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 맵시나 하이 디럭스 모처럼 만난 ‘완벽한 올드카’
2000-04-27  |   73,835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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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된 차를 올드카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게다가 오늘 시승한 차 85년형 맵시나는 거의 새차에 가까운 보존상태가 돋보인다. 깨끗하게 관리된 차는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우선 오랜 세월 오너가 바뀌지 않는다. 시승차는 차를 처음 산 할아버지가 얼마 전까지 간직해 왔다. 항상 차고에 넣어두고, 가끔 몸을 풀어주듯 움직였을 뿐이다. 비오는 날에는 끌고 나갈 생각을 안 했다. 차를 타기 위해 샀는지, 간직하기 위해 샀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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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카의 조건 완벽하게 충족하는 차

맵시나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원형 그대로다. 이 또한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가하면 점점 구하기 어려워지는 예비용 부품을 충분히 비축해 두었다. 완벽한 올드카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 차다. 이런 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쁘다. 올드카는 곧 고물차라는 공식에서 벗어난 차를 만난 기쁨이다.

깨끗한 올드카와의 만남은 즐겁지만, 정작 맵시나 이야기는 조금 슬프다. 맵시나 스토리는 74년 데뷔한 3세대 오펠 카데트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오펠 카데트는 GM이 처음 월드카로 만든 차였다. 월드카는 ‘하나의 차로 세계 여러 곳에 팔리는 모델’을 말한다. 플랫폼은 물론 보디를 같이 쓰고, 부품을 공동구매하여 생산비용을 낮추는 것이 목적이다.

카데트의 해치백 모델은 미국에서 시보레 쉐벳으로 만들어지고, 일본에서는 노치백 모델이 이스즈 제미니로 나왔다. 현대 포니에 맞설 차가 필요했던 새한자동차는 77년말 이스즈 제미니 모델을 들여왔다. 당시 첨단 감각의 포니에 맞설 차로 독일차 뿌리의 제미니는 상당한 경쟁력을 갖춘 듯했다. 그러나 고장이 잦고 연료소모가 커 포니의 독주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엔진은 전 모델 카미나의 것이었다고 한다.

전세계인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월드카는 전세계인의 불만을 불렀다. 한 곳의 취향에 맞추기 위한 노력은 다른 곳의 불만을 가져왔다. 싸게 구입한 부품을 필요한 지역으로 나르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이 당시 GM의 월드카 전략은 실패로 기록된다. 우리 나라에서 제미니의 경쟁력은 포니에 뒤졌다.

제미니는 82년 초 맵시로 이름을 바꾸며 프론트 그릴을 슬랜트하게 손질했다. 억지에 가까운 변화가 어색했던 기억이 난다. 플라스틱 사출이 흐느적거리는 그릴과 사각 헤드램프의 처리가 엉성했다. 독일에서는 이미 다음 세대 카데트가 나온 뒤였다. 맵시는 83년 다시 맵시나로 바뀌고, 85년 초에는 맵시나 하이 디럭스 모델이 나왔다. 이 차는 당시 대우의 기함이었던 로얄 살롱을 축소한 모양으로 작은 차에 최고의 사치를 담았다. 독일과 일본에서는 사라진 모델이 한국에서는 크고 화려한 차로 탈바꿈했다. 월드카의 한국적인 결론이었다. 85년 현대는 이미 엑셀을 내놓고 있었다. 월드카의 잔해를 모아 만든 차 맵시나 하이 디럭스는 제미니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대우는 카데트의 한 모델을 건너뛰어 다시 신형 카데트인 르망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맵시나 디럭스는 86년 르망이 나올 때까지 2만 대 정도 만들어졌다.

로얄 살롱의 축소판 같은 외모 지녀

시승차 85년형 하이 디럭스에는 제미니의 모습이 뚜렷하다. 오래된 차를 보며 여러 생각에 잠긴다. 맵시나 하이 디럭스가 나온 배경은 ‘무조건’ 로얄 살롱을 닮자는 것이었다. 작은 차에 최대한 품위를 갖춰 보수적인 고객을 잡자는 생각이다. 이는 포니2나 엑셀이 갖추지 못한 점이었다.

격자형 그릴과 헤드램프로 만들어진 앞모습은 로얄 살롱의 축소판이다. 왕관을 그려 넣은 엠블럼이 고급차임을 분명히 한다. 두터운 몰딩을 댄 크롬 범퍼와 그 아래 안개등은 로얄 살롱에서 가져왔다. 이 안개등은 녹이 슬거나 뒤틀려 달려 있는 차가 많았는데, 시승차의 것은 깨끗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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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차의 보디는 당시 유행하던 밝은 파란색이어서 옛 추억을 부추기기에 충분하다. 도어에 달린 커다란 백미러도 로얄살롱의 것이다. 앞 범퍼의 두터운 고무 몰딩은 웨이스트라인으로 이어지고 다시 뒷바퀴 구멍까지 연장된 뒷 범퍼로 계속된다. 원래의 카데트 외모에서 멀어진 변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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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보다 트렁크가 커지고, 테일 램프 역시 휘황찬란하다. 원래 제미니의 모습에서 앞뒤로 살을 더해 무거워 보인다. 그러나 품위를 찾으며 균형을 따질 일이 아니다. 테일 램프 아래 두터운 몰딩을 둘러 범퍼가 2개인 듯한 착각에 빠진다. 벤츠를 베낀 모양이다. 번호판을 비추는 램프가 모두 4개인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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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램프 사이는 벌어진 틈이 크고, 크롬 몰딩 끝마무리는 적당히 타협한 수준이다. 엉성한 구석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우리의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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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라는 이름이 예쁘다. 맵시나 역시 예쁜 이름이다. 우리말도 차 이름이 될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였다. 맵시나에서 ‘나’는 가, 나, 다하는 의미로 2번째 맵시라는 뜻이란다. 그래서 정확한 이름은 ‘맵시-나’이다. 그럼에도 트렁크 엠블럼은 맵시 하이-디럭스로 되어 있다.

시승차의 깨끗한 실내를 보며 이대로 박물관에 갖다놓았으면 하는 욕심이 든다. 하이 디럭스의 대시보드 디자인은 이전의 맵시나와 다르다. 경쟁차인 포니2를 의식한 듯 운전석 앞으로 계기를 모으고 선반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대우차만의 색깔이 분명하다. 로얄 살롱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다. 조금은 엉성한 플라스틱 마무리가 당시의 대우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로얄 프린스의 것을 줄인 듯한 스티어링 휠이 눈에 익다. 오늘따라 가느다란 림이 정겹게 느껴진다. 계기판 안에 큼직하게 들어 있는 2개의 원은 속도계와 시계이다. 타코미터가 흔치않던 시절, 차마다 커다란 아날로그 시계가 달려 있어 좋았다. 원안으로 그어진 빗금은 한껏 멋을 부린 흔적이다. 가운데 센터 페시아에는 슬라이딩 타입의 공기조절 스위치가 달려 있고 그 아래에 놓인 라디오가 클래식하다. 2개의 다이얼 사이로 버튼이 나열된 라디오는 귀해 보인다. 대시보드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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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4단의 기어 시프트 레버 역시 로얄 살롱의 것이다. 대우차가 다 그렇듯 후진기어는 왼쪽으로 당겨 위로 밀어 넣는다. 사물함까지 갖춘 센터콘솔은 고급스러운 감각이 넘친다. 반면에 도어 패널은 밋밋하다. 유리창은 손으로 빙빙 돌려 열어야 하는 원시적인 형태지만, 에어컨까지 갖춘 것에 감탄한다.

맵시나의 크기에 적당한 85마력 XQ 엔진

운전자세는 만족스럽고 사방시야는 시원하게 트였다. 실내 크기는 그저 그렇다. 이 차의 기본 틀은 74년형 카데트다. 이때만 해도 소형차의 실내공간 확보는 요즘 차만큼 과학적이지 못했다. 전체 보디에서 승객석이 차지하는 부분은 크지 않다. 게다가 앞뒤를 늘린 하이 디럭스 모델에서는 공간효율이 더 작아진다.

하이 디럭스는 대우가 처음으로 자체 개발했다는 XQ 엔진을 얹었다. 이 엔진은 로얄 XQ에 얹혀 국산 자동차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큰 보디에 작은 엔진을 얹은 차는 언덕길도 제대로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85마력은 맵시나의 작은 보디에 적당한 힘이다. 큰 차와 엔진을 같이 쓴다는 사실은 맵시나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 데 도움되었을 것이다. 잘 관리된 시승차는 엔진 역시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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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거리계는 5만km가 안 된다. 파워 스티어링을 갖추지 않아 저속에서 핸들조작이 무겁지만 그밖에 어려운 점을 찾을 수가 없다. 페달 반응이 민감하고, 기어 변속이 부드럽다. 달리고 서고 돌아가는 데 별다르게 신경 쓸 일이 없다. 별로 오래된 차 같지가 않다. 3천rpm의 저속에 최대토크가 세팅되었기 때문인지, 별다른 스트레스가 없다. 힘차게 내뻗을 때만 가끔 4단 뿐인 차에서 5단 기어를 찾게 만든다. 진공배력 방식의 브레이크는 부드럽고 믿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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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깨끗한 올드카를 세차게 몰 수는 없는 일이다. 귀한 차를 타면서 뒷바퀴굴림 차의 즐거움을 확인해볼 수도 없다. 차를 아끼는 마음으로 차분히 몰아간다. 맵시나의 반응도 덤덤하다. 솔직히 말해 맵시나는 운전이 재미있는 차가 아니었다. 맵시나 이야기가 슬픈 이유 중 하나다.

서울 도심을 달리는 동안 맵시나는 많은 이의 시선을 모았다. 지나는 차의 오너들은 맵시나를 향해 손짓을 보내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옛 차를 탄 기분에, 나의 고향인 삼청동 골목길을 찾았다. 한옥을 배경으로 한 올드카가 오래 전 찍은 사진처럼 보인다. 시승차 앞유리에는 출고증이 그대로 붙어 있다. 차주인의 성격을 읽을 만하다. 그런 애정으로 오늘날 맵시나가 이렇게 보존되었을 것이다. 트렁크 바닥에 널린 신문지는 87년 판이었다. 빛 바랜 신문에서 찾아낸 이문세와 조용필의 얼굴 피부는 팽팽해 보였다.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세상은 정겨웠다. 이 차는 자동차 10년 타기 시민운동연합의 데모카로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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