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자동차로 떠난 77일간의 유럽 집시여행1 2014-08-10
이달부터 3회 일정으로 연재를 시작하는 고태규 교수의 ‘유럽 자동차 여행기’는 고 교수가 77일 동안 자동차로 서유럽을 여행하며 보고 경험하고 느낀 체험을 글로 풀어낸 기행문이다. 유럽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알아두면 유용한 정보들을 여행지 소개보다는 자동차 여행 방법을 중심으로 3회에 걸쳐 소개한다. 그가 유럽 여행을 위해 계약한 리스차의 기간은 90일. 장기 계약 할인율 때문에 77일보다 90일 계약이 더 쌌다고. 1편에서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를, 2편에서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 헝가리를, 3편에서는 베네룩스 3국, 스칸디나비아 3국, 덴마크, 영국,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연재할 계획이다.  몽생미셸 전경. 정상에서 바라보는 해안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지난 3월 12일, 리스차를 인수하기로 계약을 맺고 3월 5일에 서울을 떠나 같은 날에 파리에 도착했다. 시차 때문인지 파리는 아직도 한겨울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9일 내내 비 아니면 눈이 내렸다. 급기야 11일 저녁에는 폭설이 내려 다음 날 아침으로 예정된 리스차 인수를 포기하고 13일에서야 차를 인수했다. 차주가 필자 이름으로 등록된 새차(르노 세닉)다. 에이전시 주차장에 차를 대기시키고 아내가 택시에 짐을 싣고 와서 합류했다. 보르도 쌍떼밀리옹에 자리한 와이너리의 한가로운 풍경 첫 번째 일정은 3월 13일에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 4월 21일(38일간)에 이탈리아 밀라노에 이르는 코스. 경유 국가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나코, 이탈리아 6개국이며, 주행거리는 약 9,000km. 서울-부산을 10번 정도 왕복하는 거리다. 유럽 대륙은 작은 나라와 도시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 같지만 주행거리가 긴 도시도 많다. 까미노에 있는 순례자 동상에서 포즈를 취했다 3월 13일 파리를 출발해 몽생미셸부터 생말로, 보르도, 생장피에드포르, 팜플로냐, 부르고스, 레옹, 산티아고, 포르투, 리스본, 세비야, 말라가, 그라나다, 코르도바, 톨레도, 마드리드, 발렌시아, 바르셀로나, 아를/아비뇽, 마르세이유, 칸느, 앙티브, 니스, 모나코, 망통, 산레모, 제노바, 라스페짜, 피사, 피렌체, 로마, 나폴리, 폼페이, 쏘렌토(카프리), 아씨지, 시에나, 피렌체, 볼로냐, 베니스, 베로나까를 거쳐 4월 19일에 밀라노에 도착했다. Galp 주유소의 주유기 모습. 오른쪽(검은색)부터 일반 디젤, 고급 디젤, 일반 휘발유, 고급 휘발유다 지면 관계로 찾아 간 주요 관광지에 대한 여행기는 대부분 생략한다. 요즘은 유용한 정보를 집대성한 가이드북이 넘쳐나기 때문에 관광 명소에 관한 내용은 이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필자는 ‘유럽 100배 즐기기’(RHK), ‘유럽’(론니 플래닛 한국어판), ‘드라이브인 유럽’(시공사), ‘세계테마기행’(EBS), ‘채널t’(여행 전문 TV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관광명소를 중심으로 이동했다. 로마 포로로마노의 아름다운 야경  자동차 여행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유럽 자동차 여행의 장점은 관광 목적지에 대한 이동과 접근이 편리하다는 것이다. 짐을 거의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거니와 많이 걷지 않아도 된다. 때문에 다른 여행 수단보다 덜 피곤하고, 취사도구와 식자재를 싣고 다니니 식사에 큰 불편함이 없다. 남자들의 경우 두 명 정도는 차 안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여행 중 만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었던 프란체스코 성당 반면 유럽 자동차 여행의 단점은 자의든 타의든 사고의 위험이 매번 도사리고 있고, 해외라서 보험처리 절차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또 불어(프랑스 자동차를 리스할 경우나 프랑스 지역을 여행할 때)나 영어를 못하면 굉장히 난감하다. 그라나다 동굴 따블리오 (Los Trantos)에서 플라멩코를 추고 있는 여인 필자도 로마에서 차량 테러와 강도를 당했다. 강도들이 필자가 없을 때 자동차 앞바퀴를 고의로 펑크를 낸 후, 펑크가 난 것을 보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필자에게 카센터를 알려준다고 얘기를 거는 사이 다른 강도 한 명이 반대편 차 문을 열고 카메라와 핸드폰이 든 가방을 가지고 달아난 것이다. 이건 소매치기가 아니라 완전히 조직적인 날강도 수준이다(자세한 보험처리 절차는 다음호에 소개하겠다). 밀라노 명품 거리에 있는 페라리 스토어. 페라리 매니아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여행 경비는 여행자의 사정과 여행의 질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필자는 여행 경비를 아내와 2인 기준으로 3개월(90일에 동유럽과 그리스, 터키를 제외한 유럽 국가. 90일이 넘으면 여행자 보험이 안 되고 일반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1인당 300만원 정도 소요된다) 동안 4,000만원을 예상하고 있다. 항공편을 포함한 교통비 1,200만원(연료비, 주차비, 통행료), 숙박비 1,000만원, 식사비 1,000만원, 기타 생활비와 비상금 800만원을 합친 금액으로, 이는 최저 예산으로 계산한 것이다. 베니스 무라노 섬의 유리 제조 기술은 오랜 역사와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참고로 정식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것은 보르도(부드러우면서도 촉촉한 소고기를 소스에 버무린 보르도 특산 요리)와 마드리드(꼬친요; 새끼 돼지고기 요리로 원래는 세고비아 특산 요리) 등 두세 번 밖에 없다. 그밖에는 모두 빵과 컵라면 등 자가식(까르푸나 파노라마 등 대형 쇼핑센터에서 구입)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민박집에서 얻은 고추장에 오이와 피망(고추 대신)을 찍어 먹으면서 황홀해 하는 기분을 이해하실는지…. 랑글리아 다리’에 등장하는 다리와 안내판에 그려진 고흐 그림 자동차를 리스로 할 것인지, 렌트로 할 것인지는 여행기간과 비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기간이 21일(리스차 대여 기준) 이상이면 무조건 리스차가 유리하다. 필자는 르노 세닉을 90일에 315만원(종합보험비 포함)에 리스해 하루 3만5,000원 정도로 이용했다. 트렁크가 커서 모든 짐이 다 들어가 마음에 쏙 들었다. 현재 리스차는 프랑스 자동차 회사인 푸조, 르노, 시트로엥에서 서울에 에이전시를 두고 영업하고 있다. 괴테가 1786년에 올라가서 스케치를 하다 스파이로 몰려 곤혹을 치른 말체신 성탑(이태리 가르다 호수) 그밖에 준비물로는 핸드폰은 반드시 로밍과 인터넷이 되는 것으로 준비하고 지도는 1/300만, 1/90만, 1/5만을 각각 준비하는 게 좋다. 도착지가 런던이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사온다. 차를 인수하는 파리는 영어판 지도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필자 역시 아직도 1/5만 지도를 구하지 못해 1/300만, 1/90만 지도 2개와 내비게이션만 사용하고 있다. 베니스 두깔레 궁 부근에서 바라본 성. 조르죠 마조레 성당과 곤돌라 세차장이 유리벽 안에 있어서 매우 깔끔했다 동행자는 최소 2명 이상이어야 경비가 절감되고, 동행 중 최소한 2명은 운전을 할 수 있어야 장거리 운행에 대한 부담이 덜하다. 하루에 500~700km 운전하는 구간도 있기 때문에(여행 기간이 짧을수록 운행 거리는 길어진다) 혼자서는 운전하기가 매우 힘들다. 베니스의 명물 레알토 다리 필자가 생각하건데 자동차 여행자는 모험을 즐기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모든 도로와 교통 시스템이 낯선 환경에서 운전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해외 자동차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감을 갖는 것이다. 필자 역시 처음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보닛을 열 줄도 몰랐고 바퀴 하나 교체할 줄 몰랐는데, 어느덧 운전을 잘하게 됐으니 말이다. 아내처럼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던 사람도 프랑스와 스페인 고속도로에서 시속 140~150km으로 내달리기도 했다. 줄리엣 하우스 입구 통로에 그려진 수만 명의 낙서가 잭슨 폴록의 현대 미술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38일 동안 견인 한 번 당하고(코르도바), 딱지 한 번 떼이고(리스본), 사고를 한 번 당했다(로마). 영국을 제외한 모든 유럽의 도시들은 도로 시스템과 운전 방법이 비슷해서 일주일이면 익숙해진다. 한국에서 멱살 잡고 싸우면서 운전을 배운 우리는 세계 어디를 가도(단, 이탈리아는 제외) 운전을 잘 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주유소와 휴게소, 숙박, 식사 해결 방법에 관한 정보는 다음호에 소개할 예정이다.  고태규 (한림대학교 컨벤션관광경영학과 교수)한림대학교 컨벤션관광경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고태규 씨는 틈틈이 국내와 세계 곳곳을 떠돌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있다. 실크로드 문명에 관심이 많아 은퇴 후 일본에서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장안과 카쉬가르, 사마르칸트, 이스파한, 바그다드, 이스탄불을 거쳐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는 것이 생애 마지막 꿈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고성 통일전망대부터 해남 땅끝마을까지 혼자 걸으며 장거리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저서로 ‘주말을 이용한 국토종단 도보여행’, ‘부부라면 이렇게 한번 살아봐’, ‘마음으로 하는 여자, 몸으로 하는 남자’ 등이 있다.  글 고태규(한림대학교 컨벤션관광경영학과 교수)사진 고태규(한림대학교 컨벤션관광경영학과 교수) 
자동차로 떠난 77일간의 유럽 집시여행2 2014-09-10
이 글은 고태규 교수가 서유럽을 여행하며 보고 경험하고 느낀 체험을 글로 풀어낸 기행문이다. 1부(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에 이어 2부에서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 헝가리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이태리 코모 호수에서 스위스 생모리츠로 넘어가는 길의 전경 4월 23일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시작하여 5월 14일 독일 로스톡에 이르는 총 주행거리 4,000km. 생모리츠, 쿠어, 루체른, 인터라켄, 베른, 로잔, 제네바, 에비앙, 몽트뢰, 베른, 취리히, 퓌센, 뮌헨, 인스부르크, 짤츠부르크, 비엔나, 부다페스트, 프라하, 베를린, 로스톡 - 갯서(페리 이동), 하노버,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그 등을 경유했다. 더불어 이번에는 유럽에서 자동차 여행을 할 때 알아두면 유용한 고속도로 통행료, 톨게이트 통과하는 방법, 자동차 연료비, 주유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신용카드 인증을 거쳐야 주유가 가능하고 주유한 다음 카드를 다시 넣어야 영수증이 나오는 주유기도 있다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자동차 여행자 입장에서는 고속도로 통행료를 받지 않는 나라는 좋은 나라이고, 받는 나라는 나쁜 나라다. 일부 구간에서는 40∼50유로까지 내야하기 때문에 통행료는 여행 경비 운용에서 큰 부담이 된다. 서유럽 동북 국가들은 받지 않지만 서남부 국가들은 대부분 통행료를 받고 있다. 특히 독일은 통행료가 완전 무료일 뿐만 아니라 속도 무제한 구간이 많아서 스피드족들의 천국이다.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도 통행료를 받지 않는다. 아침 안개에 덮인 노이슈반슈타인 성(독일 퓌센)  통행료는 안 받지만 통행허가증(비그넷: 10∼20유로)을 사서 그 나라에서 주행하는 동안 운전대 앞 유리창에 부착해야 하는 나라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이다. 덴마크는 통행료는 없지만 두 개의 대형 다리 통행료로 25∼45유로를 받는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일부 구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간에서 통행료를 받는다. 포르투갈과 이탈리아는 고속도로 수준도 낮으면서 가장 비싼 통행료를 받는다. 1km에 10센트, 그러니까 10km에 1유로로 상당히 비싼 편이다. 다만 장거리로 갈수록 좀 싸지긴 한다. 스위스에는 유명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멋진 경치가 흔하다(라이생 스키리조트) 나라만큼 다양한 톨게이트 통과 방법톨게이트에 접근할 때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우리 하이패스처럼 그냥 통과하는 라인과 카드로 내는 라인, 현금으로 내는 라인, 카드와 현금 동시에 낼 수 있는 라인으로 구분되어 있다. 우리는 현금과 신용카드를 모두 준비하고 있었는데, 일부 신용카드는 안 되는 곳도 있기 때문에 두 개 이상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다. 우리는 세 개를 가지고 다녔다. 인터라켄 융프라우 캠핑장. 장기 자동차 여행자에게 아주 유용한 숙박시설이다 통행료를 내는 방법도 고속도로마다 다르다. 진입할 때 내는 곳과 나갈 때 내는 곳이 있지만 나갈 때 내는 고속도로가 훨씬 많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수금 직원이 있는 게이트로 가면 된다. 그러나 직원이 없는 곳이 많아서 골치가 아프다. 뮌헨의 명소 비어 가든에서 시민들이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현금을 내는 곳은 문제가 없지만 카드로 낼 때는 좀 복잡하다. 진입할 때 뽑은 통행카드를 넣는 구멍과 신용카드를 집어넣는 구멍이 다른 곳(주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도 있고, 같은 곳(주로 이태리)도 있다. 구멍이 같은 곳은 처음에는 신용카드 구멍 찾느라 한참 헤매게 된다. 환상적인 디자인의 뮌헨 지하철 모습 먼저 진입할 때 뽑은 카드를 구멍에 넣으면 통행료 금액이 액정으로 표시된다. 그러면 같은 구멍에 신용카드를 넣으면 된다. 영수증은 자동으로 나오는 곳도 있고, 안 나오는 곳도 있고, 영수증 버튼을 눌러야 나오는 곳도 있다. 몇 번 해보면 금방 익숙해지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비엔나 시립공원에 자리한 요한슈트라우스 동상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우리처럼 반드시 주유소가 함께 붙어 있다. 우리와 다른 점은 주유소가 휴게소 기능을 함께 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휴게소에서 파는 음식과 물건을 주유소에서 판매한다. 샤워가 가능한 휴게소도 많아서 자동차 여행자에게는 정말 유용하다. 특히 차에서 잠을 자는 여행자들은 여기서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해결하면 경비를 상당히 절약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계속 차에서 자기는 힘들기 때문에 하루는 차에서 자고 다음 날은 호텔에서 자는 형태가 바람직하다. 맥도날드나 버거킹, 켄터키프라이드치킨 같은 체인 레스토랑이 있는 경우도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뮌헨의 호프브로이하우스 내부 주유소 화장실에서 50유로에서 1유로(환율은 6월 13일 기준, 1유로=약 1,516원) 정도 사용료를 받는 경우도 많다. 연료를 넣거나 음식을 사 먹으면 화장실 이용이 무료인 곳도 있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화장실 영수증을 바우처로 이용하여 해당 주유소에서 연료비나 다른 물건을 살 때 그 금액만큼(주로 50센트) 감액해준다. 예를 들어 화장실 이용료가 70센트일 경우, 70센트를 머신에 넣으면 50센트짜리 바우처가 나온다. 그걸 버리지 말고 주요소 가게에 가서 제시하면 물건 살 때 50센트만큼 깎아준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등은 고속도로 통행료 대신 비그넷(Vignett)이라는 통행허가증을 운전석 앞에 붙이고 다녀야 한다(10∼20유로) 필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코 넘겼는데 깐깐한 마누라는 왜 그럴까 며칠이나 고민하더니 드디어 그 바우처 시스템을 알아냈다. 지도를 손에 들고도 동서남북이 어디인지 모르는 여자도 그런 건 귀신같이 알아낸다. 사실은 독일에서 내내 모르고 다니다가 암스테르담에 있는 한 화장실 앞에 그 바우처 제도를 설명하는 큰 포스터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친절한 암스테르담씨. 독일 로스톡 항에서 덴마크 겟서 항으로 건너가기 위해 승선을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와 화물차들   주유소 가격 안내판자동차 여행을 하다 보면 가장 눈길이 많이 가는 곳이 내비게이션 다음으로 주유소 입구에 붙어 있는 가격 안내판이다. 연료 종류는 네 가지가 보통이고, 독일에는 다섯 가지도 있다. 보통 디젤(일부 주유소에는 ‘Gasole’이라고 표현된 곳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Gasole은 휘발유가 아니라 디젤이다), 고급 디젤, 보통 휘발유, 고급 휘발유. 그래서 혼동하지 말라고 대개 디젤은 주유기가 검은 색, 휘발유는 녹색으로 되어 있다. 비엔나 길거리에 있는 대여 자전거. 30분은 무료이고 그 다음부터 시간당 1유로씩이다 연료비는 평균 1.1∼2.0유로(환율은 6월 13일 기준, 1유로=약 1,516원) 정도 한다. 안도라가 1.1유로로 가장 싸고, 스위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대체로 비싸다. 독일이 1.4에서 1.5 유로 정도로 싼 편이고, 나머지 국가들은 1.5에서 1.8유로 정도다. 베를린 필하모니의 야경 전체적으로 연료비가 우리보다 비싼 편이어서 전체 여행 경비 운용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싼 나라에서 가득 채우고 비싼 나라는 그냥 경유하는 지혜를 짜야 한다. 우리 차(1.6L급 소형차)의 경우 가득 채우면 80∼90유로가 들어간다. 베를린의 자존심 베를린 필하모니 챔버홀. 랑랑에 이어 중국의 떠오르는 별 왕유자의 피아노 독주회가 열리고 있었다 당연하게 고속도로보다는 일반 도심에 있는 주유소가 가격이 20∼40센트 정도 더 싸다. 우리는 독일의 어떤 주유소에서 1.80유로에 연료를 가득 넣었는데, 불과 10km 안팎 떨어진 다음 주유소(네덜란드 국경 부근)에서 1.30유로인 걸 보고 하루 종일 가슴이 쓰린 적이 있었다. 50L를 주유할 경우 25유로(약 3만7,000원)나 차이가 난다. 25유로면 두 명의 한 끼 식사비에 해당한다. 스위스 루체른의 트레이드 마크인 카펠교. 지붕 아래 그려진 패널화(화판에 그린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주유 방법은 자가 주유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처럼 직원이 넣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부다페스트에서는 주유도 해주고, 유리창까지 닦아주는 곳도 있었다. 연료비 지불 방법은 먼저 주유를 한 뒤 주유소 가게 안에 들어가서 계산하면 된다. 아주 드물게 신용카드로 넣어서 인증을 받고, 주유를 하고, 다시 카드를 넣으면 영수증이 나오는 곳도 있다. 이때 카드를 같은 구멍에 다시 넣어야 영수증이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모차르트 어머니의 고향인 짤쯔캄머구트에 있는 볼프강 호수 전경 우리도 이걸 몰라서 한참이나 헤맨 적이 있다. 주유소에서 더러워진 유리창도 닦고, 타이어에 바람도 넣고(우리는 둘 다 할 줄을 몰라서 한번도 한 적이 없다), 화장실도 가고, 식사도 하고, 샤워도 하면서 주유소를 아주 유용한 지원센터로 이용하면 자동차 여행이 훨씬 편리해진다.  고태규 (한림대학교 컨벤션관광경영학과 교수)한림대학교 컨벤션관광경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고규태 씨는 틈틈이 국내와 세계 곳곳을 떠돌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있다. 실크로드 문명에 관심이 많아 은퇴 후 일본에서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장안과 카쉬가르, 사마르칸트, 이스파한, 바그다드, 이스탄불을 거쳐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는 것이 생애 마지막 꿈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고성 통일전망대부터 해남 땅끝마을까지 혼자 걸으며 장거리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저서로 ‘주말을 이용한 국토종단 도보여행’, ‘부부라면 이렇게 한번 살아봐’, ‘마음으로 하는 여자, 몸으로 하는 남자’ 등이 있다.
자동차로 떠난 77일간의 유럽 집시여행3 2013-10-10
'자동차로 떠난 77일간의 유럽 집시여행'은 고태규 교수가 서유럽을 여행하며 보고 경험하고 느낀 체험을 글로 풀어낸 기행문이다. 지난 1부(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와 2부(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 헝가리)에 이어 마지막 회인 3부에서는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3부 여행은 5월 15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시작하여 6월 4일 영국 런던까지의 일정이다. 총 주행거리는 약 6,000km 정도. 주요 경유 도시는 코펜하겐, 오슬로, 스톡홀름, 헬싱키, 오덴사, 룩셈부르크, 암스테르담, 브뤼셀, 부르헤, 칼레, 도버, 런던 등이다. 이번에는 유럽에서 자동차 여행을 할 때 알아두면 유용한 주차하는 법, 숙소 찾는 법, 식사 해결하는 법, 사고시 보험 처리하는 법, 내비게이션 사용법, 페리 이용법 등을 중심으로 엮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배경이 된 크론보르성(덴마크) 유럽 자동차여행은 주차가 늘 문제유럽 자동차여행 중 가장 골칫거리는 바로 주차 문제다. 유럽의 도시들도 우리나라의 대도시들만큼 주차 문제가 심각하다. 중저가 호텔들은 주차비를 따로 요구하는 곳이 더 많을 정도. 유럽 도시에서 여행자들이 주차장을 이용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스톡홀름 중앙역 앞에서 한 아가씨가 지나가는 바이커들 앞에서 즉석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스웨덴) 첫째, 머무르는 호텔 주차장에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내를 관광하는 방법으로 가장 안전하다. 둘째, 도로변에 있는 공용주차장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런 공용주차장은 강도들의 표적이 되곤 한다. 리스차는 빨간 문자판에 F라고 표시돼 강도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기 때문. 필자도 로마 콜로세움 앞에 있는 공용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가 바퀴를 펑크 내고 물건을 훔쳐가는 봉변을 당했다.  네덜란드 잔세스칸스 풍차마을. 풍차 내부에서는 아직도 맷돌로 밀을 빻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셋째, 건물 지하주차장에 주차하는 방법이다. 이 주차장은 사설이기 때문에 차를 안전하게 관리해준다. 주차비가 좀 비싸긴 하지만(1시간에 2~4유로) 차를 도둑맞거나 파손되는 것보다는 낫다. 일종의 손해보험료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필자 역시 공용주차장에서 사고를 당한 후 유명 관광지의 도심에서는 반드시 사설주차장을 이용했다. 사설 주차장은 찾기도 쉽다. 도심을 주행하다보면 건물 모퉁이 간판에 P자로 표시되어 있고, 빈자리가 얼마나 있는지도 네온으로 알려준다. 도심에서 2~4시간 정도 돌아다닐 경우에는 이 방법이 아주 효과적이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고흐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반 고흐 미술관(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안전한 주행은 편안한 잠자리에서 시작자동차여행도 개인 자유여행(FIT-Free Independent Tour)에 속하기 때문에 숙박을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다. 비싼 호텔에서 자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대개 낯선 곳에서 저가 호텔을 찾아야 하므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베스트 웨스턴(Best Western) 체인을 메인 호텔로 이용하려고 했다가 너무 비싸서(1박에 평균 100~150유로. 주차비와 아침 식사 포함 여부는 호텔마다 다르다) 바로 이비스(Ibis, 50~100유로)로 변경했다. 우리 부부는 이를 '우리집'이라 부르며 위안을 삼았다.  유럽에서 가장 독특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헬싱키 템펠리아우키오 교회. 암반을 깎아 교회를 만들어서 '암반교회'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핀란드)  이비스가 없는 곳에서는 익스피디아(www.expedia.co.kr) 같은 온라인 여행사의 사이트에서 저가 호텔을 찾아 이용했다. 현지인 민박을 이용하려면 에어비앤비(www.airbnb.co.kr)가 좋다. 방이 남는 현지인의 가정집을 그곳 여행자에게 소개해주는 숙박 소개 사이트로, 현지인과 교류를 좋아하는 여행자에게는 매우 유익할 듯하다.   네덜란드 알크마르 치즈 시장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치즈를 경매하고 있는 모습  숙박의 종류는 크게 호텔, 유스호스텔, 민박, 캠핑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호텔은 주머니 사정에 따라 고르면 된다. 유스호스텔은 가격은 싼 편이지만 샤워실과 화장실이 공용이어서 다소 불편한 점이 있다. 한인 민박은 한식을 먹을 수 있고 가격은 저렴한 편이지만 역시 생활하는 데 불편이 따르고, 특히 대부분 도심에 있어서 주차장이 거의 없다는 점이 최대 약점이다. 다만 한인 민박이 아닌 현지인 민박은 대개 시골에 있기 때문에 주차가 자유롭고 안전하다.   스웨덴 스톡홀름과 핀란드 헬싱키를 왕복하는 페리 SILJA LINE의 내부 모습 자동차 여행자에게는 캠핑장도 적극 추천할 만하다. 가격이 싼 반면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자동차여행자는 차로 이동하는 만큼 10~20km의 거리는 큰 문제가 안 된다. 우리의 경우 전체 88박 중 캠핑장 3박, 현지인 민박 5박, 교민 민박 17박, 유스호스텔 6박, 크루즈 2박, 일반 호텔 15박, 나머지 40박은 이비스를 이용했다.   영국 왕실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윈저성. 여왕이 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만 깃발이 달린다(영국 윈저)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식사 문제도 예산 형편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부분이다. 유럽은 식사비가 매우 비싼 편이기 때문에 레스토랑에 앉아서 메뉴를 주문하는 식사를 하면 둘이서 기본으로 먹어도 단숨에 60유로가 넘어간다. 그래서 맥도날드나 버거킹 같은 햄버거를 먹거나 간단한 샌드위치로 때울 때가 많았다.   아고라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마추어 가수와 이에 장단을 맞추고 있는 술주정꾼(벨기에 브뤼셀 그랑 쁠라스) 예산을 더 줄이는 방법은 숙소에서 밥을 해먹는 것으로 자동차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우리는 처음에는 유럽식 컵라면을 발견해서 그걸 주로 먹었고, 나중에는 밥통을 사서 직접 밥을 해서 먹었다. 원래 호텔 객실에서는 취사를 하면 안 되지만 창문을 열어놓고 밥만 하면 냄새가 많이 나지 않을 뿐더러 저녁에 밥을 해서 다음 날 아침까지 두 끼를 해결할 수 있어서 꽤나 경제적이었다. 반찬은 수퍼마켓에서 오이와 양상추를 구입해 양념장이나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한국에서 갈 때 김과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인스턴트용 국거리를 많이 가져가면 여러모로 유용하다.  런던아이 쪽에서 바라본 영국 국회의사당과 빅벤 바다를 건널 때는 페리 이용유럽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바다를 건널 때는 페리에 차를 싣게 된다. 자동차 티켓 1장만 구입하면 자동차 정원만큼(일반 승용차는 5명, 승합차는 9명까지)의 인원을 인정해주므로 그렇게 비싸지 않다. 그리고 장기간 여행을 하며 매일 자동차만 타다가 광활한 바다에서 페리를 타고 가면 기분 전환도 되고 색다른 경험도 할 수 있다. 자동차로 바다를 건너는 구간은 주로 프랑스 칼레에서 영국 도버로, 독일 로스톡에서 덴마크 겟서나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핀란드 헬싱키로, 이태리 바리나 브린디시에서 그리스 파트라로 넘어가는 구간이다. 우리는 칼레에서 도버(승용차 1대와 2인 기준 113유로이며 5인까지는 동일한 가격이 적용된다), 로스톡에서 겟서(승용차 1대와 2인 111유로)로 이동할 때 페리에 차를 싣고 갔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를 페리로 왕복할 때는 차를 항구 주차장에 주차해 놓고 사람만 탔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공연 중인 런던 피카디리의 Queen's Theatre 사고시 보험 처리하는 방법자동차여행에서 가장 염려되는 부분이 자동차 사고와 물건의 도난이다. 필자는 다행히 자동차끼리의 접촉 사고나 충돌 사고는 없었지만 자동차 파손과 물건 도난 사고를 한 번 당했다. 로마 콜로세움 앞 공용주차장에서 강도들이 앞 타이어를 펑크내 사고 처리를 위해 차 밖으로 나온 사이 카메라와 핸드폰 등이 든 가방을 훔쳐 달아난 것. 이렇게 황당한 사고를 당하면 화가 나면서 당황하게 되는데, 우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그 다음 바로 응급지원센터에 전화로 연락해 사고를 신고하고, 사고접수번호(르노의 경우 Assistant Reference. 보통 10자리 아라비아 숫자로 'Case Number'라고 한다)를 반드시 받아두어야 한다. 나중에 보험금을 신청할 때 꼭 필요하다.  케임브리지 근교의 한적한 시골 도로와 주변 풍경(영국 케임브리지) 자동차 파손의 경우, 그 정도와 여행자의 사정에 따라서 처리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 경미한 경우에는 여행자가 비용을 먼저 지불하고 나중에 환불받는 것이 좋다. 필자는 앞 타이어를 교체하고(120유로) 구입(150유로)하는 등 모두 270유로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중에 도난 물건 등에 대한 보험금을 신청할 때 환불을 신청했기 때문에 여행 일정에 큰 차질은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험회사에 연락을 하고 보험회사가 지시한 대로 처리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필자의 경우 보험회사에서는 운전자가 직접 타이어를 갈아 끼운 후 정비센터(garage)에 가라고 했는데, 직접 할 수 없어 응급서비스센터를 불러 타이어를 갈아 끼웠다. 나중에 이 금액(120유로)은 보상해줄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아서 현재 에이전시를 통해 항의 중이다. 그러니까 피해 금액에 관계없이 보험회사의 지시대로 처리를 하는 것이 사후 원활한 보상처리를 위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 경우 사고 정도에 따라 며칠 동안 정비센터에 차가 묶여 있거나 대체 차량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브뤼셀의 명물 푸줏간 거리 먹자골목(벨기에)  사고를 당하면 해당 지역의 경찰서에 가서 사고경위서(Police Report)를 받아 두어야 한다. 이 문서가 국내외 보험금 청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이 서류가 없으면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다. 서류를 작성할 때는 도난 물건을 구체적으로 적어야 한다. 예를 들어 캐논 600D 카메라를 분실하였다면, 캐논 600D 카메라 1대가 아니라 본체 1개, 캐논 50-200mm 렌즈 1개, 캐논 카메라 배터리 1개, 카메라 가방 1개, 렌즈 커버 1개 등으로 상세하게 기재해야 한다. 또한 처음 살 때 받은 영수증 원본을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 영수증이 없으면 현지 보험사에서는 보험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프랑스 칼레항에서 영국 도버항으로 건너가는 자동차들이 입국심사를 받고 있다 보험금을 신청할 때는 사고 후 3개월 이내(국내 에이전시가 대행할 경우 2개월 정도)에 보험금 지급청구서(Insurance Refund Claim Form), 경찰 사고경위서, 본인 진술서, 사고 신고서(Accident Report, 보통 자동차보험계약서 봉투에 함께 들어 있다), 영수증 등을 첨부하여 현지 보험사(사고신고서에 우편 주소가 적힌 발송 봉투가 들어 있다)나 한국 에이전시에 우편으로 보내면 된다. 처리기간은 접수 후 2개월에서 5개월 정도 걸린다. 사고시 구체적인 응급상황 대처 요령과 보험금 지급 절차에 대해서는 www.eurodrive-renault.com을 참조하기 바란다.  한때 싸구려 선술집과 선원들로 북적였던 뉘하운 항구(덴마크 코펜하겐) 내비게이션과 친해지자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내비게이션과 잘 사귀어야 안전하고 편리하게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 필자처럼 프랑스에서 리스하는 차라 하더라도 영어로 나오는 내비게이션을 선택할 수 있다. 기능은 국내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유럽의 도로에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라운드어바웃(round about)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그 점만 조심하면 된다. 내비게이션은 이를 '로터리'라고 말하는데, 중앙에 라운드를 두고 사방에서 차가 진입하고 나가는 방식이다.   안데르센박물관에 수학여행을 온 어린이들(덴마크 오덴세) 영국에는 신호등이 있는 곳도 있다. 이곳에서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왼쪽 라인으로 주행하기 때문에 라운드어바웃에서도 왼쪽으로 돌고, 나머지 국가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운전석이 왼쪽에 있고 오른쪽 라인으로 주행을 하기 때문에 모두 오른쪽으로 돈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차를, 나머지 국가에서는 왼쪽에서 들어오는 차를 잘 살펴야 한다. 안트베르펜 마르크트 광장과 시청사 건물. 중간에 '브라보' 동상이 희미하게 보인다(벨기에) 누구나 자동차여행을 즐길 수 있다지금까지 3회에 걸쳐 유럽에서 자동차로 여행하는 방법을 소개했다. 필자는 자동차 자유여행이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은 아주 유용한 여행 방법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우리 부부처럼 타이어를 갈아 끼우지도 못하고 심지어 자동차 보닛을 열 줄 모르는 사람도 큰 문제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자신감만 있으면 누구나 자동차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아무쪼록 이 글이 앞으로 유럽 자동차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고태규 (한림대학교 컨벤션관광경영학과 교수)한림대학교 컨벤션관광경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고규태 씨는 틈틈이 국내와 세계 곳곳을 떠돌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있다. 실크로드 문명에 관심이 많아 은퇴 후 일본에서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장안과 카쉬가르, 사마르칸트, 이스파한, 바그다드, 이스탄불을 거쳐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는 것이 생애 마지막 꿈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고성 통일전망대부터 해남 땅끝마을까지 혼자 걸으며 장거리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저서로 ‘주말을 이용한 국토종단 도보여행’, ‘부부라면 이렇게 한번 살아봐’, ‘마음으로 하는 여자, 몸으로 하는 남자’ 등이 있다.
la Tomatina 스페인 뷰뇰에서 펼쳐지는 광란.. 2004-08-24
스페인 사람들만큼 축제를 즐기고 사랑하는 민족도 드물다. 거의 대부분의 도시가 매년 한 차례 정도는 퍼레이드와 카니발, 불꽃놀이, 춤 등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를 벌인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종교 페스티벌로 성주간에는 지역의 수호성인을 위한 미사와 화려한 행진 등이 나라 전역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이 나라의 축제 모두가 종교성을 띄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페인에는 즐거움과 재미를 위한 축제가 더욱 많다. 스페인 전역에서 매년 10만 가지에 이르는 크고 작은 축제가 펼쳐진다고 하니, 한 마디로 축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축제 때가 되면 사람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거리와 광장을 점령하고 열기를 뿜어댄다. 이방인의 눈으로 봤을 때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잘 노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암묵적인 룰 안에서 토마토를 던져라 스페인의 수많은 축제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재미도 있는 축제가 바로 ‘토마토 전쟁’(la Tomatina)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이 축제는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의 작은 마을인 부뇰(Bunol)에서 매년 8월 마지막 수요일에, 단 2시간 동안만 열린다. 부뇰은 인구가 채 1만 명도 되지 않는 한적한 마을이지만 토마토 전쟁이 열리는 날이면 도시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다. 동네 사람들과 전 세계 각 국에서 몰려든 수만 명의 관광객이 어우러져 서로에게 토마토를 던지며 광란에 가까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뒹굴며 마구 토마토를 던지다 보면 온몸은 어느새 토마토로 뒤범벅이지만 온갖 스트레스는 단박에 사라진다. 토마토 축제의 기원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친구들끼리 토마토를 던지며 장난을 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1944년 농민들이 토마토 값이 떨어진 것에 항의하기 위해 마을축제 때 시의회 의원들에게 토마토를 던진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1945년 마을축제에 참가하고 싶던 한 청년이 무작정 퍼레이드에 끼어 들자 이를 말리던 참가자들과 싸움이 일어났고 마침 인근 야채가게에서 토마토를 집어던진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이 축제를 즐기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너나 없이 그저 트럭 가득히 실려온 토마토를 마구 던지고 맞으면 된다. 참가자 제한 또한 없다. 축제의 열정과 광기를 즐기려는 사람은 누구나 환영.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해 보이는 축제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군중들을 열광시킨다. 토마토 전투에는 몇 가지 룰이 있다. 먼저 술병을 비롯해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물건도 휴대하면 안 되고, 토마토는 상대에게 던지기 전에 으깨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을 토마토 범벅으로 만들 수 있다. 남자들은 가능하면 티셔츠를 입지 않는 것이 좋다. 입고 있으면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흥분한 참가자들이 옷을 찢는 경우가 있다. 간혹 일부 짓궂은 참가자들이 여자들의 옷은 물론 브레지어까지 찢는 경우가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축제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즉시 던지는 것을 멈춰야 한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이런 룰이 잘 지켜져 내려와 토마토 축제에는 아직까지 커다란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평화로움, 광란, 그리고 다시 평화 축제가 열리는 당일의 부뇰은 평소의 평화로움을 상실한 채 분주하게 돌아간다. 발렌시아에서 기차를 이용해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부뇰 기차역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기차 안에서부터 들떠 있던 관광객들은 너나할것없이 마을광장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모두들 토마토의 물결 속으로 아낌없이 뛰어들 심산인지 대부분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간단한 복장들 일색이다. 축제는 보통 아침 11시에 시작되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수만 명이 몰려들어 메인 무대가 되는 마을의 중앙광장과 주변 골목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고 만다. 11시 정각.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울리면 8월의 뜨거운 태양열을 식히려는 듯 대형 살수차가 다가와 참가자들에게 물을 뿜어댄다. 이 뿐 아니라 지붕에서는 주민들까지 호수나 양동이로 물세례를 퍼붓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참가자들은 거대한 함성소리와 함께 어떤 상대에게든 웃옷이나 수건, 신발을 벗어 던지기 시작한다. 토마토 던지기의 전초전인 셈이다. 이윽고 탑에서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사람들은 “토마테! 토마테!”를 외치며 열광하기 시작한다. 곧이어 토마토를 가득 실은 트럭이 좁은 골목과 인파를 헤치고 나타나면 본격적인 토마토 전투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너나할것없이 토마토를 주워 던져댄다. 내 편, 네 편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본능적으로 토마토가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던지는, 단순한 반사행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넘어지고, 소리치고, 웃으며 난장판을 벌이다보면 어느새 축제의 주인공이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토마토 전투에서 구경꾼이나 카메라를 든 사람은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눈에 띄었다 싶으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사방에서 토마토가 날아든다. 이쯤 되면 구경꾼도 가만히 맞고만 있을 수는 없다. 토마토, 옷, 신발, 어떤 것이든 손에 잡히는 것이면 뭐든지 집어던지며 축제 속으로 뛰어든다. 토마토 축제가 해가 갈수록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이 축제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트럭이 몇 번이나 더 나타나 토마토를 뿌리면 어느새 영원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한 시간이 지나고 오후 1시 정각에 축제의 종료를 알리는 폭죽이 터지며 흥겨운 난장을 마감하게 된다. 거대한 함성과 토마토의 물결 속에서 모두들 웃고 떠들며 즐기던 짧은 순간의 축제는 이렇게 끝이 난다. 광란의 열기가 휩쓸고 지나간 도시는 완전히 붉은색 일색이다. 창문이고 벽이고, 사방이 토마토 빛으로 염색되어 있다. 거리에는 축제의 잔해들이 그대로 토마토 주스가 되어 흘러 넘친다. 여운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온몸에 토마토를 뒤집어쓴 채, 바닥에 누워 웃고 떠들며 잠시동안 광대가 되어버린다. 머리, 눈, 코, 입 할 것 없이 토마토를 온통 뒤집어쓰고 서로를 보며 히죽히죽 웃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세상의 번뇌와 모든 걱정을 잊은 듯한 그들의 표정은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이런 여운도 잠시, 이내 도시를 일상으로 되돌려놓기 위한 청소가 시작된다. 살수차가 강력한 물줄기를 뿜어내면 수만 톤에 달하는 축제의 잔해는 순식간에 지하 배수관 속으로 빠져들며 모습을 감춘다. 피해를 막기 위해 건물들에 쳐놓았던 비닐과 천을 걷어내면 마을을 뒤덮고 있던 축제의 흔적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불과 10여 분 전까지만 해도 수만 명이 모여 흥겨운 축제를 즐긴 장소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1년을 책임지는 8월의 단 하루 주민들이 청소를 할 즈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토마토 반죽이 된 참가자들은 주민들이 뿌려주는 물로 몸을 씻는다. 35℃가 넘는 스페인의 강렬한 여름 햇빛과 땀, 토마토로 범벅이 된 참가자들에게 이들이 뿌려주는 한줄기의 물보라는 시원한 청량음료와 같은 역할을 한다. 거리에서 잔해물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면 참가자들은 골목 곳곳에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며 축제의 마지막 열기를 만끽한다. 모두들 낯선 얼굴이지만 금방 친구가 되어 마냥 흥겨운 시간을 갖는다. 적과 우군, 승자와 패자의 구분 없이, 단지 축제 그 자체를 만끽한 다음의 해방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삶은 언제나 고달픈 그림자가 아니다. 치열한 경쟁과 번잡한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1년에 한 번, 힘찬 생명의 숨소리를 불어넣는 토마토 축제는 다시 1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희망의 불꽃이다. 한바탕 신명나는 난장판을 벌이고 나면 무거운 세상의 짐도 갑자기 가벼워지고 새로운 힘이 솟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까짓 축제 하나에 야단법석을 떤다고? 토마토 축제의 광기를 단 한 번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페인 부뇰에서 보내는 8월의 마지막 수요일을 기다리게 된다. 스페인 토마토 축제 여행정보 ● 항공 : 네덜란드항공(KLM)이나 타이항공(TG)이 암스테르담과 방콕을 경유해 스페인까지 운항한다. 스페인에서는 발렌시아에서 부뇰까지 수시로 기차가 운행된다(1시간 소요). ● 장소 및 방문시기 : 발렌시아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부뇰에서, 매년 8월의 마지막 수요일에 열린다. 토마토 던지기는 12시부터 1시까지 벌어지지만, 실질적인 축제는 오전 11시부터 시작된다. 11시부터 이미 수만 명의 참가자가 모인 가운데 물을 뿌리고 옷과 신발을 던지는데, 이 또한 토마토 던지기 못지않게 재미있다. ● 날씨 : 8월의 스페인은 그야말로 찜통더위다. 한낮의 온도는 35℃를 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밤에도 30℃를 넘는 경우가 많다. 피부와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외선 차단크림과 선글라스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 주의할 점 : 축제중에는 가능하면 카메라를 소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사방에서 정신 없이 토마토가 날아든다. 만약 카메라를 꼭 지녀야 한다면 비닐로 잘 싸서 보호하도록. 수만 명이 좁은 공간에 몰려 있기 때문에 소매치기도 조심해야 한다.
수리남 남미대륙 속의 작은 네덜란드 2004-08-18
열대 우림에서흘러나오는 강은 바다처럼 넘실댄다. 흔히들 강은 땅과 땅 사이를 가르는 경계가 된다고 한다. 나라와 나라가 강을 두고 마주보면 강은 바로 국경이 되는 것이다. 강의 하류는 경계가 너무나 명확하다. 그러나 넓었던 강이 상류로 올라가면서 수많은 지류를 만나면 강폭은 좁아지다가 어디서부터가 본류이고 어디서부터가 지류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여기서부터 혼란의 불씨는 커져간다. 남미대륙 북단은 왼쪽으로부터 큰 나라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가 자리잡고 오른쪽 끝으로 조그마한 세 나라가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있다. 가이야나와 수리남, 기아나다. 도토리 세 개가 브라질이라는 코끼리 머리 위에 앉은 꼴이다. 가운데에 자리잡은 나라 수리남은 왼쪽의 가이야나와 오른쪽에 있는 프랑스령 기아나와 국경 분쟁에 시달린다. 양쪽의 국경이 되는 코란틴 강과 마로니 강이 상류에서 찢어지며 본류와 지류를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제각기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땅을 넓히려 목소리를 높인다. 유럽 열강의 침입으로 질곡의 세월 보내 수리남이 걸어온 길을 보면 ‘한 나라의 땅도 사람 사는 집처럼 주인이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메리 인디오들이 고기잡고 농사짓고 사냥하며 조상 대대로 평화롭게 살던 이 땅을 유럽인들이 처음 본 것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지 7년 후가 되는 1499년이다. 신대륙 어딘가에 황금으로 뒤덮인 땅, 엘도라도가 숨어있다는 소문이 유럽에 퍼지자 일확천금을 노리는 유럽의 건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600년대 초 가장 먼저 이 땅에 정착한 유럽인은 더치(네덜란드인)들이었다. 이들은 정글을 뚫고 강을 건너며 엘도라도를 찾아 헤맸지만 헛수고라는 걸 깨닫고 이 땅에 사탕수수와 코코아, 열대과일 농장을 마련했다. 네덜란드 무뢰한들은 땅만 빼앗은 게 아니라 땅주인인 인디오들을 잡아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인디오들은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면역력이 전혀 없는 인디오들에게는 유럽인들이 옮긴 감기도 치명적이었다. 여기에 악랄한 유럽 농장주들의 혹사가 더해져 인디오들은 차례차례 쓰러져갔다. 농장이 늘어나면서 노동력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백인들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을 시작했다. 대서양을 건너온 건장한 흑인노예들이 농장에 투입되었다. 달콤한 설탕과 고소한 코코아 그리고 메이스 후추 같은 온갖 열대 향신료는 유럽인들의 미각을 미치게 했다. 농장은 더더욱 커지고 노동력의 수요는 계속 늘어만 갔다. 쇠사슬에 묶인 흑인노예들도 계속 들어왔다. 농장주들의 혹사에 견디다 못한 흑인노예들은 농장을 탈출해 몰래 마련해둔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 세월이 흐르며 유럽인들은 입맛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귀족들의 가구는 그때까지 오크(참나무)와 단풍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수리남 정글에서 베어낸 마호가니와 로즈로 만든 가구의 화려한 색깔과 나무 문양은 오크와 단풍의 목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유럽인들의 벌목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카리브 인디오들이 모여 사는 갈리비 마을 처음엔 네덜란드가 수리남을 지배하다가 네덜란드의 군사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국과 프랑스가 이 땅을 차지하고 협상에 의해 또다시 수리남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들여오기 어렵게 되자 그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끌고 왔다. 1975년 마침내 수리남은 독립했다. 이 땅의 원래 주인이었던 아메리 인디오들은 거의 사라지고 아프리카에서 잡혀왔던 흑인노예의 후손과 인도네시아인들 그리고 인도의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농장을 탈출했던 흑인노예 후손들은 부시네그로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정글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나라 국어는 네덜란드어지만 부시네그로들은 아직도 서부 아프리카 가나어를 쓰고 있다. 독립 후 이 나라는 혼란에 빠진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데시는 잔인하게 민주 인사들을 처형하고 부시네그로들을 반정부적이라고 단정해 정글 속의 마을을 불태우며 무자비한 탄압을 계속했다. 온 나라가 내전에 휩싸였다. 나라를 피로 물들이는 소용돌이가 멈춘 것은 겨우 4년 전이다. 피를 뿌렸던 내전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이제야 찾아온 평화를 이 나라 사람들은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한다. 수도 파라마리보는 이제 중남미에서 밤길을 혼자 걸어도 겁나지 않는 몇 안 되는 안전한 도시가 되었다. 도시 전체가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식민지시대 네덜란드풍 목조건물이 그 시절 그대로 남아있다. 파라마리보에서 북쪽 해안선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세 시간쯤 달리면 누런 마로니 강을 마주하며 도로가 끝난다. 강 건너 보이는 타운은 프랑스령 기아나땅 상로랑이다. 이 마로니 강가에서 인디오 청년 조지를 만났다. 유럽인들이 이 땅을 짓밟은 탓에 거의 사라졌던 아메리 인디오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조지를 따라 모터보트를 타고 그의 마을 갈리비로 가는 길은 강 하류로 물살을 가르며 한 시간을 달려야 한다. 카리브 인디오 150여 가구가 모여 사는 갈리비 마을은 조용하게 숲속에 숨어있다. 그들은 모두가 어부들이다. 마로니 강이 대서양으로 빠지는 하구엔 고기떼가 우글거린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오들은 이제 이 나라에서 소수종족에 불과하다. 그들은 덤덤하게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함께 묻어가고 있었다.
멕시코 라틴문화의 중심지를 찾아서 2004 로키-안.. 2004-07-29
칠흙 같은 어두움을 뚫고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넘는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미국 출국 스탬프를 찍고 멕시코 입국에 성공하지 못하면 국제미아가 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중남미 첫 국경 통과는 이렇게 불안함 속에서 시작되었다. 식민시대의 중심도시, 사카테까스와 당나귀 할아버지 미국 국경 검시관에게 탐험의 목적을 설명하고 마침내 그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미국 국경을 통과했다. 하지만 멕시코 국경은 어두운 밤을 이용해 불법입국을 하고 말았다. 멕시코 최북단의 국경 도시 시우닷 후아레스의 첫인상은 혼돈의 지옥과 같았다. 치안부재와 자동차 도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음날 자수하는 심정으로 국경으로 향했다. 멕시코에 긴급 투입된 장화민 대원의 능숙한 통역 덕분에 세관신고와 입국신고를 마치고 마침내 라틴 장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엔진을 걸자 무쏘 SUT는 춤추듯이 달린다. 멕시코 북부도시는 숨막힐 정도로 거칠고 황량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멕시코 전통음식 타코와의 만남, 그리고 그 음식과의 오랜 사랑이 시작되었다. 대원들은 또르띠아에 소스와 고기를 넣어 출출한 배를 채웠다. 붉은 황야를 가르며 멕시코 최초의 도시 치와와를 지나 멕시코 식민시대의 중심도시 사카테까스로 행했다. 미국 국경을 넘은 지 3일 만에 당도한 중부 최대의 도시는 멕시코의 신비를 유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수도원과 교회, 궁전, 광장 등 화려했던 스페인 스타일의 도시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19세기 초반 스페인 통치가 끝나면서 이 지역에서 무장봉기와 반란이 일어남으로써 사카테까스는 식민시대의 중심지에서 ‘독립의 요람’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사카테까스로의 진입은 그 자체가 경이로움이었다. 언덕에 올라가 보면 산만한 듯한 구성과 색채가 독특한 느낌을 주고, 강인한 매력을 뿜고 있다.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부파(Bufa) 언덕에 오르기 위해 대원들과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향한다. 멕시코의 혁명 영웅 판초 빌라(Pancho Villa)의 동상이 우뚝 선 부파 언덕은 파란의 역사와 혁명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이 도시에서 탐험대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대를 이어 50여 년 동안 골목 어귀를 지키고 있는 당나귀 할아버지와의 만남이다. 할아버지는 마게이(용설란이라 불리는 선인장)라는 거대한 선인장에서 매일 꿀물 원액을 채취해 3시간 거리의 산길을 걸어와 이른 새벽 사람들을 만난다고 한다. 당나귀 할아버지라 불리는 노인 댁을 방문하기 위해 전대원은 머나먼 산골 마을의 용설란밭을 찾아갔다. 산길로 당나귀를 끌고 돌아온 노인이 우리보다 먼저 집에 와 있었다. 오전 11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다. 노인은 부인과 며느리, 개 두 마리, 당나귀 그리고 닭 몇 마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순박한 인상의 당나귀 노인은 용설란밭에 나가 즙을 채취해 탐험대에게 내밀었다. 떠나올 때도 당나귀를 이끌고 배웅해 주었다. 누추한 집을 찾아온 첫 외국이이라며, 부인과 함께 즐거워하던 노인과 작별하며 적은 사례금을 쥐어 주자 마지못해 사양치 않고 받던 그 손길, 어린 소년 같은 미소가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탐험대는 남쪽으로 핸들을 돌려 구아나후아또로 향했다. 디에고 리베라의 고향, 구아노후아또 탐험대는 멕시코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광활한 중부 산악지역은 식민시대의 중심으로 스페인 문화와 멕시코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었다. 도시 심장부를 향해 전진한다. 그러나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미로 속을 헤매다가 코너를 돌자 파스텔톤의 화려한 색상의 멕시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광의 도시 구아노후아또가 다가온다. 도시의 구성이 재미있다. 처음에는 화려한 색채로 다가서더니 이내 미로가 당황케 하고, 그것은 곧바로 재미로 변한다. 강 바닥을 개조한 지하차도가 굽이진 도시를 관통하는 진입로였던 것이다. 어두운 갱도를 지나듯 일방통행의 지하차도를 달려 환한 세상에 당도했다. 더 이상 차를 타고 다닐 수 없어 주차장에 무쏘 SUT를 세워 두고 나선다. 돈키호테 박물관을 지나 만남의 공원으로 향했다. 월계수가 푸르른 그늘을 드리운 광장 카페에서 사람들은 커피를 즐기고, 개를 데리고 한가롭게 산책을 한다. 오랜만에 즐기는 휴식이다. 대원들은 모두 도시의 역사와 낭만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지하도로의 매력과 독특한 건축물, 수준 높은 벽화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디에고 리베라의 생가가 이곳에 있었다. 사회 비판과 인간발전에 대한 강한 믿음을 표현한 그의 난해한 그림들은 초기 이태리 프레스코화와 콜롬버스 신대륙 발견 이전의 시각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우화와 상징성을 담고 있다. 1886년 리베라가 태어난 집에는 1층에 생전에 쓰던 가구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과 3층은 그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키스의 계단으로 향했다. 청춘 남녀가 1m도 안되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사랑에 빠졌다. 연인들은 키스를 나누고 사랑을 이어오다 아버지에게 들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슬픈 사랑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키스의 골목을 추억하며 몰려든다. 대원들도 인산인해를 이루는 골목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 드디어 키스를 나눈다. 남자 대원들끼리…. 이 모습을 보고 관광객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밤이 되자 잠자리가 걱정이었다. 취재와 탐험만큼이나 대원들을 힘들게 한 것은 저렴한 숙소를 찾는 일이었다. 숙소 찾기를 탐험의 일과로 인정한 뒤로는 직관으로 숙소를 찾아내고 어디서든 피곤한 몸을 누일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대원들은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로의 입성(?)했다. 라틴문화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스페인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멕시코 여행은 스페인보다 더욱 기대되고 긴장감 또한 크다. 마리아치와 데낄라로 유명한 과달라하라 데낄라와 마리아치는 과달라하라의 모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마리아치(Mariachi)의 서민적이면서도 슬픈 멜로디가 과달라하라의 으뜸가는 매력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리아치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인근 도시 틀라께빠께(Tlaquepaque)의 공연은 더욱 낭만적이다. 거리의 악사인 마리아치라는 직업은 아이들에게도 흥미와 도전의 대상이다. 마리아치의 세계에 푹 빠진 어린 소년들도 눈에 띈다. 이처럼 마리아치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과달라하라의 전통예술이자 문화의 한 장르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4∼7명으로 구성된 마리아치가 한 곡을 부르고 받는 돈이 만 원도 안된다. 이것을 나누어 갖기 때문에 생활이 빈곤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대단하다. 하루는 멕시코의 대표적인 술 데낄라를 찾아 나섰다. 데낄라 생산지인 데낄라 마을로 무쏘 SUT가 들어서자 이상한 차가 나타났다며 사람들이 웅성댄다. 데낄라 공장을 향해 차를 몰고 힘차게 달려간다. 데낄라 제조는 마게이 원료 채취에서 시작된다. 거대한 용설란의 줄기를 치고, 덩어리를 둥그렇게 다듬는 작업. 그리고 정리된 덩어리를 트럭에 옮겨 싣는 과정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두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작업이다. 원료는 거대한 찜통에 담아서 찐다. 일주일 정도 익히면 잘 익은 고구마 같은 달콤한 향기가 나고 단내가 혀끝을 감돈다. 이것을 잘게 다듬어 채즙과 발효, 증류를 거쳐 멕시코의 대표적인 술이면서 세계인이 즐기는 주류로 탄생한다. 마을 어디에나 데낄라 판매점이 있고, 오크통에 담긴 데낄라를 쉽게 구할 수 있다. 술 이름을 이 마을에서 따온 것처럼 온통 마게이(용설란) 천지고, 마게이를 채집하여 운송하는 트럭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마게이 농장의 광활함에 놀라고 거대한 마게이를 채취하는 일꾼들의 노련한 칼 놀림에 또 한번 감탄한다. 마게이 채취와 떼낄라 제조공정의 흥미로움, 마리아치들의 소박하면서도 열정적인 연주는 과달라하라의 강인함과 정통성에 더욱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는 멕시코 중부도시 중 가장 강인하고 색채가 농후한 문화도시다. 이어서 일행은 아메리카 대탐험 제2의 출발지인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본격적인 중남미 종단 대기행을 위한 팀스위치가 멕시코시티에서 이루어진다. 2진 안데스 대원이 유럽을 거쳐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알래스카를 출발해 이곳까지 동고동락한 로키 대원들과 아쉬운 작별도 해야 한다. 모처럼 안데스팀과 로키팀이 만난 멕시코시티에서 우리는 자동차 정비와 함께 이후 중남미 탐험을 위한 준비의 시간을 가졌다. 중심가 소나로사와 혁명광장 소칼로를 오가며 적응훈련과 함께 운전요령, 무전교신법, 위급상황 대처요령 등을 익히며 만반의 준비를 해나갔다. 인디오 마을 오악사까에서의 잊지 못할 경험 탐험대원과 함께 10년 만에 콜로니얼 도시인 오악사까(Oaxaca)를 방문하니 설레임이 크다. 10년 전에는 밤차를 타고, 눈을 감고 오악사까를 찾았지만 지금은 한국산 무쏘 SUT를 타고 대원들과 함께 가는 길이다. 세계 최장의 대륙을 종단한다는 감동과 함께 멕시코 남부 중심고도(古都) 오악사까를 방문한다는 설레임에 만감이 교차한다. 이른 아침 오악사까 최대의 유적 몬테 알반 산 정상에 올랐다. 겨울이어서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멕시코시티의 유적 테오티와칸을 본 탓인지 장중함은 없지만 오랜 세월의 흐름과 추억의 더듬는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현지 가이드의 도움으로 몬테 알반 유적의 역사와 흔적을 더듬으며, 중심광장으로 향했다. 몬테 알반은 수 천년 전부터 이곳에서 살아 온 사포떼까 인들의 비밀세계였다. 스페인의 16세기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에도 스페인군들은 매력적인 유물과 지형을 그대로 보존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심한 박해를 피할 수 있었던 원주민들은 오악사까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100만 명이 넘는, 멕시코에서 가장 큰 원주민 거주지로 남게 되었다. 덕분에 원주민의 문화가 잘 보존되었고, 오늘날 민예품의 보고로 남게 되었다. 오악사까에서 남동쪽으로 30여km 지점에 자리한 인디오 노천시장 틀라꼴룰라(Tlacolula)가 바로 그것이다. 일요일마다 장이 서서 인근 촌락에서 모여든 주민들이 식료품과 생필품을 교환한다. 특히 화려한 민예품은 세계인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인디오의 세계관을 표현한 자수의 현란함을 떠나서 전통을 중요시하는 원주민들의 강한 자존심에서 우러나는 색상이기 때문이다. 오악사까를 떠나며 과달라하라와 마찬가지로 광대한 마게이밭을 지나게 되었다. 재배단지 주변에는 데낄라가 아닌 메스깔(Mescal)이라는, 벌레와 함께 마시는 독특한 토속주를 휴게소에서 팔고 있었다. 휴게소에 들른 일행은 메스칼에 취해 주인집 아들과 친해졌고 내친 김에 그 집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는 마게이 재배뿐만 아니라 오악사까의 토속주 메스깔을 직접 주조하고 있었다. 말을 이용해 마게이 재배와 주조를 하는 것을 보고 전대원들이 나서서 마게이 채취와 운반, 그리고 메스깔 주조 공정을 도우며 한나절을 일했다. 사포떼까의 웅장한 유적 몬떼 알반과 원주민들의 강한 자존심이 배어 있는 음식, 화려한 옷을 우리는 잊을 수 없었다. 더불어 벌레와 함께 마시는 토속주 메스깔의 독특한 향과 주조기법이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대평원을 가로지르며 끝없는 남행길을 달리다 2004-07-29
몇 달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앞길이 몇 번이나 뚝뚝 끊겼다. 세닉 RX4에 기계 고장이 일어나는가 하면 앞을 가로막는 폭풍설이 휘몰아쳤다. 유콘 지방에서 혹한에 갇혀 썰매개나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과 어울려 한겨울을 꼬박 보냈다. 이런 기다림 끝에 다시 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미 알고 있는 길이었다. 1년 전 북쪽 알래스카로 가면서 따라간 오직 한 가닥의 도로였다. 그 유명한 ‘알래스카 하이웨이.’ 2천km의 꾸불꾸불한 도로는 북방의 숲 속으로 사라졌고, 로키산맥의 봉우리들 사이를 에돌아 골짜기에서 큰 강으로 흘러갔다. 익숙했지만 이 도로는 아득한 거리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유콘 지방의 수도 화이트호스 남쪽에서 이름을 들먹일 만한 첫 도시는 도슨 크리크였다. 남쪽으로 2천km를 넉넉히 뻗어나간 알래스카 하이웨이의 원점이었다. 파리-베를린의 2배나 되는 거리. 두 도시 사이에는 기름을 넣고 쉴 수 있는 역마차 정거장 노릇을 하는 곳밖에 없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우리는 크루즈 컨트롤을 걸고 남쪽을 향해 일로매진했다. 다행히 이 신비로운 도로를 에워싼 화려한 광야가 눈을 즐겁게 했다. 봄이 활짝 피고 있었다. 밝고 상큼한 초록이 끝없는 숲 위로 나타나고 있었다. 곰들이 가까운 길가에서 풀을 뜯고 있었고, 우리가 지나가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강물을 덮고 있던 얼음장이 떠내려가기 시작했고, 녹아내리는 얼음장이 물결에 실려 갔다. 멀리 갈수록 날씨는 점점 따뜻해졌다. 왓슨 레이크 남쪽은 날씨가 얼마나 맑은지 한여름 같았다. 겨울옷과 비버모자를 벗을 때가 되었다. 1년 전 아시아를 떠날 때 벗어 두었던 샌들이 반가웠다. 몇 킬로미터를 더 가자 온천이 우리를 맞았다. 참을 수 없었다. 거대한 캐나다 삼림 한복판에서 유황천에 서둘러 몸을 담갔다. 마치 꿈 속이거나 신화를 체험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그림에 딱 한 가지 그늘이 있었다. 바깥 기온이 너무 따뜻해 온천은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하 40℃를 내려가는 북극권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뜨거운 온천욕은 유달리 신기했다. 도로는 앞으로, 앞으로 뻗어 나갔고 끝이 없어 보였다. 몇 주일이나 수리센터에 갇혔던 세닉은 다시 태어나 힘차게 달렸다. 막막한 대평원의 품 속에서 도슨 크리크에 도착하자 풍경이 갑자기 바뀌었다. 로키의 산봉우리들은 물러나고 광대무변한 대평원이 펼쳐졌다. 크리 인디언의 땅. 겨우 며칠 전 눈이 사라졌다. 그러나 시골의 색깔은 늦여름을 연상시켰다. 지난해 가을걷이를 한 들판은 아직 8월 말처럼 누랬다. 8개월이나 되는 겨울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저기에 자리잡은 빨간 목조 곳간의 산뜻한 건물이 사람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아주 역사가 짧은 지방이 빚어낸 진짜 건축물이었다. 앨버타는 내년에 100주년 기념식을 치른다. 오랫동안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만 이 지방을 돌아다녔다. 모피를 찾아 서부로 온 대담한 소수의 덫사냥꾼이 있었을 뿐이었다. 1885년 유명한 캐나다 태평양 철도가 완성되어 대서양 연안과 태평양 연안을 이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유럽 이주민들이 이곳을 찾아왔다. 이곳 땅값은 아주 싸다. 퀘벡이나 온태리오의 품팔이나 재간꾼이 와서 새 생활을 시작하기 좋은 고장이다. 모든 것을 다시 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아직도 그들의 정신이 살아 있는 개척자들의 땅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마을, 학교와 공동체를 건설한 자신의 노력을 자랑한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이 땅에 자기들의 자취를 남겼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북극권보다는 훨씬 남쪽이지만 대평원의 겨울도 매섭다. 지난 1월 기온은 영하 60℃로 내려갔고 바람이 쉬지 않고 몰아쳤다. 때로는 가혹한 기후와 무서운 폭풍설이 이 지방을 황폐화시킨다. 악명 높은 1930년대의 대공황은 이 고장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2003년 5월 이후 광우병 소동으로 미국과 캐나다 국경이 막혔다. 수시로 교역을 하는 두 나라의 양축농민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막막한 대평원에서 많은 카우보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헤매는 실정이다. 가난한 백인 노동자의 용광로 자갈길이 수백 킬로미터씩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그런 곳에서 세닉이 방향을 잃을 일도 여정을 놓칠 리도 없었다. 5월 초인데도 수은주는 사정없이 올라가 영상 27℃를 가리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캐나다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미처 알지 못했다. 북부 앨버타에 무더위가 닥친 3일 뒤 에드먼튼 부근에서 눈이 오기 시작했다. 해질 녘에 눈을 의심할 광경이 벌어졌다. 얇은 싸락눈이 고운 핑크빛 솜처럼 땅을 덮었다. 이미 곡식을 심은 농민들을 탄식케 할 충분한 재앙이었다. 오랜 겨울을 보낸 모든 사람들이 조마조마했다. 빨리 여름이 오기를 비는 마음 간절했다. 우리는 광막한 대평원 한복판에서 정동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트랙터들이 새로 곡식을 심으려고 들판을 다듬고 있었다. 미국에 갈 밀 저장용 사일로가 끝없이 퍼져 있었다. 곡물의 사막 한복판에 놀라운 도로표지판이 나타났다. ‘지루빌’, ‘팔러’, ‘생 폴’ 등 영어 사용국 캐나다에 프랑스어를 쓰는 고장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생 앙드레에서 온 마르탱은 우리 차에 달린 프랑스 번호판을 보자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이곳 앨버타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어를 썼다. 그의 아버지는 1920년대 퀘벡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마르탱이 말했다. “이 마을 주민 80%가 프랑스어를 쓰고 있어요. 학교와 행정기관에서도 프랑스어를 사용하지요. 오랫동안 싸워 이룩한 성과예요. 영어 사용자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있답니다. 우리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니까요. 우크라이나인, 인디언이나 중국인도 이곳으로 많이 와 살고 있는데, 모두가 정답게 살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대평원 한복판에서 들려 오는 진정한 관용의 메시지였다.
Mykonos 아름다운 코발트빛 유혹 2004-07-22
영화 ‘지중해’를 본 사람들 대부분은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에게해를 동경하게 된다. 하얀색으로 채색된 소박한 집과 풍차, 코발트빛 바다와 강렬한 태양이 주는 여운은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그곳에 가고 싶다’는 충돌을 불러일으킬 정도. 순백의 아름다움과 격정적이고 화려한 밤 문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미코노스 섬은 이런 에게해의 로맨틱한 이미지를 가장 잘 대변해준다. 가장 아름답고 유혹적인 그리스 섬 미코노스 섬의 매력은 애매하고 모호하다. 세련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주는 풍경은 경이롭고 한편으론 유쾌한 즐거움이 넘친다. 이 섬에서는 키클라데스 대부분의 섬에서 조우하게 되는 거친 산악 풍경과 걸출한 해변은 물론 화려함과 소박한 재미까지 모두 만끽할 수 있다. 낚싯배와 호화 요트가 사이좋게 늘어서 있는 컬러풀한 항구의 모습은 키클라데스의 다른 섬들과는 다른 매혹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국제적인 미코노스 섬이 예술가와 지식인을 비롯한 세계 각 국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 여름철 세계의 유명인사들은 이 섬으로 몰려와 휴식과 쇼핑을 즐기고, 각 국의 유람선도 덩달아 몰려든다. ‘스펙터클하다’는 말이 아쉬울 만큼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 그 어떤 시적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청명한 하늘에서 내려 쬐는 강렬한 빛의 발광. 미코노스 섬의 소소한 아름다움은 모든 감각을 즐겁게 한다. 그리스의 술과 음식, 경쾌한 음악과 흥겨운 나이트 라이프가 섬 생활의 즐거움을 더하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다. 배가 섬 근처에 도착하면 먼저 항구에 정박한 작은 고깃배와 화이트, 블루의 절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섬 전경이 펼쳐진다. 푸른 바다 위에 조각배가 점점이 떠 있는 모습은 섬 자체의 낭만적인 기운과 함께 한 폭의 수채화를 떠올린다. 항구에 내린 이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펠리컨. 오랜 시간을 섬사람들과 함께 해온 듯 도망갈 생각이 전혀 없는 펠리컨의 모습에서 미코노스의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항구는 섬사람들의 삶의 원천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깃배에서 한가로이 어망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모습이 소박하고 정감 있게 다가온다. 그들에게 이 섬은 수천 년을 이어온 생활의 터전일 뿐. 항구 앞 카페에 앉아 무심한 얼굴로 고깃배를 바라보고 있는 관광객의 모습이 그들과 다른 이질감을 주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지중해의 매혹 모두 담은 호라 골목 미코노스 섬의 중심지는 호라(Hora)라고 불리는 복잡한 골목이다. 항구 인근에 펼쳐져 있는 호라는 키클라데스 섬들 중 가장 화려하고 매력적인 거리다. 호라를 향해 한 발짝 발을 들이면 항구의 소박함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 곳곳에 세련된 보석가게와 카페, 디스코텍, 선물가게, 레스토랑 등이 즐비하다. 밝은 파랑 칠의 발코니와 제라늄, 붉은 넝쿨 꽃들이 흰 벽을 뒤덮고 있는 모습은 바로 우리가 생각해온 지중해의 매혹, 그것에 다름 아니다. 온통 흰색으로 채색된 거리에서 치즈 파이를 오물거리며 보석가게를 기웃거리다보면 마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뉴욕의 티파니 보석상을 활보하던 오드리 햅번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쇼윈도에 장식된 반지, 귀걸이, 팔찌, 목걸이 등 화려한 금빛 보석들이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킨다. 이처럼 세련된 상점과 타베르나(그리스 전통 레스토랑), 작고 인상적인 교회 등이 어우러져 필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만약 운이 좋다면 좁은 골목 사이로 바구니 가득 과일을 싣고 방울 소리를 딸랑이며 지나가는 당나귀도 만나볼 수 있다.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여름철의 호라는 낮과 밤의 시간적 경계가 바뀌고 만다. 낮에는 일광욕을 하며 해변에서 쉬거나 책을 읽던 사람들이 밤이 되면 모두 골목으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 골목을 걷다보면 인근 클럽에서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수백 개에 이르는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종소리가 섬 전역을 울린다. 지중해의 강렬한 기운이 바다 저편으로 넘어갈 즈음이면 마을 동쪽 끝의 풍차가 있는 언덕으로 가보자. 푸른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태양의 장중한 모습. 마치 생명을 다한 듯 붉은 전신을 사방에 퍼뜨리며 아득하게 사라지는 태양의 마지막 모습은 온 신경을 마비시킬 만큼 매혹적이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타베르나에서 한 잔의 와인과 함께 바라보는 지중해의 일몰도 잊기 힘든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연인과 함께라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추억이 될 것이다. 누디스트의 천국, 파라다이스 해변 미코노스 섬의 콘트라스는 일요일 아침 6시에서 8시 사이에 가장 극명하게 대비된다.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이 아직은 부드러움을 간직한 이 시간,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클럽, 디스코텍에서 밤을 즐기던 사람들이 거리를 공유한다. 미코노스의 여름을 함께 하는 이질적인 두 집단의 조우만큼 극적인 대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시간이 지나면 거리는 열정을 풀어놓을 수 있는 밤이 오기 전까지 다시 한번 적막 속에 빠져든다. 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풍차는 하얗고 파란 색의 대비와 함께 섬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빛내준다. 미코노스는 매년 200~300일 정도 강한 바람이 부는데, 이 바람은 강렬한 지중해의 태양을 완화시켜주는 자연의 축복이다. 섬 주민들은 바람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높이 쌓고 정원에 커다란 나무를 심어놓았다. 밀과 보리를 갈기 위해 세워진 풍차들은 원래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이고 섬 풍경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할 뿐이다. 미코노스 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아름다운 해변이다. 여러 해변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파라다이스 해변과 수퍼파라다이스 해변. 파라다이스 해변은 누디스트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언제나 혼란스럽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코발트빛이 일품인 이 곳에서는 한가로운 일광욕에 빠진 사람들부터 스쿠버다이빙, 제트스키 등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이들까지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종종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민망해지기 일쑤지만 정작 그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 해변에서 산을 하나 넘어가면 게이들이 많이 찾는 수퍼파라다이스 해변이 나온다. 이 곳은 미코노스 섬에서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변이다. 선명한 푸른 바다와 순백의 해변은 지중해의 명성이 허명(虛名)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단조로운 해변 생활이 지겨운 사람들은 배를 타고 델로스 섬으로 가보자. 미코노스 섬이 통속적인 쾌락과 세속의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면 30분 거리에 있는 델로스 섬은 정반대로 그리스에서 가장 신성한 섬이다. 우리에게 델로스 동맹으로 잘 알려진 이 섬은 한때 고대 그리스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신화에 따르면 빛과 시, 음악과 치료, 궁술의 신인 아폴론의 출생지가 바로 델로스라고 한다. 기원전 5세기 무렵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이 섬은 점차 쇠락해 흑해 지역 왕인 미트리다테스의 약탈로 2만 명이나 죽는 비극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거대한 야외박물관이 되어 섬 곳곳에 남겨진 거대한 돌덩이와 주춧돌로 그 옛날의 부귀영화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 특유의 밝고 경쾌한 만도린 소리를 들으며 돌아보는 미코노스 섬으로의 여행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섬에서 느끼는 한가로운 휴식과 평화는 시간에 쫓기고 생활에 찌든 현대인에게 삶의 활력을 더해준다. 평화로운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은 미코노스 섬에서 삶의 긴장을 풀어주는 작은 모퉁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 사진 | 김선겸(여행 칼럼니스트) 미코노스 여행정보 ● 항공 : 한국에서 그리스 아테네까지 가는 직항편은 없다. 국내에서 가려면 동남아나 유럽을 경유해 가야 하는데, 유럽을 거치는 것이 한결 편하다. 네덜란드항공(KLM)이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아테네까지 주 6회 운항한다(☎ 02-2011-5500). 아테네에서 미코노스 섬까지는 매일 배가 출발하고 국내선 비행기도 취항한다. ● 환전 및 환율 : 그리스는 EU 가입국가. 국내에서 유로로 직접 바꿔 가는 것이 좋다. 2004년 6월 현재 환율은 1유로=1천423원. 신용카드는 섬 내에 있는 대부분 상점에서 쓸 수 있다. ● 교통 : 미코노스 섬 구석구석을 버스가 연결하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오토바이나 SUV를 렌트해 섬을 돌아본다. 렌트 비용이 생각보다 싸서 성수기 때 하루 30유로 정도로 오토바이를 빌릴 수 있다. 렌트를 하려면 국제운전면허증이 필수. ● 날씨 및 방문시기 : 그리스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철에는 고온건조하고 겨울철에는 반대로 비가 많이 내린다. 미코노스 섬을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6~9월로 이 시기에는 유럽 각 국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햇빛이 굉장히 강렬하니 선글라스와 자외선 차단 크림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 호텔 : 워낙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섬이라 호텔도 많다. 배가 도착하는 항구에 호텔 주민들이 나와서 무료로 픽업해가니 적당히 흥정해서 찾아가도록. 성수기인 6월 15일~8월 15일은 호텔 요금이 많이 올라가니 참고할 것.
과테말라 티칼(Tikal) 화려했던 마야문명의 꽃 2004-07-15
국경을넘어갈 때 항상 느끼는 것은 두 나라의 경제력 격차가 입국심사에 미치는 미묘한 차이점이다. 경제력의 격차는 노동시장에서 임금의 차이로 이어진다. 부자나라에서 가난한 나라로 들어갈 땐 비자 받기도 쉽고 입국심사도 간단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나라로 들어갈 땐 까다롭기 짝이 없다. 가난한 나라 국민은 부자나라로 기를 쓰고 들어가려 하고 부자나라는 한사코 못 들어오게 하는 이유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나라의 노동시장을 교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나라 국민이 가난한 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그 나라에 가서 돈을 쓰자는 것이기 때문에 환영이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이 그렇고 우리나라와 중국이 그렇다. 한 지역에서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땐 부자나라에서 가난한 나라 순으로 가는 것이 편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번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역순이 되었다. 중미의 과테말라와 벨리즈(Belize)는 도토리 키 재기지만 그래도 과테말라가 비교 우위에 있어 벨리즈에서 과테말라로 들어가는 국경검문소는 장사진을 이뤘다. 울창한 정글 숲에 색색의 열대동물 노닐어 카리브 연안의 흑인소국, 벨리즈의 수도 벨모판에서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한 시간 반쯤 가면 국경마을 카르멘에 닿는다. 간단한 출국신고 후 과테말라의 멘코스를 밟으면 긴 입국심사 행렬이 줄을 잇는다. 지겨운 시간 죽이기 끝에 내 차례가 되자 카키색 제복을 입은 콧수염 사내가 여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어본다. “여행 목적은?” “티칼을 찾아서.” 쾅, 두말없이 스탬프를 찍고는 고개를 들어 빙긋이 웃으며 “피라미드엔 올라가지마”라며 손가락 짓을 한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땡큐”를 연발하고 마침내 과테말라로 들어갔다. 과테말라 국경마을 멘코스에서 탄 콤비는 지겨운 기다림 끝에 만원이 되자 마침내 출발이다. 멘코스를 벗어나자마자 흙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산 넘고 물 건너 서쪽으로 달린다. 푹푹 찌는 날씨와 냉방이 안 되는 고물차에 땀 냄새로 범벅이 된 정원초과 승객들……. 차라도 옆으로 지나가면 노란 흙먼지를 꼼짝없이 뒤집어 써야한다. 한 시간 반쯤 달려 엘 크루세에 도착, 거기서 다시 차를 갈아타고 북쪽으로 한 시간쯤 달려가면 울울창창한 열대 정글에서 원숭이 울음소리 요란하게 들리고 앵무새가 날아오르는 티칼(Tikal)에 닿는다. 태양이 떠오르는 뚜껑처럼 정글 위에 피라미드가 우뚝 솟아올랐다. 울울창창한 정글이 하늘을 덮어 티칼의 오솔길은 한낮에도 어둑어둑하다. 이름 모를 온갖 새들이 제각각으로 울다 때로는 오색찬란한 모습을 살짝 보이며 후두둑 날고, 원숭이들은 겁 없이 길 앞에 어슬렁거리고, 나무 개구리들은 새소리에 질 새라 합창을 한다. 싱그러운 정글의 산소는 모세혈관까지 스며든다. 화려했던 마야(Maya)문명의 꽃, 티칼. 티칼은 도대체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사라졌을까? 치첸이차, 욱스말, 코판 같은 마야유적이 멕시코와 중미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티칼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티칼은 울창한 정글 속에 파묻혀 있다. 과테말라는 적도에 가깝지만 국토의 대부분이 고원지대라 사시사철 시원하다. 그러나 티칼이 자리잡은 북동쪽은 저지대로 전형적인 열대우림 지역이다.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자랑하던 마야왕국 티칼은 왜 시원하고 기름진 땅인 고원지대를 외면하고 푹푹 찌는 더위와 맹수, 모기, 독충이 우글거리는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해답은 단 하나, 이곳엔 납유리의 일종인 플린트가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린트는 철의 제련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티칼이 마야 최강의 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제철이다. 이들은 온갖 철제 연장을 만들어 이웃나라에 팔아 부를 축적했다. 거대한 피라미드와 4천여 개의 유적 간직 티칼의 역사는 기원전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그러나 세계 최대 마야유적인 현재의 티칼이 축조된 것은 예수가 태어난 기원과 동시대를 이룬다. 기원 250년 경, 재규어의 발톱이라 불리던 약스왕은 현재의 멕시코 중부까지 광대한 영역을 정복하고 다스렸다. 그 당시 전쟁 무기는 몽둥이와 돌멩이가 전부였지만 티칼 왕국의 군대는 날렵한 창과 칼로 무장해 적을 완파했다. 하지만 6세기 중반엔 티칼의 철 제련법을 익혀 칼과 창을 만든 동쪽의 이웃나라 카라콜이 티칼의 전쟁법을 전수 받아 티칼 왕국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티칼은 7세기 말엽까지 카라콜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8세기초 다시 나라를 찾은 티칼의 문더블콤왕이 티칼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티칼 왕국의 유적 규모는 엄청나다. 575m2에 50m를 육박하는 피라미드 옆으로 4천여 개의 유적이 산재해 있어 그 옛날 화려했던 티칼 왕국의 위세를 말해준다. 대광장의 쌍둥이사원은 위대했던 티칼왕 문더블콤의 묘지다. 44m 높이의 석조물 속에 180여 조각의 옥과 90여 개의 뼈 조각 상형문자, 그리고 진주와 가오리 척추에 사람의 피로 그린 그림……. 남서쪽 엘문도 페르디도엔 하늘을 찌르는 피라미드가 정글을 뚫고 우뚝 솟아 있다. 이 피라미드엔 가파른 돌계단이 천국으로 오르는 길처럼 상층부로 이어진다. 계단 앞엔 경고판이 붙어 있다. “계단을 오르지 마십시오! 경고를 무시한 미국인 두 명이 추락사했음!” 그제야 벨리즈에서 국경을 넘어올 때 콧수염 입국관리관이 했던 계단을 오리지 말라는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티칼 입구 광장에서 소형버스를 타면 티칼로 들어갈 때 거쳤던 엘크루세를 지나 한시간 반만에 플로레스(Flores)에 닿는다. 플로레스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동서로 길게 누워있는 ‘라고데 페텐이차’ 라는 거대한 호수의 서남쪽 끝엔 ‘산타 엘레나’ 라는 도시가 호숫가에 앉았다. 이곳에서 호수 안으로 500m의 가느다란 제방 길을 따라가면 인구 2천 명의 섬, 플로레스가 나타난다. 그 옛날, 정복자 스페니시들이 휴양지로 만들어 놓은 이 섬은 스페인 별장 같은 예쁜 집들 사이로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엔 그림처럼 예쁜 수공예점 기념품가게, 술집, 식당, 작은 호텔들이 늘어서 있다. 그루타스 동굴, 공예촌 그리고 산타 엘레나 동쪽 10km에 있는 아르카스 정글에 가면 콩고잉꼬 앵무새와 거미원숭이, 킨카주곰, 큰 소리를 지르는 하울러원숭이, 그리고 운이 좋으면 재규어도 만날 수 있다.
지구 꼭대기에 서다 끈질긴 겨울의 땅에 봄은 찾아왔.. 2004-06-18
정말 지루하게 기다렸다. 이따금 우리는 인내의 한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갔다. 그러나 다행히 르노 세닉 RX4는 되살아났다. 화이트호스에 살고 있는 아일랜드 정비사 마크 오브라이언과 르노의 대담한 지원 덕택이었다. 프랑스에서 갓 도착한 새 엔진이 처음 굉음을 울리 때 벅찬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그 엔진의 감미로운 멜로디를 거의 잊고 있었다. 눈신을 신고 가루눈 속을 멀리 걸어다녔던 것도, 개썰매를 타고 달리던 기억도 사라진 뒤였다. 그러다가 다시 핸들을 잡고 충실한 우리 짐말을 몰고 나서게 되었다. 처음 몇 킬로미터를 달린 뒤 좋은 소식이 들렸다. 유콘강에 드디어 봄이 왔다는 것이다. 6개월 동안 이 땅을 휘어잡던 눈, 진눈깨비와 영하 20℃에서 40℃를 오르내리던 기온이 사라지고 포근한 봄이 찾아왔다니! 겨우내 강 위에 엉켰던 얼음판에서 큼직한 얼음조각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얼음은 녹아 내리고 깨어지며 봄을 알리고 있었다. 흐르는 강물과 영롱한 색깔이 돌아오고 있었다. 유콘 지방 주민의 모습도 변해 갔다. 느긋하고 큼직한 미소가 차차 돌아오고, 오랜 겨울에 지친 얼굴도 되살아나고 있었다. 낮의 길이도 변했다. 4월 중순이지만 오후 9시 30분까지 해가 지지 않았다. 유럽에서 해가 가장 긴 여름철과 같았다. 날마다 낮이 6분씩 길어졌다. 그러니까 1주일에 45분이었다. 엄청난 변화였다. 또 다시 덮친 겨울 유콘 지방에 여름 같은 날씨가 찾아왔다. 되살아난 세닉을 시험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화이트호스에서 남쪽으로 처음 나타나는 큰 도시가 알래스카 하이웨이를 따라 1천500km 떨어져 있었다. 그처럼 멀리 내려가기에 앞서 우리는 그 일대를 돌아보기로 했다. 유콘 지방 북동쪽에 케노 시티라는 작은 광산도시가 있다. 케노란 카지노에서 벌이는 게임 이름과 같다. 우리는 그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비포장도로를 30km쯤 달리자 영화에나 나옴직한 고장에 들어섰다. 가문비나무숲에 덫사냥꾼들의 오두막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술집과 식료품상의 목조건물이 중심가 양쪽에 늘어서 있다. 색깔이 휘황한 건물 전면에 간판이 자랑스럽게 나붙어 있다. 훨씬 아래로 내려가자 광산박물관의 우중충한 건물이 나타났다. 근처에서 땅을 파서 횡재를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기념물이었다. 말과 마차가 없는 것이 영화와는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케노의 마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밤을 세우고 새벽에 일어나 보니 새로 온 눈이 융단처럼 덮여 있었다. 온 도시가 10cm의 눈을 뒤집어썼다. 전날 반소매를 입었던 우리는 스노부츠, 파카와 겨울모자를 다시 끄집어냈다. 함박눈이 세차게 내렸다. 무겁고 축축한 눈이었다. 나이 지긋한 덫사냥꾼이 세닉을 녹이는 우리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소리쳤다. “유콘에 온 걸 환영하오!” 북극권으로 올라가다 갓 내린 눈구덩이를 간신히 피하면서 케노를 떠났다. 그런데 같은 날 도슨시에 갔더니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사이 몇 킬로미터를 달려왔는데 봄이 되돌아왔다. 쓰고 있던 비버모자가 너무 더웠다. 앞으로 3일간 날씨가 쾌청하다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유명한 뎀프스터 하이웨이를 달려볼 황금의 기회였다. 도슨과 이누비크를 연결하는 750km의 비포장도로. 이누비크는 북극해의 바닷가에 있는 이누이트족의 땅이다. 이때는 어디서나 운전하기 좋다는 말을 듣고 운을 시험하기로 했다. 2004년은 이 신비로운 도로를 건설한 지 꼭 25주년 되는 해다. 놓쳐서는 안될 뜻깊은 기회였다. 알래스카를 돌아본 뒤 우리는 이런 여행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연료탱크를 가득 채우고, 25X짜리 연료통을 준비한 뒤 정북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눈 덮인 산봉우리에는 아직도 안개 너울이 걸려 있었다. 우람한 소나무숲의 초록은 흰산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이기도 했다. 냇물은 김을 내뿜고, 쌓인 눈더미 한복판을 뚫고 흘렀다. 그러다가 차츰 고도가 높아지자 설경이 세상을 덮었다. 해발 1천330m의 툼스톤 산꼭대기에 오르자 다시 한겨울이 우리를 에워쌌다. 지평선까지 뻗어나간 광막한 산줄기가 바로 아래 펼쳐졌다. 광대무변한 자연경관이 우리를 압도했다. 마치 지구의 정상에 올라온 듯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길을 멈출 수 없었다. 주위 1천km의 땅에는 단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크든 작든 마을은 없었고, 여기저기 덫사냥꾼의 오두막이 몇 채 있을 뿐이다. 북쪽 저 멀리 산줄기가 평평해지면서 광막한 북극 고원을 이룬다. 덫사냥꾼 피터와 실베인 260km를 달리자 주위 풍경이 달라졌다. 흰눈 속에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천막 하나. 이곳에서는 ‘탐광꾼’ 천막이라는 그런 천막이었다. 19세기 말 골드러시 시절에 개척자들이 쓰던 것과 같았다. 잘라 묶은 가느다란 나무줄기에 희고 큼직한 캔버스를 덮어씌웠다. 입구에는 마치 환영단을 떠올리는 눈신 몇 켤레가 놓여 있었다. 캔버스 꼭대기에서 연기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들어오시오!” 얇은 칸막이 너머로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리를 쑥 디밀었더니 매트리스에 누워 있는 피터와 실베인이 눈에 띄었다. 그들 둘레에는 온갖 장비가 흩어져 있었다. 난로와 솥, 식료품이 널려 있고, 장작난로 위의 빨랫줄에는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굴뚝이 캔버스를 뚫고 밖으로 솟아올랐다. “들어와서 함께 커피나 한 잔 합시다. 낮잠을 자다가 방금 깨어났소.” 희끗한 수염이 덥수룩한 피터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 피터는 덫사냥꾼이었다. 겨울철에 그는 훨씬 남쪽에 있는 통나무 오두막에서 산다. 그곳에서 덫을 놓고 살았다. 그러나 두어 주 전부터 봄기운이 돌자 퀘벡에서 온 숲 속 사람과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함께 천막을 쓰며 숲 속 생활을 했다. 북극권의 고독 속에서 불편한 생활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피터와 실베인은 이런 생활을 무척 좋아했다. 그들이 떠난 남쪽으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들의 운명은 외로이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이곳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고된 생존경쟁을 하면서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고 한다. 이처럼 하얀 사막 한복판에서 축복의 황홀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앞길 막히고 덫사냥꾼 친구들과 헤어진 뒤 계속해서 정북을 향해 달렸다. 그들의 천막에서 200km 가량 달리자 북극권과의 상징적인 경계선이 나타났다. 우리는 잠시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프랑스를 떠난 뒤 이 경계선을 건너는 것이 이번으로 3번째였다. 처음에는 2000년 7월 노르웨이 북쪽, 2번째는 지난 여름 알래스카 북쪽끝 프루드호 베이에 가는 길이었다. 정북을 향해 계속 달렸다. 그러나 포트 맥퍼슨을 지난 뒤 곧 길이 막히고 말았다. 마지막 300km 저쪽에 있는 이누비크로 가는 길에는 얼음다리 3개를 건너야 매킨지강의 하류 삼각지를 가로지를 수 있다. 그래서 이 길은 겨울에만 제구실을 할 수 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도로 관리소가 건너가지 못하게 길을 막기로 했다. 따라서 앞으로 한달 남짓 동안 이누이트시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으로 가는 페리는 얼음덩어리가 녹기 전에는 다니지 못한다. 결국 끈질긴 겨울의 땅에서 봄마저 우리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남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실한 징조였다. 광막한 북극권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떠나기로 결심했다. 우리 앞에는 대평원과 퀘벡이 가로놓여 있었다.
대족석각(大足石刻) 중국 불교예술의 결정체 2004-06-15
중국의 불교 석각예술은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불교가 흥한 남북조 시대에 그 유명한 운강과 용문석굴이 만들어지고 당과 송나라를 거치면서 그 제작기법은 점차 세련되게 다듬어져갔다. 송나라 때의 석각예술은 중국 특유의 섬세하고 사실적인 성격이 특징. 대족의 석각들은 대부분 당나라 말기에서 5대10국, 송나라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송 미인풍의 불상조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족(大足)은 중경에서 160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로 아직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곳의 불교석각만큼은 중국 3대 석굴로 꼽히는 용문이나 운강, 돈황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대족이라는 이름은 부처의 족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을 주변 산에는 약 5만여 점의 크고 작은 조각들이 남아 있다. 이 중에는 유교나 도교와 관련된 석각도 있지만 대부분은 불교에 뿌리를 둔 것들로 불만(佛灣)이라고 하는 얕은 마애석굴에 조각되어 있다. 송대 석각의 전형 보여주는 북산 대족석각은 지난 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한 곳에 몰리지 않고 사방에 퍼져 있어 돌아보는 것이 쉽지는 않다. 석각 분포를 보면 대족 북서쪽의 북산(北山), 남서쪽의 남산(南山)과 석적산(石篆山), 묘고산(妙高山), 동쪽의 탑이산(塔耳山), 동북쪽의 보정산(寶頂山) 등 곳곳에 널려 있다. 이처럼 산재한 대족석각을 짧은 시간에 모두 돌아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불교예술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운 북산과 보정산 석각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다. 대족 시내에서 2km 거리에 있는 북산에는 약 500m에 걸쳐 290여 가지에 이르는 불교 석각군이 남단과 북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시내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북산이 나온다. 완만한 계단이 놓인 산을 따라 다시 15분 정도 걷다보면 거대한 석각군이 몰려 있는 것이 보인다. 북산 석각은 대부분 송나라 때 작품이지만 3, 5, 9, 10, 51호 등 몇몇 석각은 당 말기의 것들이고, 이 중 51호 석각인 삼세불(三世佛)은 당나라 때 작품들 가운데서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당나라는 중국역사상 영토나 문화적인 면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인 만큼 이 때의 석각들에는 장중하고 단단한 느낌이 감돌고, 송대에 만들어진 조각들은 세밀하고 우아한 면모가 돋보인다. 52호 석굴은 감실의 삼존상―아미타, 관음, 그리고 지장보살―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편성과 당대 특유의 중후함, 송대의 온화함과 현실감을 한데 품고 있어 당에서 송으로 넘어가는 중국 조각예술의 흐름을 잘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북산 석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136호와 155, 245호 석굴을 들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상을 그린 136호는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136호 석굴은 높이 4m, 내부 깊이만 6m에 이르는 큰 규모로 정면 벽에는 보리수 아래에 있는 석가모니가 새겨져 있고 주위 벽에는 문수, 보현, 관음보살과 역사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이런 조각들은 대부분 크기만 2m가 넘는 것들로 하나같이 여인의 요염함이 깃들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저속한 느낌을 찾아볼 수 없다. 매끈하게 처리된 피부와 조각상 전체에서 느껴지는 시원시원함은 송대 조각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들. 원래 북산에는 1만여 개가 넘는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수가 파손되었고 그나마 보존 상태가 괜찮은 것들은 철창으로 막아놓아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대족석각의 백미로 꼽히는 보정산 북산과 더불어 가장 많은 석각이 남아 있는 보정산은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보정산 석각은 당 말기부터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조각들은 모두 남송 시대인 1179~1245년에 완성된 것이다. 보정산은 크게 대불만(大佛灣)과 소불만(小佛灣)으로 나뉘는데 중요한 석각은 대부분 대불만에 자리하고 있다. 말발굽 모양을 한 15~30m 높이의 절벽에 크고 작은 31개의 조각군이 형성되어 있고 2개는 석굴, 나머지는 얕은 마애굴이다. 보정산 석각은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대형 석굴 중에서 거의 마지막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무계획적인 북산과 달리 세밀하고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고 화려하며 웅장한 규모도 매력적이다. 보정산 석각은 그 소재가 다양하고 느낌도 강렬해 대족석각의 백미로 불린다. 석각의 내용은 주로 불교경전에 나오는 것으로 조상(彫像)들은 매우 생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씩 살펴보면 육도윤회, 열반전(涅槃傳), 보은경변(報恩經變), 부모은중경변, 지옥변상, 천수관음(千手觀音) 등의 경변석화로 벽면에는 본존을 크게 드러내고 좌우의 여러 단에 각 이야기에 등장하는 군상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각 조상들은 남송 특유의 섬세함과 사실성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어 감탄을 절로 자아낸다. 보정산 석각 입구에서 관광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분노한 표정을 담고 있는 호법신상군. 절벽에 나란히 조각된 호법신상들은 밀교(密敎)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일반적인 선종의 호법신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밀교에서는 관음상을 주로 관능적이고 여성적으로 표현하고 호법신상은 남성적이며 분노에 찬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밀교의 호법신상이 석각 입구에 있기는 하지만 수문신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호법신상 다음에는 육도윤회(六道輪回)를 표현한 석상이 등장한다. 이 석상은 무상대귀(無常大鬼)가 커다란 바퀴를 입으로 물고 두 팔로 받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퀴는 고해(苦海)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퀴 한가운데에는 사람이 앉아 있고 그의 가슴에서 나온 빛에 의해 바퀴는 다시 여섯 갈래로 나뉘어진다. 각 갈래마다 작은 동그라미가 있고 그 안에는 부처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는 ‘만물의 시작은 심장에 있고 심장이 일체를 말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작은 동그라미는 모든 사람이 부처나 보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육도윤회도 옆에 있는 3개의 커다란 불상조각은 화엄삼성상(華嚴三聖像)으로 보정산 석각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불상의 표정은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하고, 드리워진 가사는 섬세하고 힘차다. 3개의 불상 중 문수보살의 손에는 탑이 놓여 있다. 책을 들고 있는 다른 지역의 문수보살상과 달리 대족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단순한 진리 일깨우는 부모은중경변 화엄삼성도 옆에는 기념품이나 책자를 파는 상점이 마련되어 있고 그 안쪽에는 1천 개의 손이 조각된 황금빛 천수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조금 어지럽게 느껴지는 이 불상은 송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역시 보정산 석각을 대표하는 조각 중 하나다. 보정산에서 가장 유명한 석각 중 하나가 석가열반상(釋迦涅槃像)이다. 높이 5m, 길이 31m에 이르는 와불로 보정산 석각에서 가장 규모가 커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이 석상은 석가모니가 인도의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든 것을 묘사한 것으로 와불 주변에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도열해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열반상 바로 앞에는 꾸불꾸불한 도랑이 파여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많은 제자들이 그의 뒤를 따르려하자 부처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길에 금을 그어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를 표현한 것이다. 석가열반상을 지나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한없이 큰 은공을 묘사한 부모은중경변(父母恩重經變)이 눈길을 끈다. 태어날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입까지 비뚤어질 만큼 큰 출산의 고통을 참고 있는 임산부나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 자식을 품에 안고 누워 있는 여인상 등 주로 어머니의 은덕을 묘사하고 있다. 부모에 대한 효가 땅에 떨어져 버린 요즘 같은 시대에 이 석각들이 의미하는 바는 종교적 가치나 예술적 상징성 그 이상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정산 석각의 마지막 즈음에 자리한 지옥변상(地獄變像)에는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이 많이 묘사되어 있다. 나쁜 일을 저질러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창에 찔리는 모습이나 두 다리가 잘린 사람,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지는 사람들, 혀가 뽑히는 장면 등이 무척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어 소름이 끼칠 정도. 석각에 새겨진 ‘나쁜 일을 하거나 부모에게 불효하면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글귀나 염라대왕 앞에서 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죄짓고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시내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져 있는 남산 석각은 북산이나 보정산에 비해 규모가 작고 볼품도 없지만 두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도교 석각을 찾아볼 수 있다. 대족의 석각들은 단지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교훈과 깨우침을 주어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대족석각은 세월이 지나면서 과거의 아름다움이 많이 퇴색되었지만 평범하고 단순한 진리조차 망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깨우침을 주기 위해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족석각 여행정보 ● 항공: 대족과 가장 가까운 공항은 중경과 성도에 있다. 중경은 아시아나 항공이 매주 월, 수, 금요일에 운항하고 성도는 화, 목, 일요일에 연결된다. 중경에서 대족까지는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버스가 있고 약 2시간 걸린다. 성도와 대족 사이에는 매일 6번씩 직행버스(4시간 소요)가 오간다. ● 숙소: 대족에서 외국인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은 두 곳밖에 없다. 여행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대족빈관(大足賓館, ☎ 023-4372-1888)으로 2인실을 298~498위엔(元)이나 할인 받을 수 있다. 대족빈관보다 싼 곳에 머물고 싶다면 우정대주점(郵政大酒店, ☎ 023-4372-4200)을 이용하면 된다. 버스터미널에서 걸어 5분 거리에 있고 시설도 깨끗한 편이다. 2인실이 100~128위엔, 3인실은 158위엔이다. ● 먹거리: 터미널에서 나와 왼쪽으로 꺾어지면 바로 앞에 조형물이 서 있는 사거리가 보인다. 조형물 오른쪽에 있는 도로(중경 방향)에 저녁때면 많은 식당들이 문을 연다. 아주 다양한 음식을 팔고 있어 식사하기는 무척 편하다. 이밖에 대족빈관 앞 보행자거리에도 밤이면 골목골목마다 노천식당이 많이 들어선다. ● 인터넷: 대족빈관 비즈니스센터에서 인터넷을 쓸 수 있다. 사용료는 1분에 0.6위엔(약 90원)으로 조금 비싼 편. 대족빈관 앞 보행자거리에도 싼값에 쓸 수 있는 PC방이 여럿 있다. PC방은 1시간에 2위엔으로 값은 싸지만 한글 프로그램이 깔려 있지 않아 다운로드받아 써야 한다. ● 여행요령: 대족석각은 한 곳에 몰려 있지 않고 사방에 퍼져 있어 돌아보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볼 만한 것들은 모두 북산과 보정산에 몰려 있으니 두 곳에만 집중하는 것도 좋다. 보정산 석각이 가장 아름다우므로 아침 일찍 북산 석각을 들른 뒤 오후에 보정산 석각을 차분히 살펴볼 것을 권한다.
돈황(敦煌) 사막 속의 오아시스 2004-06-10
혜초는704년(성덕왕 3년) 신라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출가한 스님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광조우(廣洲)에서 약관 16세에 배를 타고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구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4년 동안 천축국의 동서남북을 고행하다가 남천축국의 여행길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오언시로 읊어냈다. 날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으로 나를 위하여 소식을 전할까? 혜초는 천축국에서 돌아올 때 육로를 택했다. 지금의 캐시미르 지방에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부를 지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돈황까지 왔다. 그는 돈황에 머무르며 천축국 여행기를 쓴다. 그것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천 개의 부처를 모신 명사산 천불동 중국의 북경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4천km 지점, 감숙성 서북쪽 황량한 사막 속에 돈황(敦煌)이라는 오아시스가 자리잡고 있다. 기원전 한무제 때부터 당, 송, 원을 거치며 이곳은 해상교통이 열리기 전까지 서역으로 가는 대상로의 길목이었다. 중국 본토의 비단, 도자기, 비취 등의 귀중품이 서쪽으로, 서쪽의 명마(名馬) 보옥, 전포 등은 동쪽으로 낙타 등에 실려 인도, 이란, 터키, 유럽까지 건너갔다. 훗날 우리는 이 길을 실크로드라 이름 붙인다. 낙타 등에 비단을 싣고 서역으로 가던 대상들은 이곳 돈황에서 며칠을 쉬며 짐을 정비하고 낙타에게도 휴식을 갖게 하고 식량을 비축하며 정보를 얻었다. 실크로드는 동서양의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그 길을 따라 문명과 문화, 종교도 널리 전파되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문화가 들어온 것도 이 길을 통해서다. 8세기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고승 혜초도 인도에서 돌아올 때 천산산맥을 넘어 돈황을 거쳐갔다. 기나긴 세월을 거치며 수많은 고승들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돈황에서 동남쪽으로 25km쯤 되는 곳에 명사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 산은 모래산이지만 동쪽 면은 절벽으로 이어지고 그 아래쪽으로는 실개천이 흐른다. 이 절벽을 일컬어 천불동(千佛洞)이라 부른다. 천 개의 부처를 모시는 석굴이 있다는 뜻이다. 멀리서 보면 1.6km나 이어진 절벽이 벌집처럼 석굴로 수놓아져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적인 문화유산, 돈황의 막고굴인 것이다. 신비함, 경이로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많은 수수께끼, 끝없이 이어 지는 황당무계한 이야기, 화려한 채색벽화와 무수한 조상들로 돈황은 사막의 전설이 되고 있다. 웃지 못할 과거를 간직한 막고굴 19세기말 청나라가 기울자 서구의 열강들은 동양의 거대한 땅 중국을 먹으려고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들었다. 왕원록은 호북성 마성현 출신으로 숙주순방군 병졸로 있다가 제대하고 나니 해먹을 일이 없어 괴상한 옷을 걸치고는 자칭 도사가 되었다. 엉터리 왕도사는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 돈황으로 흘러들어 왔다. 돌아다니는 것도 지쳤는지 안주할 거처를 찾다가 그는 명사산 동쪽 절벽에 오가는 사람 없어 폐허로 남아 있는 수많은 동굴 중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동굴 하나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그 속에서 밥을 끓여 먹으며 겨울을 나기 위해 동굴 속 여기저기를 손질하다가 그는 입구 오른쪽이 터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밑에 있던 모래를 치우니 이상한 소리를 내며 벽이 점점 갈라졌다. 왕도사는 이상한 생각에 귀를 벽에 대고 두드렸는데 그곳에서 빈소리가 났다. 벽을 헐자 벽 속에서 조그만 문이 나타나 그 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수많은 경서와 문서, 회화 두루마리가 한방 가득 차 있었다. 왕도사는 깜짝 놀라 몇 권의 경서를 들고 돈황의 지사에게 보였지만 그가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자 석실을 다시 봉해 버렸다. 이때는 중국을 먹기 위해 서구 열강들이 중국의 변방으로 탐험대를 보내던 때다. 1905년 10월 러시아의 오브루 체프가 소문을 듣고 왕도사를 찾아와 하찮은 선물을 주고는 두 보따리의 경서를 가져갔다. 영국 탐험가 스타인은 1907년 봄 왕도사를 꼬셔 몇 푼의 돈을 주고 경서며 회화 25상자를 싸서 런던으로 보냈다. 같은 해 겨울,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가 베트남 하노이에 있던 고고학 교수 펠리오를 돈황으로 보냈다. 그는 한문과 산스크리트어 등을 해독할 수 있었는데 왕도사의 굴에서 일일이 체크해 알짜배기들만 29상자를 골라 프랑스로 실어보냈다. 그 속엔 세계적 보물인 우리의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도 있었다. 왕도사는 펠리오가 던져준 얼마의 돈을 챙겼다. 펠리오의 돈황고서 발견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고 돈황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생겨났다. 그제서야 돈황의 경서며 회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청나라 조정은 아무리 나라가 기울어도 이것만은 챙겨야 되겠다고 생각해 나머지를 북경으로 운반했다. 그러나 그중 쓸만한 것은 왕도사가 모두 빼돌린 후였다. 북경으로 운반하던 관리도 얼마를 빼돌렸다. 1912년엔 일본의 오오다니 탐험대가 왕도사가 숨겨둔 것을 사갔고 1914년엔 영국의 스타인이 다시 와서 싼값에 왕도사로부터 다섯 상자를 챙겨 갔다. 중국은 현재도 스타인, 펠리오, 오오다니를 중국 문화재 3대 도둑이라 부른다. 1917년 돈황의 막고굴에서는 또 한번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난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자 전쟁에 진 러시아 병사 55명이 도망치다 이곳에 피신해 막고굴에서 불을 피워 끼니를 때우고 벽화 속의 금박을 벗겨내 정제를 했다. 지금, 사막의 오아시스 돈황은 웃지 못할 역사를 뒤로 한 채 그 신비스러운 이름으로 세계 각국의 여행객을 끌어 모은다.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