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형 벤츠 220S 화려한 클래식카의 추억
1999-08-29  |   22,318 읽음
1959년은 자동차의 황금기였다. 이때는 내가 좋아하는 차가 많았다. 영국에서는 군침 흐르는 재규어 Mk II가 거리를 누볐다. 59년은 미니가 발표된 해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우주선 같은 시트로엥 DS19가 미래를 알렸다. 미국에서는 캐딜락 엘도라도가 하늘 높이 꽁지날개를 폈다.
오늘의 시승차 벤츠 220S는 그때 독일의 자존심을 알린 차였다. 독일차만의 품질로 최고급차의 위치를 다지던 때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독일은 빠른 경제회복을 이루고 있었다. 벤츠는 마샬 플랜의 주요한 수혜자였다. 50년대 말에는 구매력이 살아나 자동차에 수요가 커졌다.

테일핀 스타일의 벤츠로 유명해
직렬 6기통 124마력 엔진 얹어


품질 좋은 차 벤츠는 독일의 신흥 부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100명이 사면 95명이 다음에도 벤츠를 골랐다. 어떤 이는 벤츠를 산 뒤 아우토반을 60마일 달린 후에야 아내를 태우지 않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벤츠의 인기를 알리는 상징적인 농담이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세계의 모든 자동차 메이커는 얼마간 전쟁 전의 모델을 만들었다. 벤츠도 예외가 아니어서 전쟁 후 금형이 남아 있던 170시리즈를 만들었다. 그후 여유를 갖게 되자 처음 만든 모델이 모노코크 보디의 180시리즈다. 59년 180시리즈의 둥근 보디에서 탈피해 각진 보디로 새로운 시대를 알린 것이 W111 보디의 오늘 시승차 220S이다. 어째 표현이 요즘 듣는 얘기와 별로 다르지 않다.

220S는 완전히 새로운 보디로 펜더가 둥근 30~40년대 스타일과 차별되는 밋밋한 측면을 내세웠다. 50년대 미국 자동차 디자인을 휩쓴 테일핀을 가진 벤츠로 유명했다. 오늘의 S시리즈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모델이다. 220은 같은 보디로 나중에 4기통의 190시리즈가 만들어지고, 크롬치장이 화려한 300 모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엔진과 러닝기어는 구형 220시리즈에 쓰던 것을 손질했다. 220S는 트윈 카뷰레터를 써서 124마력을 내고, 220 SE는 연료분사장치를 얹어 약 135마력을 낸다. S는 "수퍼"를, E는 연료분사를 뜻한다. 이때 벤츠의 모델 넘버는 앞의 숫자가 배기량을 뜻하고 뒤의 영어 이니셜은 뜻이 여러 가지다. 연도별 모델이 헷갈리는 부분이 있어 벤츠 부품을 청구할 때는 섀시 넘버를 쓰게 했다. 62년형부터 앞바퀴에 디스크 브레이크를 달았다. 59년부터 65년까지 생산된 220S 중 오늘 시승한 차는 64년형이다.

시승차의 밝은 살색은 미국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컬러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때 르망이 이 색을 칠했지만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 차는 몇 년 전 국내에 머물던 미국인의 것을 인수받았다. 우리 나라에서 버텨온 차가 아니라 미국에서 들여온 클래식카다. 어릴 적 본 듯한 이 차는 오래된 차라는 감각에 혼동이 생기게 한다. 35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70년대의 벤츠와 크게 차이나지 않아 언제나 벤츠는 그 모습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동그란 헤드램프가 위아래로 달린 것은 미국 수출형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법은 동그란 헤드램프만을 허용했다. 원래 독일차는 전체를 한 장의 타원형 유리로 덮는 개성적인 모습이었다.
벤츠만의 그릴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자랑이다. 요즘 벤츠에 비교하면 훨씬 위아래로 크고 긴 모양이 공기저항을 염려하기보다는 권위를 내세웠다. 프론트 그릴이 보네트에 달린 차는 당시의 벤츠밖에 없을 것이다. 악어 입이라 불리던 보네트는 그후 세계의 모든 고급차들이 베꼈다. 그 결과 요즘은 소형차도 보네트에 그릴을 달고 있다.

라디에이터 캡 모양 위의 세 꼭지 별 벤츠 마크가 화려하다. 자랑스러운 세 꼭지 별은 휠 커버를 비롯해 얼른 눈에 띄는 것만도 8개나 된다. 보네트를 열면 정비가 쉬워 보이는 엔진룸이 반갑게 나타난다. 듀얼 카뷰레터는 6기통 엔진의 파워를 예감하게 한다.
보네트의 굴곡은 보네트와 펜더가 합쳐지는 모양으로 40년대 형태와의 이별을 고한다. 옆면이 밋밋한 차는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철판이 유난히 두터워 보이는 것도 벤츠만의 숨은 비결이다. 어릴 적 기억에 유난히 단단해 보이던 벤츠는 잔잔한 충격이었다. 두 겹의 범퍼가 단단한 감각을 더한다.
펜더 끝이 아니라 중간에 달린 백미러는 현실적이다. 앞창 모서리가 굴곡진 덕분에 가능한 위치였다. 옆창이 각진 것은 전체적인 인상을 날카롭게 한다. 넘치지 않지만 적지도 않은 크롬장식이 화려하다.

벤츠에 날개가 달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래서인지 220S는 "핀테일"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미국차를 닮았다는 사실이 독일차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W111(W110과 W112 포함)의 수명은 길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의 시승차는 더욱 귀한 존재다. 바퀴구멍의 곡선도 50년대 미국차의 라인을 따른다. 앞뒤 유리가 랩어라운드인 것이나, 뒤 번호판 뒤로 숨어 있는 연료주입구도 미국풍이다.
도어의 여닫힘이 벤츠 아니면 안될 감각이다. 어쩌면 요즘 벤츠보다 이 시절 차의 감각이 더 뚜렷했는지 모른다. 도어핸들의 자물쇠 뭉치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오차를 허용할 수 없는 설계다.

자동 4단의 칼럼식 기어 달아
조금 무겁지만 여유롭게 달려


220S의 실내는 낯설지만 곧 익숙해진다. 향수를 달래는 분위기에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저 멀리 나간 앞유리가 시원하다. 앞 유리창을 휘감는 나무장식은 통나무로 만들었다. 검은색 대시보드 비닐과 어울려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이룬다. 당시에는 대시보드를 덮은 비닐조차 사치였다. 손으로 빙빙 돌리는 삼각창에는 낭만이 가득하다.
수직으로 선 속도계가 낯설다. 커다란 흰색 스티어링 휠은 안으로 크롬 링을 달아 옛 향기가 넘친다. 가는 림의 감촉이 너무 좋다. 벤츠는 스티어링 휠 지름이 큰 것으로 유명했다. 왜 그런가 하는 질문에 단순히 계기판을 보기 쉽도록 했다는 대답이었다. 2개의 링 사이로 계기판을 보면 그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크롬, 크롬, 크롬이 넘친다. 번쩍이는 장식이 화려한 클래식카다. 글로브 박스 위 크롬선이 50년대 다이너스 식당 테이블 장식을 떠올리게 한다. 헤드램프를 비롯해 와이퍼, 초크, 라이터가 모두 같은 모양의 스위치로 되었다. 네모난 아날로그 시계가 잘 어울린다. 워셔액과 상·하향등 조절은 바닥의 버튼으로 한다. 주차 브레이크는 케이블식이다. 클래식카에 복고풍은 당연하다. 비상등이 없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도어의 삼각창이나 윈도는 모두 수동식이다. 이 차에 전자식 편의장비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달리는 데 필요한 기본장비만 있어 마음이 편하다. 전자장비가 아닌 기계적인 구성만으로 좋은 차를 만들던 시대였다. 가볍게 움직이는 수동식 윈도의 부드러움에서 벤츠의 저력이 느껴진다.
시트쿠션 아래에는 스프링을 달아 푸근한 기분이 그만이다. 배만 잠그는 시트벨트도 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벤츠는 오래 전부터 안전에 남달랐다. 이미 51년에 충돌 때 엔진이 밑으로 밀려나게 해 승객의 부상을 막고 53년에는 크럼플 존을 만들었다. 59년 안전벨트를 최초로 단 차도 벤츠다.
뒷자리는 시트쿠션이 높아 앉는 자세가 편하다. 헤드 레스트가 없는 앞자리 너머로 시야가 탁 트였다. 헤드룸과 무릎공간도 고급차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쏘나타에 견줄 만하다.
시동을 거는 손에 가벼운 전율이 느껴진다. 99년에 몰아보는 64년 차가 흥분을 일으킨다. 이래서 클래식카를 즐길 것이다. 엔진은 금방 걸리고, 에어컨은 상당히 센 바람을 불어댄다. 가운데로 모인 와이퍼는 요즘 미니밴에서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운전석에서 바라보는 굴곡진 보네트의 개성과 세 꼭지별의 위풍이 당당하다.

트랜스미션은 자동 4단이다. 당시 미국차에는 자동 2단 기어가 많았으니 역시 벤츠는 그때도 남달랐다. 칼럼식 시프트 레버는 게이트식으로 움직여 처음에는 조작이 쉽지 않다. 레버를 당기고 밀며 굴곡진 길을 따라 오르내려야 한다.
조금 무거운 듯 하지만 220S는 여유롭게 달린다. 차는 손에 익을수록 속도를 더한다. 상아를 닮은 하얗고 커다란 스티어링 휠은 아주 매력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220S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당시 모노코크 보디나 독립식 서스펜션은 흔치 않았다. 어릴 적에는 튼튼한 벤츠가 프레임도 없는 차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었다. 이 차는 덩치가 크지만 한때 유럽과 아프리카 랠리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62년 유러피언 랠리 챔피언이다. 랠리에서 얻은 노하우로 리어 액슬(스윙 액슬) 가운데에 수평으로 스프링을 달아 코너링 성능을 좋게 했다.

문득 본지에 몇 해 전 벤츠 시승기를 썼던 가수 김창완씨의 추억이 생각난다. 어릴 때 벤츠를 얻어 탄 그는 승차감의 극치를 느껴보기 위해 목의 힘을 완전히 빼고 머리를 덜렁이던 경험을 얘기했다. 벤츠가 출발하고 정지할 때 얼마나 목이 흔들리나 실험해 본 것이다. 그와 나의 나이가 같다면 그때 그 차는 220S임에 틀림없다. 59년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련한 분위기가 좋았던 드라마 "은실이"의 장낙도 사장 차도 이 차였다. 시승차와 달리 헤드램프가 한 개였으니 아마 190이나 200 모델이었을 것이다. 벤츠를 시승하면서 은실이를 생각하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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