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I.D. R 파이크스 피크
2018-06-25  |   21,328 읽음

구름을 향해 달리는 무공해 국민차

VOLKSWAGEN I.D. R PIKES P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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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스포츠 활동을 잠시 쉬었던 폭스바겐이 파이크스 피크 힐클라임에 도전한다. 오르막에 특화된 EV 경주차 I.D. R 파이크스피크와 로맹 뒤마가 EV 역대 최고기록을 목표로 한다. 


1980년대 중반 WRC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 그룹B를 폐지하고 1987년부터 그룹A 규정을 도입했다. 새로운 랠리카를 재빨리 개발해 챔피언을 독식한 란치아와 달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메이커들도 있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활동무대를 잃은 랠리카를 전혀 다른 경기에 투입했는데, 지옥의 랠리라 불리던 다카르 랠리와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리는 파이크스 피크 힐클라임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모두 비포장 경기인 동시에 규정이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그룹B 랠리카의 참전이 가능했다. 당시에는 아직 미국 국내 경기에 불과했던 파이크스피크 힐클라임은 유럽에서 날아온 아우디와 푸조에 의해 신기록이 경신되고 세계적인 주목도 받았다. 


오르막 경주에 특화된 EV 경주차

WRC 퇴진 후 파이크스 피크 힐클라임 도전이라는 점에서 최근 폭스바겐의 움직임은 1980년대 아우디, 푸조의 행보와 닮았다. 4년 연속 더블 챔피언십을 휩쓸던 WRC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물러난 폭스바겐이 모터스포츠에서 완전히 발을 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으는 경기에 새로운 경주차를 개발해 투입했다는 점에서 최근 공개된 I.D. R 파이크스피크는 폭스바겐의 본격적인 활동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 아닐까 기대하게 만든다. 올해 초 렌더링으로 공개된 이 차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 파이크스피크 힐클라임(PPIHC) 전용 머신. 현재 폭스바겐에서 가장 뜨겁고도 강력한 신상 경주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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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테스트를 앞두고 엔트리 넘버와 스폰서 로고를 붙인 모습


파이크스 피크 힐클라임은 미국 콜로라도주 로키산맥 끝자락, 파이크스 봉우리를 오르는 힐클라임으로 1916년 시작된 유서 깊은 경기다. 다양한 클래스의 차들이 도전하던 PPIHC는 2000년대 들어 EV 머신들이 빠르게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높은 고도에서 출력이 떨어지는 내연기관과 달리 전기차는 꾸준한 성능을 낼 수 있는 데다가 EV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자동차 시장의 흐름에도 들어맞는다. 파이크스피크 8회 우승 경력이 있는 일본의 타지마 노부히로는 2013년부터 EV 머신으로 바꾸어 탔고, 혼다도 전용 경주차를 개발해 투입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 2015년 리스 밀렌이 eO PP03로 우승을 차지했는데, PPIHC 역사상 최초의 EV 우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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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 거대한 윙은 힐클라임 전용 경주차의 특징


F1을 능가하는 가속력 갖춰

올해 초 퇴진한 폭스바겐의 마티아스 뮬러 회장은 지난해 9월 ‘로드맵E’라는 장기 전략을 발표했다. 디젤 스캔들로 땅에 떨어진 회사의 신뢰를 회복하고 자동차 시장의 변화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르면 폭스바겐은 2030년까지 모든 모델에 EV 버전을 출시할 계획이다. 아울러 폭스바겐의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는 컨셉트카들도 꾸준히 선보였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I.D.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번 I.D. R 파이크스 피크는 일반 도로를 달리는 최초의 I.D. 모델이 된다. 판매용이 아닌 경주차이지만 PPIHC가 일반 도로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지난 4월 프랑스에서 공개된 실물은 르망 프로토타입을 떠올리게 하는 납작한 보디 앞뒤로 거대한 윙을 달고 있었다. 공기 밀도가 낮은 산꼭대기에서도 안정적으로 다운포스를 확보하기 위한 디자인이다. 폭스바겐에서는 풍동 설비를 활용해 공기 흐름을 다듬는 한편 탈착식 구조로 다양한 공력 장치들을 시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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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에 프랑스에서 공개되었다


구동계는 모터 2개로 500kW(680마력)의 시스템 출력과 66.3kg·m의 토크를 낸다. 40kWh 용량의 리튬이온 배터리는 운전석 옆과 뒤에 배치되었다. 닛산 리프 최신형과 같은 용량이지만 이 차는 4배가 훨씬 넘는 출력으로 오르막을 전속력으로 달려야 한다. 그래도 경기 구간이 20km 남짓에 불과하므로 충분한 용량이다. 경기 중 사용하는 전기 에너지의 20%는 회생 제동으로 충당할 것이라고 한다. 회생제동은 에너지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기계식 브레이크의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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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전석 오른쪽으로 거대한 배터리팩이 보인다


차중을 1,100kg 이하로 낮추기 위해 광범위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법이 활용되었다. 고출력 모터와 대용량 배터리는 필연적으로 중량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완성된 I.D. R 파이크스피크는 0→시속 100km 가속을 불과 2.25초 만에 해낸다. F1이나 포뮬러 E보다도 빠른 가속 능력이다. 

2015년 우승차인 eO PP03이나 타지나 노부히로의 E러너 등 파이크스피크용 EV 머신들은 모두 1천 마력이 넘는 고출력을 자랑했기에 680마력의 출력은 다소 빈약해 보인다. 여기에 대해 폭스바겐 모터스포츠 기술 책임자 프랑소와 자비에 드메종은 ‘경주차의 가장 큰 적은 무게이며 전기차 무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배터리입니다. 우리는 무게와 배터리 용량, 출력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을 찾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로맹 뒤마가 몰고 EV 신기록 목표로

승리를 위한 또 하나의 요소, 드라이버는 로맹 뒤마가 맡는다. 프랑스 출신의 뒤마는 르망 24시간 우승컵을 두 개 보유한 베테랑 드라이버. 서킷 레이스뿐 아니라 WRC와 다카르 랠리 등 다방면에 도전해 왔고 PPIHC에서는 최근 3번의 우승(2014, 2016, 2017)을 거두었다. 전기차로 고출력을 확보하는 데는 보통 모터 개수를 늘리는데, I.D. R 파이크스피크 역시 2개의 모터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 방식은 우연찮게도 폭스바겐이 30년 전 파이크스 봉우리 도전을 위해 제작했던 트윈 엔진 골프를 떠올리게 한다. 4기통 엔진을 앞뒤로 얹은 이 기묘한 골프는 1987년 클라우스 요아힘 클라인트가 몰고 출전해 코스 막판까지 좋은 페이스를 보여주었지만 아쉽게도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이번 도전에서 과거 못 다 이루었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경주차 개발과 드라이버 준비에 만전을 기했으니 이제 날씨와 운이라는 불확정 요소만이 남은 셈이다. 이 모든 것이 잘 들어맞는다면 EV 최고기록은 물론 세바스티앙 로브가 보유하고 있는 8분 13초 878의 역대 최고기록 돌파도 결코 꿈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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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PPIHC에 도전했던 트윈 엔진 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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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동 테스트 때의 모습. 폭스바겐의 개발 역량이 총동원되었다


 Race to the Cloud 


‘구름을 향해 달리는 레이스’(Race to the Clouds)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파이크스 피크 힐 클라임(Pikes Peak Hill Climbs, PPIHC)은 미국 콜로라도주 파이크스 봉우리를 오르는 힐클라임 경주다. 1916년 시작되어 미국 모터스포츠 이벤트 가운데 인디500 다음가는 긴 역사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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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을 향해 달리는 레이스’  


힐클라임이란 산길이나 언덕길을 오르며 시간을 다투는 타임 트라이얼 경주의 일종. 자동차 역사 초창기부터 사랑받던 레이스 형태다. 하지만 전문 서킷이 점차 늘고, 안전 문제가 대두되면서 대규모 힐클라임 경기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소규모로 열리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것이 바로 파이크스 피크 힐클라임이다. 

콜로라도의 주도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서쪽으로 16km 지점, 로키산맥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파이크스 봉우리는 이 산을 발견한 탐험가 제부론 파이크에서 이름을 따 왔다. 사업가 스펜서 펜로즈가 관광객 유치를 위해 낡은 흙길을 넓고 평탄하게 다듬으면서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힐클라임 경주를 도입해 1916년 개최했는데, 이것이 바로 PPIHC의 시작이었다. 1940년대부터 1970년까지는 AAA와 USAC의 인디카 시리즈 일전에 포함되기도 했다.    

미국 국내 경기였던 PPIHC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80년대 유럽 차의 도전 덕분이다. WRC 규정 변경으로 설 자리를 잃은 그룹B 랠리카들이 도전장을 낸 것. 미셸 무통과 발터 뢸이 아우디 스포트 콰트로로, 아리 바타넨이 푸조 405 터보16로 차례차례 도전했다. WRC 스타와 미국 드라이버들의 기록 경쟁은 세계적인 화제를 끌어모았다.


트윈 엔진 골프의 못다 이룬 꿈

경기 시작지점은 백두산보다도 높은 해발 2,862m. 결승점이 있는 정상은 4,301m로 무려 1,439m를 올라야 한다. 주행 거리 19.99km에 코너 개수 156개. 오랫동안 흙길에서 열리던 경기는 환경단체의 압박에 못 이겨 2002년부터 아스팔트를 깔아 2012년 완전 타막 코스로 변모했다. 흙먼지 날리던 비포장 노면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포장 이후에도 인기는 여전하다. 노면이 완전히 포장되기 직전인 2011년에 타지마 노부히로에 의해 10분 벽이 깨어진 후(9분 51초 278) 2013년에는 세바스티앙 로브가 엄청난 신기록을 수립했다. 푸조가 특별 제작한 208 T16을 타고 8분 13초 878만에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다.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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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세바스티앙 로브가 8분 13총 878의 신기록을 작성했다 


매년 150대 이상의 경주차가 도전하는 가운데 종합 우승은 대부분 무제한 클래스 참가차다. 이들 중에는 그룹B 몬스터 랠리카나 오픈휠 경주차는 물론 엔진을 두 개 얹은 변종 머신 등 독특한 존재들도 있었다. 타지마 노부히로의 트윈 엔진 스즈키 이전에 폭스바겐의 트윈 엔진 골프가 있었다. 1985년 PPIHC에 도전한 폭스바겐은 그 해 3위, 이듬해 4위에 머물렀다. 우승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출력이라 판단한 폭스바겐은 뒤쪽에 엔진 하나를 더 얹은 트윈 엔진 골프 제작해 1987년 투입했다. 4기통 1.8L 터보 엔진을 앞뒤로 얹은 이 차는 652마력의 출력으로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 가속하는 데 3.4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드라이버 요키 클라인트가 코스 중반까지 가장 빠른 페이스를 보여주었지만 결승선 불과 0.4km를 남기고 서스펜션이 부서져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것은 EV 클래스다. 높은 고도로 인해 공기가 희박해지는 코스 특성상 결승선에 가까울수록 다운포스는 물론 엔진 출력도 떨어지는데, 전기차는 출력 면에서 거의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EV 비중이 커지고 있는 자동차 시장 동향과 맞물려 많은 메이커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폭스바겐의 이번 도전 역시 같은 이유다. 전기차 관련 노하우를 얻고 기술력을 선보이기에 최적인 데다 단발성 이벤트라 부담이 적다. 주요 시장인 미국에서 열린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래저래 폭스바겐 복귀전으로 최적인 경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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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 다양한 차들이 모여들어 파이크스 봉우리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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