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텀시승기 5회] 푸조 206 영입기: 펠린 룩의 뿌리를 찾아서
2018-07-17  |   81,470 읽음

푸조 206 영입기: 펠린 룩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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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차란 무엇인가? 최고급 물소 가죽을 두르고 12기통 엔진을 얹은 뒤 빌딩 한 채 가격표를 붙인다고 해서 모든 차가 명차가 되지는 않는다. 가격 여하와 상관없이 긴 세월을 관통하는 하나의 뚜렷한 가치관이 있는 차를 우리는 명차라 부른다. 매일 출퇴근 용도로 쓰이는 우리의 애마도 명차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208의 새 친구는 그런 ‘명차의 자격’을 증명하는 대선배 모델이다.


모든 것은 어느 무료한 날의 점심시간으로부터 시작됐다. 유독 할 일이 없었던 3월 어느 날, 재미있는 매물이 있나 찾아보기 위해 중고차 사이트에 들어가 본 게 화근이었다. 연식 15년 이상 수입차로 필터를 걸어놓고 한참 스크롤을 내리던 도중, 눈에 띄는 매물을 한 대 발견했다. 유난스러운 오렌지색의 206 해치백이었다.

모름지기 206이라 하면 저렴한 가격의 하드톱 컨버터블로 2000년대 초 컬트적 인기를 끌었던 206CC, 그리고 랠리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와인딩 머신인 206RC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도저도 아닌, 14인치 휠이 끼워진 5도어 206이라니 관심이 동할 만도 했다. 게다가 2001년식 임에도 10만km도 되지 않은 주행거리며, 쨍한 오렌지색이며 제법 마음이 갔다.

이 귀여운 206을 내 주변에 두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푸조의 매력을 전파(?)하겠다는 생각에 올드카에 관심 있는 지인들에게 장난감으로 영입하길 제안했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 보통은 그러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 차를 잊었겠지만, 미련이 쉬 가시질 않았다. 여기에 가격이 쐐기를 박았다. 처음 매물 광고를 본 지 불과 두세 시간 만에 판매자가 가격을 25%나 내린 것. 이쯤 되자 운명론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이건 운명이야, 이 차는 내가 사야겠어.”

단숨에 대구까지 내려가 차를 살펴봤다. 여기저기 문콕이며, 까진 곳이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줬지만, 50cc 스쿠터보다 싼 가격을 생각하면 시동 잘 걸리는 것만으로도 값어치를 한다고 느껴졌다. 결국 그 길로 계약서에 사인하고, 새 식구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208을 데려온 지 불과 두 달 만에 내 이름이 새겨진 차를 또 한 대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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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차’와 ‘올드카’, 그 사이의 스토리


원래 나는 올드카를 좋아한다. 출퇴근 때문에 208을 샀지만 그 전에 타던 E39 5시리즈 역시도 진작에 대학에 입학했을 나이인 스무살이다. 신차보다 불편하긴 해도 제조사의 개성과 고집이 또렷했던 과거의 차들을 타다보면 신차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저마다의 철학을 몸소 느낄 수 있다는 게 올드카의 매력이다. 206 역시도 시작은 비슷했다. 208을 타면서 새롭게 보게 된 푸조가 원래 어떤 지향점을 갖고 차를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 덜컥 가져왔지만, 주변에 타는 사람도 본 적이 없고 국내 정보도 드물어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급한 대로 인근 서비스 센터와 구형 푸조 잘 보기로 소문난 사설 공업사 몇 곳을 수소문했다. 차대번호를 불러주고 정비 이력이나 히스토리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는 서비스 센터에서 발자취를 찾았다. 서울과 대구에서 몇 차례 경정비를 받은 이력을 확인한 것. 만일에 대비해 7만원을 주고 순정 스페어 키도 하나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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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거에서 만든 계기판은 타코미터와 속도계가 작동불량이라 정비가 필요하다


그러던 중 한 공업사에서 이 206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이 지긋한 정비반장님이 “이야, 이 차가 아직도 살아있네!”라며 자연스럽게 과거사를 읊어줬다. 사연인 즉, 이 차는 2001년 한국에 수입된 직수입 차량이자 국내 최초로 등록된 206이었다. 1997년 IMF 위기로 당초 수입원이었던 동부 푸조가 사업을 철수하고 2003년 한불모터스가 출범할 때까지 푸조는 국내 공식수입원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동부 푸조와 제휴해 A/S를 담당하던 한 공업사에서 몇몇 차종을 직수입해 왔단다.

2001년에는 국내 첫 인증을 위해 206 수입을 준비 중이었는데, 한 고객이 자신이 1호차를 사겠노라며 특별주문을 넣었다. 오렌지 컬러나 희한한 설계의 파노라마 썬루프도 그런 특별 옵션이었다. 하지만 최초 주문 고객은 차량이 수입될 즈음 종적을 감췄고, 주인 없이 붕 떠버린 차를 한 노부부가 구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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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식 소형차에 파노라마 썬루프라니, 믿어지는가? 외장형 레일이 인상적이다


노부부의 동네 마실용으로 쓰였던 차는 15년 간 불과 7만km여를 달렸고, 두 번째 차주가 1년 반 동안 서울과 대구를 오가는 데 쓰다가 올해 초 대구의 매매상사에 매각됐다. 그리고 그 차를 우연히 발견한 내가 세 번째 주인이 된 것이다. 이런 특별한 스토리는 나는 물론 차를 팔았던 상사에서도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한낱 낡은 소형차에 불과했던 206의 히스토리를 듣자 애정이 빠르게 차올랐다. 자동차 기사에서나 보던 ‘국내 1호차’를 내가 갖고 있다니, 제법 짜릿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 ‘썩차’에 불과했던 206은 감춰져 있던 스토리와 더불어 ‘올드카’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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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조 차에 컵홀더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건 예나 지금이나...


세월을 관통하는 프렌치 해치백의 가치

이 우연찮은 만남도 인연이라고, 최소한의 요소만 손봐 종종 세기말 감성을 즐기고 싶을 때 타기로 했다. 성공한 사회인을 위한 비즈니스 세단인 5시리즈와 달리 206은 당대 유럽의 가장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차다. 20년째 푸조의 핵심 디자인 코드로 자리잡은 ‘펠린 룩(feline look)’를 처음 선보인 차이자 합리성과 준수한 성능, 다양한 엔진 및 차체 라인업으로 수 년 간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때문에 206을 타 보면 유럽 소비자들이 가장 중시했던 자동차의 기본기가 무엇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작은 차체와 조악한 실내 마감과는 대조적으로 주행 실력은 기대 이상이다. 차를 인수하자마자 해외직구와 푸조 서비스 센터의 노후 모델 부품 할인 캠페인을 통해 하체 부품 몇 가지를 주문해 교체했다. 덜그럭거리던 하체와 오일이 비치던 댐퍼만 새것으로 갈았을 뿐인데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한 코너링 감각이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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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구로 매우 저렴하게 부품을 구입해 하체 작업을 마쳤다


14인치 타이어가 무색하게 기민한 움직임이며, 구식이지만 수동변속기처럼 빠르게 락업 클러치를 붙여 직결감을 높이고, 20년 전에 무려 레브매칭 기능까지 탑재한 4단 자동변속기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인 주행성능에 충실하고자 노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낡고 불편해 자주 타지는 않지만 종종 208과 206을 번갈아 타 보면 17년의 연식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차를 아우르는 프렌치 해치백의 가치관을 느낄 수 있다. 왜소한 몸집을 커버하기 위한 강렬한 디자인, 휠베이스를 한껏 늘려 실내공간과 적재함 공간을 극대화한 비례, 달릴 때 미소가 지어지는 충실한 기본기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가치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대중차 역사의 한 귀퉁이를 장식할 명차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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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208의 나이는 17살이나 차이나지만, 그 속에 담긴 본질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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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이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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