 있다. 개발의 혜택을 거의 받지 않고, 개발이라는 이름의 유린도 당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섬사람들의 삶터일 뿐이었던 곳이다. 새우젓 생산으로 유명한 임자도 전장포나 60년대 간첩사건으로 얼룩졌던 임자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더러 있을 터. 어두운 현대사 속의 이미지에 가린 탓인지 여행지로서 임자도가 눈길을 끌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목포에서 뱃길로 여섯 시간이나 걸려 찾을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무안 해제~신안 지도간 연륙교가 놓이고 지도읍 점암과 임자도 사이를 철부선이 운항하면서 임자도는 하루 만에도 다녀올 수 있는 섬이 되었다. 특히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임자도를 찾는 발길이 크게 늘었다. 쓸쓸하게 느껴질 만큼 광활한 바닷가와 고깃배 몰리는 포구의 활기, 시골 외할머니 댁 같은 마을 풍경에는 아직도 때묻은 흔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임자도에 가본 이들은 임자도를 “꼭 한번 다시 찾고 싶은 섬”이라고들 말한다. 모래밭 끄트머리에서 펼쳐지는 용난굴의 비경 전남 신안군 지도면 점암선착장에서 임자도행 철부선에 오른다. 농협이 운영하는 철부선은 자동차를 실을 수 있는 화물·여객 수송선이다. 시설이 소박한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최소한의 위생관념도 무시한 화장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용객이 느는 한여름에는 개선이 될까. 배는 느릿느릿 달려 20여 분만에 임자도 진리선착장에 닿는다. 임자도는 의외로 큰 섬이다. 섬의 면적은 39.18km2이고 4천여 주민이 산다. 배에 차를 싣고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된 것도 섬의 규모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진리선착장 입구에는 현대 갤로퍼니 기아 스포티지 택시가 서너 대 서서 여행객을 맞는다. 길은 잘 포장된 콘크리트도로와 시멘트도로, 비포장도로가 두루 섞여 있지만 대개는 일반 승용차로 다닐 만하다. 임자도의 큰 자랑거리, 대광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대광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넓은 해변을 품고 있다. 해변의 길이는 12km나 되고 너비는 250∼300m에 이른다. 끝에서 끝까지 걷는 데만 3시간이 걸릴 정도. 물결은 잔잔하고 발 밑의 모래는 밀가루처럼 희고 곱다. 피서객들은 대개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임자도의 대표 해수욕장인데다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고 깨끗한 모텔이나 여관, 펜션들이 모여 있다. 숙소를 먼저 마련해 두고 다시 차에 오른다. 임자도에는 대광해수욕장 못지 않게 들를 만한 곳이 많다. 그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용난굴이 있는 이흑암리 육암마을이다. 이곳 또한 운동장처럼 넓은 해변이 인상적이고 그 끝에 사람 한둘이 들어설 만한 용난굴이 나 있다. 높이 8m, 길이 150m의 이 동굴은 바다쪽으로 좁게 트여 있고 동굴 안은 이리저리 바위에 꺾여 들어온 희미한 햇살과 차고 축축한 공기가 묘하게 섞여 있다. ‘낙석주의’ 표지판이라도 붙여 놓아야 할 것 같은 칼바위 사이로 들어서는 마음은 절망과 희망을 반씩 닮았다. 그나마도 밀물 때면 들어설 수 없다. 육암마을에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면 이보다 더 한적할 수는 없을 것 같은 은동마을의 해안 풍경이 펼쳐진다. 어디를 가나 모래밭은 넓고 넓다. 임자도는 모래섬이다. 오죽하면 ‘임자도 처녀는 모래 서 말을 마셔야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까. 은동마을을 돌아나와 전장포로 향한다. 전장포는 새우젓으로 유명한 포구다. 전국 새우젓 어획고의 60%가 이곳에서 나온다. 특히 음력 5월과 6월 임자도 근해에서 잡은 새우로 담은 젓갈은 ‘오젓’ ‘육젓’이라고 하여 전국 최고로 친다. 어부들은 잡은 새우를 배 위에서 바로 천일염에 절이고 드럼통에 담아 섬에 있는 서늘한 토굴에 보관한다. 저온에서 짠 맛이 줄고 비린내가 사라질 때까지 장기간 숙성시켜야 제맛이 난다. 전장포를 찾으면 포구 특유의 활기를 맛보고 최고의 새우젓을 싼값에 사는 즐거움이 크다. 해변과 포구를 찾아 도는 동안, 작은 산을 넘거나 마을의 구석구석을 지나게 된다.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지만 끝이 없을 것처럼 이어지고, 낮은 돌담을 두른 집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평화 같다. 마당이며 밭이며 초록으로 뒤덮인 필길마을,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할머니가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 해당화 무리가 한꺼번에 꽃을 피우는 느낌. 꼬막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 못나고 뒤엉긴 보리밭길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멸치 덤장 산마이 그물 너머 바람만 불어도 징징 울음 나고 손가락만 스쳐도 울음이 배어나올 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 보았네 (곽재구 시 ‘전장포 아리랑’ 일부) 구성진 노랫가락처럼 보리밭을 출렁이며 지나는 바람과 함께 떠돌다, 따개비처럼 수면에 붙은 앉은뱅이 섬들에 눈길을 보내다, 해질 무렵 다시 찾은 대광 바닷가에서 곽재구의 시를 떠올린다. 한낱 여행객은 시인의 가슴을 엔 설움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이 낯선 섬을 사랑하기로 한다. 고작 반나절을 보낸 임자도의 노을 아래 서서, 왜 마음을 빼앗아 가는 건지 이유도 묻지 않고. 취재 협조: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벤츠 C320 4매틱) ☎(02)532-3421 먹을거리·숙박 정보 전장포에서는 새우젓은 물론 갓 잡아온 활어를 싼 값에 살 수 있다. 숙박시설은 대광해수욕장에 몰려 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썬비치 모텔(☎061-275-8484)이 깨끗하고 바닷가가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유랜드파크(261-5454)도 이용할 만하다. 이용요금은 3만∼5만 원대. 모텔 1층에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곳도 많다. 들를 만한 곳 신안군 지도 점암선착장에서 지도읍내로 나가면 오른쪽으로 작은 연륙교가 이어진다. 다리를 건너면 솔섬이다. 솔섬에서는 증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데, 증도는 우전해수욕장이라는 아름다운 바닷가를 품고 있다. 무안군 해제면에서 77번 지방도를 따라 송석리로 들어서면 도리포에 닿는다. 도리포는 서해안의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다. 도리포에서 물암까지는 멋진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물암에서 현경 방향으로 조금만 더 달려 오류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홀통유원지 들어서는 길이 조그맣게 나 있다. 홀통유원지는 넓은 백사장과 해송숲이 어우러져 있어 물놀이를 하다가 그늘에서 쉬기에도 좋은 바닷가다. 드라이브 메모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무안 나들목에서 빠져 1번 국도를 타고 무안읍까지 간다. 무안읍에서 60번 지방도를 타고 현경면 소재지에 이르면 24번 국도를 만난다. 이곳에서 24번 국도로 갈아타 송정∼해제∼지도를 지나 끝까지 달리면 점암 선착장이다. 무안 나들목에서 점암 선착장까지는 30분쯤 걸린다. 철부선에 올라 20여 분 가면 임자도 진리 선착장이다. 철부선은 아침 7시 30분에서 오후 5시 30분까지 평소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고 피서철에는 수시로 오간다. 요금은 어른 700원(편도), 운전자 포함 중형차 기준 1만3천700원(왕복)으로 싼 편이다. 매표소 ☎(061)275-7303
웰빙족을 위한 식물원 나들이 몸이 좋아하는 여행.. 2004-05-21
한국자생식물원은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야생화가 피어나는 꽃들의 천국이다. 1999년 7월에 개원했고 2002년 산림청으로부터 사립식물원 1호로 지정 받았다. 이 식물원은 김창렬 한국자생식물협회장이 사재를 들여 조성했다. 3만여 평의 산자락에 800여 종의 자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김 회장은 에델바이스로 불리는 솜다리를 재배하는 데 성공한 인물로, 평창군 도암면 병내리에 있는 그의 농장은 마을사람들에게 그동안 에델바이스농장으로 불려 왔다. 진부에서 주문진으로 넘어가는 6번 국도를 따라가다 오대산관광호텔을 지나면 월정사 입구 삼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이 갈림길 조금 못 미친 지점 오른쪽이 한국자생식물원으로 들어가는 길. 도로변에는 ‘병내리’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오대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실개천이 흐르는 이곳은 야외 식물원, 실내 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야외 식물원은 시골집 마당처럼 편안한 분위기로 조성되었다. 약용, 식용, 원예 등 여러 용도의 식물 400여 종,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 70여 종, 한국 특산식물 200여 종, 개불알꽃(일명 복주머니 난) 24종 등 모두 800여 종의 식물이 3만3천 평 규모의 너른 터에 식재되어 있다. 정원에는 1km의 탐방로, 산자락에는 1.2km의 산책로가 있다. 실내 전시관은 분경·분화관, 생태사진 전시관, 압화장식관, 실내 조경관 등으로 나뉘어 있다. 분경·분화관은 150여 평 규모. 어렸을 적 앞마당, 산길에서 볼 수 있었던 꽃들을 이용해 경치를 재현해내고 식물들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도록 꾸몄다. 실내 조경관은 우리 꽃을 소재로 해 정원을 만들었다. 특히 언덕 가득 꽃이 핀 야외 재배단지는 국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을 선사한다. 5월이면 부채붓꽃과 붓꽃, 6월이면 꽃창포와 분홍바늘꽃이 언덕을 가득 뒤덮는다. 찾아갈 때는 식물도감, 접사렌즈가 달린 카메라 등이 있으면 좋다. 입장료를 내면 꽃씨를 무료로 나눠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관한다. DATA 홈페이지 : www.kbotanic.co.kr 문의 : 식물원 관리사무소 332-7069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진부나들목→오대산 월정사 방면 6번 국도→오대산호텔 입구→한국자생식물원 입구 주변 명소 허브나라 : 농장의 총면적은 3만 평, 허브 재배면적은 7천 평 정도. 1993년 농사를 관광자원화시키기 위해서 이고순, 이두희 씨 부부가 가꾸었다. 허브가든에는 어린이정원, 향기정원, 셰익스피어정원, 달빛정원, 나비정원, 햇빛정원 등 7개의 테마가든이 조성되어 있다. 상쾌한 맛과 향기로 피로회복에 좋은 페퍼민트, 육류요리에 필수라는 세이지, 매콤한 맛이 일품인 한련화 등 120여 종의 허브가 이곳에서 자란다. 자작나무집에는 허브요리를 내놓는 레스토랑과 허브찻집, 허브를 이용한 제품의 전시 및 판매장 등이 들어서 있다. 5∼10월에는 대인 3천 원, 소인 1천5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허브가든 개관시간은 오전 8시∼오후 6시. 문의 335-2902 월정사 : 자생식물원에서 멀지 않은 월정사는 입구의 전나무 숲길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보통은 오대천 계곡을 따라 월정사 주차장까지 차를 타고 가기 때문에 쉽사리 지나치는 이 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 중 하나. 일주문 양쪽으로 눈 부릅뜨고 있는 사천왕상 조각을 뒤로 하고 일주문에서 월정사까지 1km쯤, 수령 400∼500년의 전나무들이 늘어선 길은 바닥에 누런 침엽들이 깔려 있어 밟고 지나는 기분 또한 상쾌하다. 양탄자처럼 푹신하지는 않아도 발바닥에서부터 전해 오는 감촉에는 흡사 길손을 반기는 오대산의 인사라도 되는 것 같다. 맛집 진부면에 메밀촌(메밀음식, 336-3310), 강원식당(한우고기, 335-7062), 월정사 입구에 가마솥식당(산채정식, 333-5355) 등이 있다. 봉평면에는 산채식당(산채백반, 곰탕, 333-1047), 현대막국수(막국수, 335-0314), 물레방아집 막국수(막국수, 336-2969), 메밀꽃필무렵(막국수, 335-0594), 옛골(메밀전병, 336-3360) 등이 유명하다. 숙박 허브나라에서 나와 계곡 상류로 올라가면 펜션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쉴 만한 물가로 펜션’(336-2106)은 커플룸(9평형) 8개, 패밀리룸(11평형) 2개를 갖추고 있으며 샹그릴라펜션(336-6051)은 7평형과 12평형 각 4개, 9평형이 1개이다. 아산 세계 꽃식물원 고속철 개통으로 각광받는 여행지 중의 하나가 충남 아산시와 천안시이다. 아산시 도고면 봉농리에 가면 ‘세계 꽃식물원’을 만날 수 있다. 강원도 같은 깊은 산골이 아니라 평야지대인 아산시에도 꽃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니 반갑다. 용인의 한택식물원이나 평창의 한국자생식물원 등과 달리 튤립 등 정원에 심으면 딱 좋은 꽃들이 만발한 식물원이다. 이 식물원은 야외가 아닌, 대형 온실 안에 조성되어 있다. 거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따른다. 한때 이 지역에서는 화훼산업 육성 바람이 불었다. 결과는 실패.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어 농민들은 ‘아산아름다운정원’이라는 영농조합을 만들었고 조합원이 힘을 모아 ‘세계 꽃식물원’을 탄생시켰다. 식물원은 2004년 3월 20일 개원했다. 2천800평 크기의 초대형 온실에는 1천여 종의 꽃들이 자라고 있다. 원장 남기중 씨가 입장객을 따라다니면서 꽃의 이름을 알려주고 꽃말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튤립에서부터 수선화, 히야신스, 아이리스, 아마릴리스 등 봄을 대표하는 유럽종 구근의 현란한 색상들이 방문객들의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다양한 종의 동백꽃이며 팬지 등도 눈길을 끈다. 가장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곳은 붉은색, 분홍색 꽃송이들을 가득 띄운 대형 수조 주변. 사람들은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쁘고 꽃들은 저마다의 모양새를 뽐내기 위해 부지런히 키재기를 한다. 식물원 입장료는 성인 5천 원, 중고생 4천 원, 초등학생 3천 원이며 모든 입장객에게는 3천500원 상당의 화분을 하나씩 증정한다. 남 원장은 “식물원에 가면 꽃의 빛깔, 잎과 줄기의 생김새 등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가슴에 담아 가라”며 “그들에게 사랑을 주면 그만큼 향기로운 꽃들의 사랑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재배되는 꽃들은 안면도꽃박람회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팔려나간다. 식물원 관람 후에는 온양온천이나 도고온천 등에서 온천욕을 즐겨 본다. DATA 홈페이지 : www.goodflower.com 문의 : 식물원 관리사무소 544-0747∼8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천안나들목→21번 국도→아산시→신창휴게소→도고면→세계 꽃식물원. 식물원까지 대중교통편을 이용해서 간다면 아산시내에서 예산 방면 버스를 이용, 덕원플라자휴게소에서 내려서 10분 정도 걷는다. 주변 명소 현충사 : 충무공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그로부터 108년이 지난 숙종 32년(1706) 이곳에 충무공의 얼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숙종은 친히 ‘현충사’란 이름을 내렸다. 현충사 안으로 들어가 걷다 보면 본전, 유물전시관, 옛집과 활터를 알리는 이정표를 만난다. 먼저 사당부터 찾아보는 것이 순서. 본전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방문객은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는 것이 예의이다. 유물관에는 일생기록인 십경도와 국보 제76호인 난중일기, 보물326호 장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충무공이 살던 옛집, 활터, 정려 등도 경내에 있다. 매주 화요일 휴관. 외암민속마을 : 아산시 송악면 외암1리에 자리했다. 송남초등학교 옆길로 600m를 들어가면 외암리 민속마을이다. 외암리의 관문인 반석다리를 건너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이곳은 1988년 전통건조물 보존지구 제2호로 지정됐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버티고 선 마을 안에는 400여 년 전부터 형성된 충청지방 고유의 전통양식 반가(양반의 집)를 중심으로 아담한 돌담이 둘러쳐진 초가집, 송림에 쌓인 정자와 물레방아가 손님들을 반긴다. 전체 가구 수는 60여 호. 양반집으로는 참판댁, 송화댁, 영암댁으로 불리는 기와집이 10여 채 있다. 이 가운데 참판댁은 중요민속자료 제19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맛집 방수마을(염치읍 방현리, 544-3501)을 가장 추천할 만하다. 한정식을 잘 하며 값은 1인분에 각 1만 원, 3만 원, 5만 원. 주인 김판순 씨는 한국국악협회 아산시지부장을 맡고 있는 국악인. 단체손님을 위한 판소리, 사물놀이 공연, 거문고와 가야금 연주 등도 마련되어 있다. 그밖에 염치읍 염성리는 한우촌, 인주면 문방리는 장어구이촌으로 소문이 나 있다. 숙박 아산시 온천동에 온양관광호텔(545-2141), 온양프라자호텔(544-6111), 인터파크관광호텔(542-6000) 등. 도고면에 파라다이스호텔도고(542-6031), 도고로얄파크텔(543-5511) 등이 편리하고 깨끗하다. 홍천 아로마허브동산 홍천은 강원도 북부 여행의 중요한 들머리다. 동서 방향으로 길쭉한 지형을 보이는 홍천의 대표적 여행 명소로는 동쪽에 삼봉자연휴양림과 살둔계곡, 서쪽에 홍천강이 있다. 그 중간, 홍천읍 인근에 아로마허브동산, 공작산자연휴양림 등 비교적 덜 알려진 명소들이 고개를 내밀어 주말여행지 물색에 고심하는 가족들의 고민을 덜어 준다. 아로마허브동산(화촌면 장평리)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허브를 감상하고 체험하고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이처럼 허브를 집중적으로 재배하고 여행객에게 개방된 곳으로는 허브아일랜드(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삼정리, 031-535-6494), 상수허브랜드(충북 청원군 부용면 외천리, 043-277-6633∼4), 봉평의 허브나라농원(강원도 봉평군, 033-335-2902) 등이 있다. 44번 국도 구성포교차로에서 허브농장까지는 약 13km 거리다. 3만8천 평 규모의 야산 언덕배기에 허브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2002년 10월 말 개장, 연륜이 짧고 면적이 넓은 탓에 아기자기한 맛은 떨어진다. 그래도 200평 규모의 온실과 야외 학습포지에는 120여 종의 허브가 자라면서 은은한 향기를 골짜기에 흩뿌리고 있다. 허브찜질방, 허브마사지실과 목욕실, 허브향이 가득한 방갈로(7동), 세미나실 등이 준비되어 있다. 허브온실(입장료 무료)을 둘러 본 후에는, 몸으로 허브를 느껴볼 차례. 허브찜질(1인당 8천 원)은 40∼45℃의 저온찜질법이 이용되는데, 모공이 충분히 열려 노폐물을 배출하고 허브의 효능을 빨아들일 수 있는 가장 적정한 온도이므로 허브의 효과를 최대한 얻어낼 수 있다. 타임, 로즈마리 등 허브의 종류에 따라 나뉘어진 5개의 방을 오가며 찜질하는 동안 허브의 효능이 몸 속으로 충전된다. 걸어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산책로는 투숙객에게 인기가 높다. 식당에서는 허브비빔밥, 허브돌솥백반, 허브토종닭찜 등의 먹거리를 내놓는다. 허브향이 은은한 숙박시설(1박에 약 5만 원)도 갖추어 허브 속에서 여유 있게 쉴 수 있는 곳이다. DATA 홈페이지 : www.aromaherb.co.kr 문의 : 허브동산 관리사무소 433-9685 가는 길 : 양평→44번 국도→중앙고속도로 홍천나들목 입구 통과→홍천읍 우회도로 타고 인제 방면으로 진행→구성포교차로→서석 방면 56번 국도→아로마허브동산 주차장 주변 명소 수타사 : 공작산 기슭 남서쪽에 들어선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7년(708)에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었던 것을 그 뒤 여러 차례 중건, 오늘에 이른다. 원통보전, 대적광전 등이 주요 전각이다. 조용한 경내를 둘러보고 용안수 한 모금 마시면 이마의 땀이 시원하게 달아난다. 수타사로 들어가는 길 역시 울창한 소나무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몸과 마음을 신선하게 만들어 준다. 홍천읍에서 수타사행 시내버스가 1일 3∼4 회 운행된다. 가리산자연휴양림 : 홍천군 두촌면 천현리의 가리산(1,051m) 동쪽 기슭에 자리한 가리산자연휴양림은 1998년 문을 열었다. 통나무집 스타일의 산막과 방갈로가 많아서 수도권 여행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곳. 산막들은 경사진 비탈에 계단식으로 들어선데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실내에서 편안히 방바닥이나 의자에 걸터앉아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조망이 좋다. 문의 435-6034, 430-2657 홍천온천 : 국내 유일의 강변온천으로 수질은 알칼리성의 중탄산나트륨형이며 피로 회복, 신경통, 류머티즘, 알레르기성 피부염, 만성습진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온천탕 개장시간은 오전 6시∼오후 7시. 1998년 10월 홍천온천리조트(종합온천장)가 개관되었고 홍천읍에서 15분 거리에 있어 숙박에도 불편이 없다. 온천 지구의 숙박시설은 홍천온천스파지움(435-8123), 온천장모텔(435-1080), 그레이스모텔(435-0061), 파레스모텔(435-6100), 홍천온천원탕모텔(435-1011∼4) 등. 맛집 수타사 입구에 종점식당(더덕구이, 436-5620), 수타계곡돌집(민물매운탕, 436-4641), 감자바우식당(손두부, 436-0751) 등. 홍천읍 하오안리에 일미화로숯불구이(435-9529), 머슴숯불구이(435-3592) 등이 있다. 숙박 모둘자리관광농원(서석면, 436-6113), 아름다운펜션 수(북방면, 435-4707), 어느 멋진 날 펜션(서면, 434-7920), 홍천 파크장(홍천읍, 432-6199) 등을 이용할 만하다.
캐피탈과 아버지 김왕노<시인> 2004-06-08
내가 자란 곳은 영일만이 보이는 일월동이라는 곳이다. 동네 위에 지금은 포항비행장이 있다. 포항비행장이 만들어지기 전 일본 강점기 때는 포도농장이 있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포도농장을 영일만에서 풍부하게 잡히는 청어의 기름을 짜 일본으로 가져가는 비행장으로 만들었다. 그 후 군용비행장 겸 지금의 포항비행장으로 변했다. 어릴 때 비행장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영일만이 품에 와 안겼다. 영일만에 떠가는 하얀 돛단배는 끝없이 밀항의 꿈을 키워주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 마을을 거쳐 구룡포에서 포항으로 오가는 버스를 바라 볼 때 서울에 가보리라는 꿈도 키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며 처음 타보는 열차 밖으로 플라스틱 나팔을 내밀어 얼마나 불어대었던지, 거대한 미루나무 사이로 난 철길은 꿈의 철길이었다. 그러다 포항종합제철이 생기고, 길이 넓게 뚫리고, 그 길이 고향 마을까지 삼켜버리고, 사방으로 뻗어 가는 고속도로가 생기고, 이육사가 언제 포도농장에 와 청포도를 지었을까 라는 의심마저 들게 영일만의 옛 정취는 사라졌다. 그러나 구룡포에서 대보를 거쳐 대동배 약전을 거쳐오는 옛 정취가 살아있는 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길은 십 년 전에 생겼으나 영일만을 끼고 있는 최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그 길을 따라 아버지를 모시고 드라이브 한번 하는 게(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꿈이다. 수원에서 생활하니 고향에 가도 하루 이틀 밤 자고 곧바로 올라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처음 차를 사 고향에 가져가 텃밭 옆에다 세워 두었다. 새벽에 일어나 바닷가로 산책 나가다보니 수도꼭지에서 텃밭으로 연결한 호스로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아버지께서 피만큼 아껴야 한다는 물로 세차하시고 계셨다. 차를 산 내가 대견도 했을 테고 어쩌면 그 차를 타고 정년퇴임 후의 무료함을 한번 달래려 경주로 서울로 구경을 마음껏 해 보고 싶은 내심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차로 모시고, 우리 집이 있는 수원으로 아니면 그게 힘드시면 가까운 경주로 여행 한번 가시자고 해도 기름 아까운데 하시며 극구 사양하셨다. 바다를 늘 곁에 두고 사시는 아버지와 함께 영일만을 마음껏 바라보게 되는 그 길이라도 달리고 싶어 권했으나 그마저 사양했다. 가끔 어머님만 모시고 영일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해수목욕탕에 갔다 왔다. 그러다 몇 년 지난 어느 봄날 아버지가 임종 직전이라는 갑작스런 소식을 들었다. 차를 몰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낡은 차는 다행히 고장을 일으키지 않았으나, 너무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고, 그 일 후 그 슬픔을 함께 기억하는 캐피탈에 애정이 더 갔다. 차는 낡을 대로 낡아 자주 고장을 일으켰으나 아무 불평 없이 고쳐서 탔다. 시동을 걸어 차의 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불편한지 알았다. 고속도로 위에서 엔진 헤드가 깨지고 분사된 휘발유로 차가 뽀얀 가스에 둘러싸이기 전까지, 차는 내 분신이라 생각했다. 그날 갑작스런 사고로 차에 가진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그날은 대학원 시험이 있어 시간에 쫓겨 과속을 했지만 그런 일을 일으킬 줄 예측도 못했다. 가방을 챙겨 차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엎드렸으나 다행히 차에 불은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차를 향해 가슴에 치솟는 분노는 인간에게 가지는 감정 상태 그대로였다. 낡았지만 늘 새롭게 차를 대하도록 카오디오도 고급으로 차바퀴도 광폭으로 갈아 끼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대로 두고 올라와 폐차시켜버렸다. 그만큼 내가 그 차에 가진 애정이 컸기에 받은 배반감도 컸기 때문이리라. 그 후 또 캐피탈 신형을 샀다. 폐차되어 고철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캐피탈도 단종되고, 내가 타던 캐피탈마저 직장이 너무 멀어져 기름값을 줄이기 위해 쏘나타로 바꾸었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그 차가 나타난다. 꿈속에서 아버지를 태우고 영일만을 끼고 달리기도 한다. 캐피탈과 아버지는 내 추억 속에 그처럼 언제나 싱싱하게 살아있다. 그리고 아버지 말씀이 내 삶을 세차하듯 닦아주셔서, 지금도 내 생은 생생 달린다. 그러나 과속은 하지 말아야지 중얼거리며.
독수리의 긴 여로를 함께 한 ‘자린조르가’ 노영대&.. 2004-06-08
나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오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국내의 오지도 대상이지만, 나는 지난 6년 동안 주로 몽골의 오지에서 작업을 해왔다. 몽골과의 인연은 독수리가 맺어줬다. 7년 전, 우리나라를 찾아 겨울나기를 하던 독수리 30여 마리가 얼어붙은 임진강 위에서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문화재전문위원(천연기념물분과)인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천연기념물 제243호인 독수리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석굴암이나 난중일기와 같은 지위를 가진 법정보호종이기 때문이다. 다음해 봄, 나는 이들의 번식지를 찾아 번식생태와 이동경로를 밝히기로 하고 모든 과정을 2년 정도의 일정으로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로 했다. 제작에 앞서 가장 먼저 차를 물색했다. 보통 차가 아닌 특수한 차를 찾아야 했다. 남북한을 합친 면적의 8배쯤 되는 몽골의 광활한 영토를 누벼야 하기 때문이다. 오가는 길이 멀기도 하려니와 험하기 짝이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을 며칠씩 지속적으로 달려야 하고 백두산 높이와 맞먹는 험한 산들을 넘어야 한다. 포장길은 수도 주변의 일정구간뿐이다. 대부분의 길은 울퉁불퉁, 안전모를 쓰고 달려야 할 정도. 늪지대와 사막, 그리고 바위투성이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맨머리로 있으면 머리가 볶아질 정도의 혹서와 디젤이 얼어붙는 영하 40도의 혹한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6명 정도가 숙식을 할 수 있고 2톤 이상의 장비를 적재할 수 있는 덩치가 필요하다. 단, 차 구입비는 2천만 원 범위에서. 우선 국내에서 물색하려 했으나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킬 만한 ‘물건’은 없었다. 결국 현지에서 구하기로 했다. 탐문 끝에 옛 소련군 병력수송용 트럭인 자린조르가가 바로 우리가 찾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러시아까지 가서 이 차를 구해왔다. 듬직했다. 정비가 비교적 쉬운 완전기계식의 6륜구동차로, 바퀴에 바람이 빠지면 공기를 자동으로 주입해 주는 에어 컴프레서가 달려 있다. 먹성도 대단하다. 휘발유 1X 로 0.8km(험준한 길은 0.3km)를 달린다. 다행히 몽골은 휘발유 값이 한국의 디젤 값보다 쌌다. 박스형 적재함이 견고한 이 녀석의 외부와 내부를 성형(?)했다. 165X 짜리 연료탱크 2개가 달려 있는데 같은 크기의 탱크 2개를 더 달았다. 바닥에 10개의 칸막이를 만들어 그 위에 마루를 깔았다. 마루 밑 칸막이는 식량, 카메라 장비, 의약품, 의류 등 각종 물품의 창고로 이용했다. 전기난로와 장작난로, 모니터, 80X 들이 식수탱크도 달았다. 옥상에는 7∼8인용 보트를 얹을 수 있도록 캐리어를 만들어 달았다. 자린조르가는 우리의 편리한 발과 안전한 집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이 자린조르가 덕분에 지난 6년 동안 2편의 자연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올해도 재두루미의 이동경로를 찾아 나설 수 있었다. 이동 중 이곳저곳에 조난을 당한 몽골 차들을 구조하는 역할도 덤으로 해낼 것이 분명하다. “고맙다. 자린조르가야!”
아름다운 카라이프와 인생항로 김현훈<PR21 .. 2004-05-11
봄, 여름, 가을, 겨울. 나는 가끔 계절의 변화나 개울가의 물 흐름이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자연의 흐름과 순리이구나’라고……. 자동차와 함께하는 진정한 ‘카라이프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을 것이다. 봄의 따뜻함을 자동차 구입 초기의 설렘과 희망으로 바꿔 생각해본다. 작은 먼지 하나라도 없애기 위해 닦고 조이는 때다. 여름은 힘이다. 봄의 빛으로 천천히 솟아올랐던 희망은 여름을 맞아 한껏 무성하게 자아를 분출한다. 그러나 여름을 잘 보낸 자연은 가을의 풍요로움을 맞이하며 그 열매 격인 여유로움을 만들어 주지만, 음주운전이나 과속과 같이 순리를 역행했을 때는 볼썽사납게 사라져 가는 모습으로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겨울 또한 모두가 피할 수 없다. 세 계절 내내 잘 준비한 자동차는 미끄러운 눈길과 찬 기온에서도 멈추지 않지만 관리에 소홀해 지난 세월을 부실하게 보낸 차는 잦은 트러블로 고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동차의 수명은 자연의 순리와 다를 바 없다. 자동차 운전을 인간 삶에 비유한 어느 분의 말씀이 때때로 생각난다. 자동차사고를 피하기 위한 첫째 조건은 ‘준법운전’이라는 것이다. 도로교통법이 제시하고 있는 자동차관리, 주행방법, 정차방법, 추월방법 등을 모두 지킬 때 법을 무시하고 달리는 무법차보다 사고율은 절반 이상 줄어들 것이다. 인간의 삶도 이와 같아서, 이미 제시되어 있는 자연법과 불문법을 성실히 지킬 때 큰 화를 피하고 물 흐르듯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안전운전’이다. 아무리 준법운전을 한다해도 앞뒤 또는 옆 차의 상황을 잘 지켜보며 가지 않는 한 언제 어디서나 사고가 날 수 있다. 필자도 언젠가 신호대기 도중 앞차를 뒤따라갔다가 신호위반으로 걸린 적이 있다. 신호를 확인하지 않고 얼떨결에 따라 갔다가 일어난 일이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도 주변을 잘 보고 생각하며 나아가야 목적지까지 무사히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보운전’이다. 앞서 이야기한 두 조건은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기 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끼어드는 차와 앞질러 가는 과속 차, 순간 나타나는 오토바이와 보행자들을 무시하며 양보 없이 운전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피곤에 절어버릴 것이다. 양보운전은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을 여유롭고 풍요로운 드라이브로 이끌어 준다. 우리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다른 사람의 끼어듦을 용서하지 않거나 밀어내기를 일삼으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주위의 많은 사례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름다운 카라이프’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주위 차와 최소한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달리고, 급하게 끼어든 상대에게도 넉넉한 여유와 웃음으로 인사를 보내자. 그 차에 탄 사람이 다른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인연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늘 넉넉하고 아름다운 카라이프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먼저 가세요!” 도로에서 가장 자주 써야 할 한마디는 바로 이 말이 아닐까.
하나씩 배워가며 타는 즐거움 곽풍영<사진작가&g.. 2004-05-11
앗! 기다리던 로버 미니 부품이 멀리 영국에서 도착했다. 주문한 지 1주일만에 도착한 이번 부품은 반짝거리는 실내외 크롬 파트다. 이제 미니의 모습을 확 바꿔줄 차례다. “이 차 몇 년형이에요?” “얼마짜리예요?” “몇 cc짜리죠?” “밟으면 몇 킬로까지 나가요?” 아파트 주차장에서 튜닝 파트를 이리 저리 대보며 궁리를 하고 있다보면, 물어보는 사람들의 질문은 다 똑같다. 하나하나 답을 하다보면 언제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대목이 있다. “에어컨 있어요?” “에어컨 없는데요.” 바로 이말 한마디에 모두들 휙 뒤돌아서 가버린다. 가면서 내뱉는 말. “아니, 에어컨 없이 어떻게 여름을 난다는 거야. 기가 막히는군.” 그러고 보면 그동안 내가 탐닉한 클래식한 앤틱 자동차들은 모두 하나같이 에어컨이 없지 않았던가. 여름에 더우면 아예 밖에 나가지 않았고, 비가 올 듯 하늘이 꾸물거리면 하던 일 멈추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달려오기 바쁘지 않았던가……. 내가 클래식한 차에 푹 빠져든 것은 호주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다. 호주에서 1억 원이 넘는 ‘부포리’라는 수제차를 렌트해 여행 내내 차만 몰고 다녔다. 부포리는 호주에서도 흔치 않은 희귀차로, 여행 중에 만난 호주인들조차 자신의 나라에서 이런 차가 생산되느냐고 되물었다. 신혼여행 기간 내내 폭스바겐 비틀이나 로버 미니, 시트로앵 2CV, 포르쉐 911 등이 세워져 있으면 차를 세우고 그 옆에 서서 기념촬영하기에 바빴다. 호주에서 앤틱카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호주에서 보았던 앤틱카 한 대를 산 다음 고치면서 타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IMF 때 아끼던 73년형 폭스바겐 비틀을 반값에 팔 수밖에 없었던 기억은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제값을 받지 못하고 팔거나 차값보다 많은 비용을 들여 마련했던 부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오래된 차를 정비하면서 그 많은 시간을 차 밑에서 보낸 기억이 너무나도 소중했기 때문이다. 앤틱카에 관한 꿈은 포르쉐 550 스파이더를 갖게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올드 포르쉐는 폭스바겐 비틀과 메커니즘이 비슷해 안타깝게 보낸 비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고, 그때 익힌 정비실력으로 올드 포르쉐를 관리하는 일도 쉬웠다. 사실 550 스파이더는 매력 넘치는 스타일을 지녔지만, 차고가 낮아 엉성한 도로를 달릴 때는 불안하고 톱이 없어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 차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차장에서 닦고 조이는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재미있게 탄 올드카는 1984년형 K-111 군용 지프였다. 원초적인 메커니즘과 뛰어난 개방감, 그리고 탁월한 오프로드 성능으로 인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어디를 다니더라도 부족함이 없었다. 오리지널 군용 지프인 K-111은 이미 오래 전에 단종 되었지만 뛰어난 오프로드 성능으로 인해 전방에서는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고 한다. 군용차라 부품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만 서울 종로에 나가면 원하는 부품은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다. 더군다나 정비도 간단해 K-111은 내가 몰았던 가장 경제적인 올드카인 동시에 지금도 가슴속에 가장 많이 남아있는 차다. 지금 타는 차는 96년식 로버 미니다. 미니 역시 해외에 부품을 주문하고 정비책자를 보면서 메커니즘을 익히는 재미가 쏠쏠하다. 새차를 타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즐거움을 모르고 지나치는 것 같다. 아니 자동차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에어컨을 기본으로 달고 나오는 새차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로버 미니를 단지 에어컨이 없는 낡은 차로만 보는 이들이 올드카를 닦고 조이며 관리할 때 느끼는 행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주차장 드라이브’의 추억 장영일<영화 감독&g.. 2004-05-11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처가살이를 할 때다. 집사람의 성화로 운전면허증을 따려고 면허시험을 몇 번 보았지만 계속 낙방을 했다. 정확히 필기시험은 네 번만에 통과하고 실기는 두 번 가량 떨어졌다. 당시 아내는 단 한번에 운전면허를 따서 오너가 된 지 몇 해가 지난 뒤라 나에 대한 무시가 어지간했다. 아내는 나에게 “천재 아니면 바보라고, 어떻게 운전면허시험을 수 차례에 걸쳐 몇 년을 두고 보느냐”고 했다. 어느 봄날 늦게 일어나 보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어딜 갔는지 다들 외출하고 차고에는 승용차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기회는 이때다’ 생각하고는 차에 들어가 실기연습을 시작했다. “부르릉”, “키익”, “철커덕” 목소리로 자동차 모는 흉내를 내며 실기연습을 하다가 실감이 나지 않자 사이드 브레이크만 걸어놓으면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기억을 살려 사이드만 걸어놓고 실제로 시동을 걸었다. 차는 꿀렁꿀렁 움직였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아, 나는 신나는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다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해 올라오는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순간적으로 액셀 페달을 힘껏 밟았다. 집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차가 굉음을 내며 돌진하다 차고 문에 걸렸다. 사이드 브레이크가 풀리며 차가 앞으로 튀어나간 것이다. 조용하던 집에 난리가 났다. 대문 밖으로 나와 차고 문을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철제 차고 문은 반쯤 찌그러져 있고, 차는 차고 밖으로 머리를 반쯤 내밀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난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장인어른이 오기 전에 빨리 이 상황을 수습해야한다는 마음에 동네 수퍼 아저씨, 전기 재료상 주인, 철물점 아저씨를 찾아가 돈이 얼마 들지는 생각말고 빨리 원래대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동네 사람은 하나 둘 모이고 혀를 차는 사람, 재미난 듯 바라보는 사람 등 표정들도 다양했다. 하지만 남들 시선에 아랑곳없이 나는 계속해서 큰길을 바라보며 장인어른이나 처가댁 식구가 오지 않나 눈치를 보며 아저씨들을 재촉해 겨우 차고에 차를 집어넣고는 부리나케 영화사로 도망갔다. 다행히 그 사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덮어졌다. 가끔 장인어른이 차고 문이 이상하다고 할 때마다 심장에서는 브레이크 걸리는 소리가 났다. 가끔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당시 상황에 가끔 미소를 짓는다. 자동차는 연습이 없는 움직이는 실제상황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다. 문득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그 비밀을 지키고 있는 동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리 없는 진동을 느낀다
운전 속에서 인생을 배우다 .. 2004-05-11
학창시절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엄마가 내게 항상 하시는 말이 있었다. 운전을 하면 인생을 배운다고……. 어렸을 땐 엄마의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운전면허를 따고 매일 운전을 하게 되면서 나는 그 말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생사를 어찌 운전과 비교할 수 있겠냐마는 운전을 하는 속에서 여러 가지 삶의 이치를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 처음 자동차를 운전한 것은 대학시절. 도로연수도 받지 않고 혼자서 대담하게 서울시내를 돌았다. 가슴은 두근두근 뛰고 천천히 가면 뒤에서 빵빵거리지나 않을까, 이 교차로에서는 어떤 신호등을 봐야하는 걸까, 내가 지금 중앙선을 밟고 가는 것은 아닐까……. 핸들을 잡은 손은 떨리고 수시로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때 내 옆을 바짝 쫓아오던 버스가 있었다. 버스기사 아저씨가 나를 향해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초보였던 나는 영문도 모르고 계속 달리기만 했다. 사실 나에게 욕을 하는 것 같아 그 아저씨를 외면하고 싶었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시내 한복판에서 당장 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왔는데 그 버스기사 아저씨는 계속 내 차 옆에 붙어서 나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참 끈질기기도 하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고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난 그 기사 아저씨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아가씨 큰 일 나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내게 아저씨는 신호가 끝나 뒤차가 계속 빵빵거리며 재촉을 하는데도 “차의 보네트가 열려있으니 내려서 닫고 가라, 쌩쌩 달리다 보면 보네트가 갑자기 올라와서 큰일난다”며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 전에 기름을 넣을 때 어떤 것이 주유구인지 몰라 이것저것 누르다 보네트가 열렸던 모양이다. 차를 옆으로 세우고 조금 들떠 있는 보네트를 닫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그 버스기사 아저씨가 생각났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게 좋은 의도로 다가오는 사람에게도 먼저 경계심을 갖고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떤 이야기인지 정작 들어보지는 않고 표면적인 행동만을 보고 고개 돌리진 않는지, 나는 그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 버스기사 아저씨는 그 순간 내가 안전하게 운전하도록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오늘도 나는 밀리는 차선에서 인생을 배운다. 조금 더 빨리 가보겠다고 갓길에 끼어 들다가 딱지를 떼이는 많은 차를 보며 조금 먼저 가는 것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조금 먼저 가기 위해 다른 차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일이야말로 갖은 방법으로 남을 누르고 자신이 먼저 성공하겠다는 우리네 인생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두 번 끼어 드는 일은 어찌 보면 요령일 수 있고 운전을 잘 한다는 자랑일 수도 있지만 항상 그렇게 가다보면 언젠가는 꼭 딱지를 떼이게 되어 있다. 과속이든 끼어들기든 어떤 이유로든 말이다. 핸들을 잡는 순간, 나는 도로 위의 지도가 아니라 또 다른 인생의 지도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도착하느냐도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이다.
20년 자동차 편력이 남긴 추억 최용남<치과의.. 2004-04-07
지금은 20대의 청년이 되어버린 우리 큰 아들이 옹알이를 할 무렵인 1982년 10월. 당시 180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던 3년 된 중고 포니는 그 후 20년 넘게 이어진 나의 자동차 편력기의 첫줄을 장식한 차가 되었다. 워낙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포니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내 여행의 동반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여행에 대한 의욕만 앞설 뿐, 운전과 차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던 나 때문에 우리 가족과 포니는 고생만 잔뜩 하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휴가를 얻어 온 가족이 지리산을 향해 출발했던 여행길이 그랬다. 하필 휴가기간이 장마철과 겹쳤던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지리산을 오르는 길은 포장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는데, 쏟아지는 비에 좁은 산길은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어쨌든 떠난 길이니 노고단은 올라야 할 것 아니냐는 생각에 오기로 차를 몰았지만, 천길 낭떠러지를 바로 옆구리에 끼고 몇번씩 휘청거리다 보니 갓난 아들내미와 아내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결국 노고단 정복을 포기하고 중간에 차를 돌려 내려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행을 즐기는 성격은 그 이후의 자동차 생활과 차 고르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포니와 포니2를 거쳐 프라이드를 구입했을 때의 일이다. 영월 부근의 산으로 여행을 갔다오는 길에 차 바닥이 긁히는 데도 아랑곳 않고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험한 길을 빠져나와 속도를 붙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차의 앞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했는데 소리는 점점 심해지고 연기까지 풀풀 나는 것이었다. 걱정은 됐지만 일단 집에는 가야겠다는 생각에 차를 몰아 집 부근의 카센터에 도착했다. 차를 둘러본 정비사는 “어떻게 차를 이렇게 몰았느냐”며 혀를 내둘렀다. 오일은 바닥나 있었고 엔진은 뜨거워져 늘어붙기 직전이었다. 차 바닥이 돌에 긁히며 엔진 오일 마개가 빠져버렸고, 길 위에 엔진 오일을 쏟아내며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었다. 그 이후로 몇 대의 세단을 구입했지만 나의 방랑벽을 오래 버텨내는 차는 드물었고, 결국은 SUV나 RV가 내 체질에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구입한 첫 SUV는 록스타 소프트톱 모델이었다. “여행의 낭만을 즐기려면 역시 천막차지!”라며 큰 맘 먹고 구입했지만, 벗기기는 쉬워도 씌우기는 어려운 소프트톱은 낭만보다는 괴로운 추억을 많이 안겨줬다. 네바퀴굴림차라고는 해도 차의 안정성이 떨어지고 속도도 붙지 않아 답답함도 느꼈다. 영동고속도로가 2차선이던 시절, 형님과 함께 새말에서 소사로 향하는 고갯길을 오를 때였다. 겨울이라 길이 미끄러워 천천히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오던 차가 미끄러지며 중앙선을 넘어와 록스타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놀란 것도 잠시, 내 차를 들이받은 그 차가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던 나는 불법 유턴을 해 도망가는 차를 뒤쫓았다. 그런데 내리막이라 가속이 붙을 만도 한데, 소프트톱이 찢어져라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아도 도무지 간격이 좁아지질 않았다. 결국 도망간 그 차는 잡지 못했고, 우리 형제는 미끄러운 그 언덕길을 다시 처음부터 올라야 했다. 그렇게 아픈 기억도 있었지만, 그 뒤로 구입한 SUV와 RV들은 나의 여행에 많은 즐거움을 더해줬다. 거친 운전에 빠른 속도를 즐기기는 해도 별다른 사고없이 즐거운 여행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좋은 차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SUV를 타고 있지 않지만, 몇 년 안에는 그동안 꿈꿔오던 세계여행을 온 가족과 함께 SUV를 타고 떠나고 싶다. Z
‘미스 장’의 애마 박경희<방송작가> 2004-04-07
친지분들이 즐겨 부르는 어머니의 별칭은 ‘미스 장’이다. 삶에 있어 젊은 사람 못지 않은 열정과 의욕을 갖고 계신다는 뜻에서 붙은 별칭이다. 칠순이 가까운 지금도 새벽이면 가이드 자격증 시험을 보신다고 일본어 테이프를 틀어 놓고 회화를 익히시고, 언제부턴가는 칠순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치매 예방에 좋다시며 컴퓨터 게임 매니아가 되셨다. 그리고 일주일에 몇 번은 한평생 교단에 계시면서 국어과목과 아이들의 상담교사를 하셨던 것을 활용해 도서관으로, 지역상담소로 자원봉사를 하신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뱃살과의 전쟁’이라며 수영도 열심히 다니신다. 어머니의 하루는 젊은 내가 봐도 숨이 가쁘다. 이렇게 바쁜 어머니의 가장 든든한 친구는 자동차다. 더 늙기 전에 따신다며 정년을 몇 해 앞두고 면허를 따시더니 월급을 모아 예쁜 소형차까지 사셨다. 퇴직 후 남은 시간을 여행으로 보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신 것이다. 주변에서는 환갑이 다 된 나이에 면허시험에 붙은 것도 대단한데 운전까지 직접 하냐며 “역시 미스장이야”를 연발했고 어머니는 그들의 말에 으쓱해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운전하고 다니시는 당신의 모습을 꽤나 즐기셨다. 그렇지만 자식들 맘은 어머니의 친지분들과는 영 다르다. 초보시절, 어머니가 차를 몰고 나가는 순간부터 식구들은 전화기 앞에 대기 상태였다. 하루에도 몇 건씩 날아드는 교통범칙금 스티커는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우체부조차 친한 이웃으로 만들어줄 정도였고 긴장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니시는 통에 저녁이면 늘 “아이구……” 하며 견비통을 호소해 사들인 파스가 또한 얼마인지 모른다. 더구나 주행 중 주변 자동차 흐름을 살필 여유를 채 갖추지 못한 초보인지라 여기서 쿵 저기서 쿵, 가만히 서있는 차에다가도 박치기를 하시는 통에 이제 어머니 보험료는 웬만한 젊은이의 한달 아르바이트 비용을 훨씬 능가한다. 그러니 그런 저런 모든 호소와 사건처리로 분주한 것은 자식들이다. 그렇게 보낸 3~4년. 이제 어머니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셨지만 초보시절 쿵쿵 내려앉던 딸들의 가슴인지라 지금도 나는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신경이 곤두서고 나도 모르게 해대는 조수석 잔소리에 모녀지간이 앉은 차 안은 매번 썰렁해진다. 자식들은 “왜 돈주고 사서 고생이시냐”며 운전대 놓기를 강요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끄떡 않으신다. 당신 차가 자식보다 낫다는 말씀으로 자식들의 기를 죽이신다. 어디든 당신이 가자는 곳이면 군말 없이 가주는 차가 효자라는 것이다. 삶이 바빠 늙은 어머니를 챙기지 못하는 딸들을 돌려서 나무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어머니 차의 별칭은 ‘미스 장의 애마’다. 엄마가 사랑하는 물건이어서 애마고, 자식들의 애간장을 태워서 또한 애마다. 다행히 겁 많고 꼼꼼한 성격 탓에 지금껏 어머니는 큰 사고 없이 초보 딱지를 떼셨고 이젠 자식들도 바쁘게 사시는 어머니 옆에 차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자식들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이젠 너무나 자랑스럽다. 이제 나나 친구들이나 마흔을 넘다보니 부모님들의 연세가 대부분 칠순을 넘나든다. 그 중 우리 어머니처럼 직접 운전을 하고 다니시는 분들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부모님들이 병원을 가실 때나 어디 외출을 하실 땐 자식된 도리로 하던 일을 접고 잠시 짬을 내서 모셔오고 모셔 가는 번거로움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건강하고 아직도 독립적인 나의 어머니가 부럽다고 한다. 나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또 하나의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도한다. “우리 엄마, 미스 장! 오늘 이 모습 그대로 오래오래 사세요.”
‘하나’부터 바꿔 나가는 자동차문화 김필수<대.. 2004-04-07
필자는 자동차 계통에 종사하다보니 자동차 및 교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도 큰 편이다. 길가를 지나가면서 ‘저 차는 어떤 차이고 특성이 어떻고……’ 생각하거나, 새로운 차를 보면 항상 새로운 궁금증에 수수께끼 풀 듯 고민을 하기도 한다. 또한 잘못된 교통신호체계나 상식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운전자를 보면 우리의 자동차문화에 대한 걱정이 앞설 때도 있으니,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다. 최근의 교통을 포함한 자동차문화를 보면 예전에 비해 많이 발전했다. 우리의 자동차문화를 아끼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도 선진 자동차문화를 이루려면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다. 운전을 하다보면 스스럼없이 창문 밖으로 쓰레기,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차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아직도 모자란 우리 자동차문화의 현주소를 보는 듯해 마음이 씁쓸하다. 지금은 음주운전의 위험성이 충분히 홍보되어, 술을 마실 때는 아예 차를 놓고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예전에는 웃지 못할 위험천만한 사례도 많았다. 필자와 가까운 친지는 얼마나 음주를 하였는지 어두운 8차선 도로를 달리다 깜박깜박 졸아서 순간적으로 노란 중앙선을 찾지 못해 무척이나 당황했다고 한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니 왼쪽에 있어야 할 중앙선이 오른 쪽 끝에 있더라는 것이다. 제 차선을 넘어 반대 차선을 고속으로 달리고 있었다는 얘기이니, 얼마나 끔찍한가. 그때 너무 놀란 이후로 다시는 음주운전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음주운전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이처럼 아찔한 상황을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이밖에도 바로잡아야 할 자동차문화는 분야도 다양하다. 올바른 자동차운전 등 교통안전문화를 비롯해 중고차 유통문화도 있고 차를 관리하면서 항상 접촉하는 정비문화도 있다. 특히 정비문화는 운전자뿐만 아니라 정비업자 모두 큰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다. 정비업의 영세적인 경영규모도 걸림돌이긴 하나, 정비인의 올바른 정비문화 정착은 필수적이다. 일부 정비인들의 잘못된 정비의식이 불신을 낳고 있다. 단순한 부품의 교환만으로 정비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유를 들어 뒤 트렁크 부위까지 수리하는 정비인들이 있다.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운전자들의 자가정비 의식 부재도 바뀌어야 할 부분이다. 운전자라면 단지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자가정비 마인드를 갖고 있어야 한다. 1년 이상 차를 몰고 다니면서도 냉각수 등 기본적인 소모품을 점검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보네트 하나 열지 못하는 운전자를 보면 우리의 자동차문화가 기초부터 부실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고차 유통부문의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주행거리를 조작하거나 사고차를 정상적인 차로 파는 예가 종종 있다. 이런 사례들이 중고차 유통문화의 수준을 깎아 내리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 하나부터 바꾸는 일’이다. 우리 모두 하나부터 다시 시작하자. 세계 자동차 생산 6위국에 걸맞은 자동차문화를 만들어 가자. 남을 탓하기 전에 내 자신부터 하나씩 바꾼다는 자세로 실천에 옮긴다면, 머지않아 우리 손으로 이룬 선진 자동차문화를 기분 좋게 느끼고 체험하는 시대가 찾아 올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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