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차, 재패니스 오리진 はい, 하이볼
2018-11-21  |   50,673 읽음

재패니스 오리진

はい, 하이볼


길었던 여름이 끝났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던 탓에 위스키보단 맥주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이제 다시 위스키로 돌아갈 시간. 경쾌한 청량감의 맥주에 약간 미련이 남는다면 하이볼은 좋은 징검다리가 되어준다.


글 김민겸 기자 

사진 선보주류


MADE IN USA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분야든 명성을 얻기까진 시간이 걸린다. 일본도 처음부터 제조업 강국 타이틀을 단 건 아니란 얘기다. 일본은 전후 나라를 재건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융단폭격을 당했던 만큼 제대로 된 생산 시설을 갖추는 게 쉽지 않았다. 겨우 물건을 만든다 해도 그 당시 일본 공산품의 조악한 만듦새와 내구성이 발목을 붙잡았다. 오죽했으면 수많은 제조업자가 규슈 지방에 있던 작은 마을 ‘우사(USA)’로 몰려들 정도였다. 자신들이 만든 물건에 ‘U.S.A.’에서 온점만 빠진 ‘MADE IN USA’ 라벨을 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산 제품이 자연스레 미국산으로 둔갑했고, 우사는 이내 일본 전역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는 생산 기지로 떠오르게 된다.

자동차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지만 자동차공업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더 필사적이었다. 잿더미가 된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선 운송 수단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미국에 요청해 조건부 자동차 제조허가를 어렵게 얻어냈지만 뒤처진 기술력과 터무니없이 부족한 수요는 곧 위기를 불렀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부터 반전을 맞게 된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의 군용차 주문이 쏟아진 것. 그렇게 살아난 자동차 공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일본은 토요타를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값싸면서 품질 좋은 차 만들기에 몰두한 결과 점차 시장점유율도 올리고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던 일본 차는 1970년대에 불어 닥친 석유파동의 반사이익을 통해 미국 자동차 시장을 주름잡는다. 이에 미국은 자국 자동차 시장 보호 취지로 일본산 자동차 수입에 규제를 걸기 시작했다.


위스키 생산국 반열에 들어서다

일본산 위스키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곧 산토리(SUNTORY)의 역사를 살펴보면 된다. 때는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스코틀랜드 증류소 공장장을 지낸 타케츠루 마사타카(竹鶴政孝)는 막 공사를 마친 산토리 위스키 증류소의 지휘봉을 잡는다. 이후 숙성과정을 거친 1929년, 최초의 일본산 위스키를 병입하며 위스키 생산국 반열에 들어선다. 첫 위스키는 ‘산토리 시로후다’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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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세워진 산토리 야마자키 증류소


참고로 산토리는 창업주(토리 신지로)의 성 ‘토리(Tory)’에 ‘선(Sun, 태양)’을 붙여 지은 이름. 산토리 증류소의 초대 공장장을 지내며 지금 산토리 위스키의 발판을 마련한 타케츠루는 창업주 토리와의 관계 악화로 위스키 양조 5년 만인 1934년, 공식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이때 타케츠루는 ‘대일본과즙’ 증류소를 세우는데 여기서 만든 술이 ‘닛카 위스키’이다. 닛카 위스키는 이후 산토리 위스키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올랐고 현재 아사히 주류 소속으로 제품을 생산 중이다. 당시에는 산토리 입장에서 보면 불행한 일이었을지 모르나 일본 위스키 산업 전체를 두고 보면 건전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사건이었다. 산토리는 타케츠루와의 결별 직후, 오늘날 일본 위스키의 대명사로 불리는 가쿠빈을 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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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위스키의 대명사 가쿠빈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어가던 1980년대 초중반, 정점을 찍은 일본 내 위스키 소비량은 이후 내리막을 걷게 된다. 가장 왕성하게 음주 활동을 해야 할 20~30대가 술 소비를 줄인 게 큰 이유였다. 산토리가 이들을 조사한 결과, 위스키의 쓴맛도 맛이지만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는 응답을 보여 왔다. 이에 산토리 경영진은 지금의 제품 전략으로는 좀처럼 소비를 늘리기 힘들다고 판단, 중대 결정을 내리게 된다.


프리미엄 브랜드로 우뚝 선 일본차

일본 차에 대한 거부감은 곧 일본스런 이름 걷어내기 작업으로 이어진다. 우선 토요타는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프리미엄 브랜드 렉서스(Lexus)를 만들었다. 이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렉서스라는 이름은 럭셔리(Luxury)와 비슷한 고급스런 어감 때문에 결정된 이름. 회사의 인재란 인재는 모두 렉서스 팀에 투입한 토요타의 강수는 적중했다. 미국 사람들은 디자인은 물론, 이름마저 럭셔리한 렉서스에 열광했다. 렉서스 브랜드로 처음 선보인 대형 세단 LS는 당시 포장 상태가 좋지 않던 미국 도로를 소음 없이 달릴 수 있는 차였다. 미국 유수의 자동차 매체 및 시장 조사기관은 독일 프리미엄 메이커보다 높은 점수를 주었고, 이는 곧 폭발적인 인기로 이어지게 된다. 혼다는 아큐라(Acura)를 선보이며 미국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 세단 레전드, 미드십 스포츠카 NSX를 잇달아 발표한다. 닛산 역시 인피니티(Infiniti)라는 고급 브랜드를 내놓는다.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형성 이후 2003년 출시한 G35가 잇따른 호평 속에서 2003 올해의 차에 선정되기도 한다. 미국 시장에서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둔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은 지금도 각자의 영역에서 친환경과 다이내믹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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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를 얹은 LS500h


맛과 마케팅, 두 마리 토끼 잡은 일본 위스키

일본 위스키는 2007년,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장소는 세계 위스키 품평회가 열리던 영국이었다. 여기서 닛카 위스키 ‘닛카 요이치 1987’와 산토리 위스키 ‘산토리 히비키 30년’이 각각 싱글몰트 위스키, 블렌디드 위스키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거머쥐게 된다. 한때 짝퉁 취급받던 일본 위스키가 점차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일본차 역사와도 닮아 있다. 

한편 위스키 판매 불황이 장기화하던 2008년, 산토리가 장고 끝에 내린 수는 가쿠 하이볼(High-ball)이었다. 하이볼은 위스키에 소다수를 섞은 칵테일의 한 종류. 우리나라는 스트레이트로 즐기는 경향이 강하고 기껏해야 온더록스로 즐기는데 반해, 위스키보다도 탄산수가 월등히 많이 들어간 셈이다. 그럼에도 오래전부터 소주에 물을 타 마시는 미즈와리가 대중화된 일본인 터라 거부감 없이 그들의 음주 문화에 흡수될 수 있었다. 일본산 위스키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하이볼 전략의 성공으로 위스키 판매량은 다시금 늘어났다. 2009년에는 아예 가쿠빈에 탄산수를 섞은 제품을 출시하면서 인기를 이어 갔다. 위스키 알코올 도수가 40%대인 점, 그리고 1:4의 위스키와 탄산수 비율을 고려할 때 하이볼의 도수는 8% 수준으로 내려온다. 맥주보다 세긴 하지만 별 차이가 없으면서 청량감이 맥주 못지않은 것. 산토리의 경쟁 업체들이 이를 두고 볼 리 없었다. 기린과 아사히 역시 뒤이어 하이볼 제품을 출시하며 일본 내 하이볼 시장을 더욱 넓혔다. 산토리는 2013년 버번위스키로 유명한 미국 짐 빔 증류소마저 인수, 짐 빔 화이트로 하이볼 마케팅을 이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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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리 상위 라인업 하쿠슈를 활용한 하이볼. 민트를 얹어 숲의 느낌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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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빔 역시 산토리의 주력 하이볼 위스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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