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만난 이탈리아 클래식 멀클 교수가 바라보는 자동차
2018-03-16  |   17,918 읽음

미국에서 만난 이탈리아 클래식

멀클 교수가 바라보는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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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좁은 땅덩어리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지만, 미국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대륙의 땅덩어리는 넓디넓고 물가와 인구밀도도 비교적 낮기 때문. 그러나 모든 미국인들이 공간을 흥청망청 쓰는 건 아니다. 미국 취재 중 만난 웨이스 멀클 교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5월의 캘리포니아는 굉장히 건조하고 덥다. 태평양과 맞닿은 지리적 특성은 누군가에게는 고통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축복이다. 후자는 당연히 자동차 마니아.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쭉 뻗은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 위엔 오픈카가 즐비하고, 곳곳에서 연일 자동차 관련 행사가 풍부하게 열린다. 게다가 일 년 내내 온화하며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조한 환경은 철과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자동차에겐 축복이나 다름없다.

 

자동차에 대한 남다른 생각

일요일 아침 ‘카즈 앤 커피’에 참석한 후 다음으로 찾은 목적지는 버뱅크였다. 낮 기온은 이미 25도가 넘어가고 있었으며 정오에 가까워지면서 햇살은 매우 따가웠다. 멀클 교수와의 만남을 주선한 현지 코디네이터는 우리에게 버뱅크 외곽의 한적한 백인 중산층 마을 주소를 보내왔다. ‘자동차 업계에서 일하는 보통 미국 사람과는 생각이 많이 다른 분입니다. 그분의 피아트만 봐도 굉장히 재미있을 거예요.’ 주소와 함께 보내온 메시지만 봐도 흥미가 돋는다. 픽업트럭과 대형 세단, 우렁찬 V8 엔진을 올린 차들이 널린 이곳에서 피아트라니, 왠지 기대가 샘솟았다. 

롤링 힐스에서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버뱅크 외곽 한 주택가. 영화에서 자주 봤던 백인 중산층 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널찍한 잔디밭과 여유로운 2층 주택, 렌치라 불리는 창고가 딸린 집들이 가득 늘어섰다. 주소지를 찾아가 벨을 눌렀다. 안에서 백인 소년이 나왔다. 멀클 교수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빨간색 미니 쿠퍼에서 내리는 거구의 웨이스 멀클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멀클 교수는 현재 대학에서 자동차 디자인과 개발 분야를 연구 중이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자동차의 디자인과 기술을 분석하거나 교통사고 혹은 교통과 관련된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공식 직함은 오토모티브 엔지니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멀클 교수는 자신의 아지트로 우리를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주택 뒤편에는 차고와 개인 사무실, 자동차 작업장(렌치), 말 훈련장과 트레일러가 있었다. 예전 마구간이었던 렌치는 현재 멀클 교수가 모은 자동차들을 위한 차고와 작업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곳에는 5대의 피아트와 마쓰다 로드스터를 보관 중이다. “캘리포니아는 여러모로 자동차를 즐기기에 매우 좋은 곳입니다. 원래 저는 중부 출신인데 그곳은 겨울과 여름이 극명하게 나눠지죠. 반면 캘리포니아는 기후 변화가 적어 오래된 차를 보관하기에 굉장히 좋습니다. 그러나 햇볕이 너무 강해 직사광선을 막을 수 있는 장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렌치 문을 열면서 그가 건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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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구간을 개조한 멀클 교수의 개러지

 

 

마구간 개조한 렌치에 피아트 보관

오래된 마구간을 작업장으로 이용하고 있는 그의 컬렉션은 미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차들이 대부분이다. 

노란색의 피아트 850 스파이더를 비롯해 피아트 아바스 1300(흰색), 40대만 만들어진 피아트 모레티 850 스포르티바(빨간색), 피아트 리트모 아바스 2000, 베르토네가 디자인과 생산을 담당한 피아트 X1/9가 그 주인공이다. 이 중 모레티 850 스포르티바는 미국에 단 한 대뿐인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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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르제토 쥬지아로가 베르토네에 몸담던 시절 담당한 피아트 850 스파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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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필요한 장치만 갖춘 간결한 실내

 

나머지 모델 역시 현재 미국에서는 극소수만 남아 있는 것들이라고. 피아트를 수집하는 이유에 대해 멀클 교수는 “피아트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미국 자동차문화 하면 대부분 픽업이나 대형 세단, 머슬카를 떠올리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들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이탈리아의 차들은 엔진은 작지만 충분히 효율적입니다. 물론 저도 픽업을 한 대 가지고 있긴 한데 말을 옮길 때만 사용합니다(멀클 교수의 부인은 말을 전문적으로 트레이닝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미국 픽업 소유자들은 그 차를 매일 운용하죠. 더군다나 혼자 타고 다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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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 리스모 아바스 2000은 미국 내에서 보기 힘든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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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부터 1971년까지 단 40대만 만들어진 모레티 스포르티바 쿠페 역시 미국 내 유일한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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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 사이 생뚱맞은 마쓰다 MX5는 에어컨과 파워스티어링도 있고 운전도 재미있어 구매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미국인들과 확연하게 다른 시각이다. 무엇보다 그가 강조하는 자동차는 효율을 극한으로 뽑아내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미 이탈리아는 1950년대에 이 부분을 완성했단다.  

 

 

멀클 교수가 소유한 이 차들은 언제든 운행이 가능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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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 911처럼 뒤쪽에 엔진을 얹은 피아트 아바스 1300은 당시에 꽤 스포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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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드십 스포츠카 피아트 x1/9. 초기엔 피아트에서, 후기엔 베르토네에서 생산했다.

 

 

엔진부터 하체 등 모든 유지 보수를 직접 하는 이 공간에는 자동차뿐 아니라 관련 부품들이 가득하다. 오래된 헤드커버부터 각종 벨트류, 여기저기 붙어 있는 포스터와 부품 설계도 등이 굉장히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생각보다 예비 부품이 많다. 단종된 지 오래됐고 한때 미국에서 판매했지만 지금은 남아 있는 개체가 거의 없는 모델들이라 부품 수급에 어려움이 많다고. “여기 있는 대부분 부품들은 오래전부터 구해놓은 것들이에요. 이탈리아 차의 고질병인 잔고장에 대비한 것들인데 부품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같은 부품을 한 번에 여러 개 구입해 놓을 때가 많습니다. 가끔 단종된 부품들이 있을 때는 직접 만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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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간을 개조한 개러지에는 별도의 작업 공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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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러지 내부는 빈티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포스터와 소품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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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러지 내부는 빈티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포스터와 소품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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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품 창고에는 같은 부품이 여러 개씩 정리돼있었다

 

 

연구소 수준 넘는 방대한 자료 갖춰

렌치를 둘러본 후 그는 개인 사무실을 소개했다. 여기저기에는 자동차 역사에 관한 자료들과 자동차 잡지가 빼곡하다. 현재 연구 중인 교통사고 사례를 얘기하던 그의 이야기는 어느새 자동차의 움직임과 충돌시 회피 가능성에 대한 설명으로 옮아간다. “자동차는 사람을 위한 기계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할 일은 사고 상황에서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구할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입니다. 자율주행차가 나온다고 하지만 여전히 도로에는 사람이 운전하는 차가 당분간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거기서 발생되는 사고에 대한 분석을 통해 비슷한 사례를 최대한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엔지니어로서 바라보는 눈은 확실히 일반 마니아들의 관점과는 상당히 다르다. 차의 움직임을 알고 그에 따른 예방책을 연구하는 일은 언제나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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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모티브 엔지니어 멀클 교수는 현재 교통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눈길을 끈다. 1920년대부터 최근까지 미국에서 판매된 자동차의 디자인을 모아 놓은 자료들이다. 모든 자료들은 멀클 교수가 직접 발로 뛰며 수집한 것들로 상당히 오랜 시간을 투자한 결과물이다. 자료들의 수준이나 양 자체가 웬만한 자동차 연구소 수준을 뛰어넘는다. 개인적으로 이런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한 부분이 가장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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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사무실에는 직접 수집한 자료들이 어마어마하다

 

멀클 교수는 틈틈이 그의 피아트를 타고 자동차 이벤트나 모임에 참석한다. 각종 모임에 참석해 연구소와 사무실에선 얻을 수 없는 많은 내용들을 수집한다고. 때로는 격한 논쟁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모두가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귀결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자동차에 대한 생각이 여느 미국인들과 다르지만, 이런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존중되면서 미국 자동차문화가 발전해 온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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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클 교수는 이바스의 효율성을 굉장히 높게 평가 했다

 

취재를 마치고 우리는 그가 가족용 차라고 소개한 BMW M3(E36)를 타고 근처 식당으로 이동했다. M3가 주차된 차고에는 또 다른 차가 한 대 더 있었는데 피아트 124 스포츠였다. 그 후 식당에서도 한참 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시시콜콜한 것들부터 자동차에 관련된 내용들까지 다양한 주제가 오고 갔다. 멀클 교수와 나는 서로 사는 곳과 환경은 다르지만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구상 어디에서 만나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 강력하게 공감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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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용 차를 위한 차고에는 피아트 124 스포츠 쿠페와 BMW M3 (E36)가 보관돼 있다

 

 

글  황욱익(자동차 칼럼니스트) 사진  류장헌 현지 코디네이터 권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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